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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May 14. 2020

프랑스에서,
나는 왜 불편한 글을 쓰는가

프랑스 낯설게 보기 2화


  ‘왕자와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모든 동화들이 이렇게 끝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대체 언제까지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읽고 자라야 하는 건지 싶었다. 이런 이야기들이 지닌 결말에는 어떤 교훈도 아름다운 내면화도 없다. 단지 우스꽝스런 판타지만 있을 뿐이다. 내가 디즈니류 동화와 만화를 아이에게 안 보여주고 싶었던 이유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삶은 이처럼 단순한 장밋빛의 1차원적 곡선이 아니란 것을. 그럼에도 사람들은 장밋빛을 찾는다. 꽃향기를 찾는다. 보기 좋은 것 듣기 좋은 말을 찾는다. 달콤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장의 신경을 자극하여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분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행복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의 고통과 슬픔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잊을 수만 있다면 계속적인 도피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현실로부터 도망 다닌다. 진실을 보지 않기 위하여. 
 
 먹방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 것은 모두 이것과 닿아 있다.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더 강한 도피처를 찾는 것. 불편한 것을 보지 않기 위해 편한 것을 찾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을 보는 것은 어렵다. 진실을 보려거든 먼저, 내가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진실의 조각들이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님을 받아 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실을 외면한다. 나의 그림자를 보는 건 나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이고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마주하는 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다 하여 없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바라봐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모른 체하고 외면할수록 그것은 힘이 세진다. 내가 저항하는 만큼 그것 역시 반대쪽에서 똑같은 힘으로 표출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담겨있는 사람들의 감정, 그 마음의 의지가 진실을 살아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실은 무섭다. 그 안에는 그것이 존재하게 하는 저마다의 감정과 의지가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못된 방향에서 세상을 보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방향을 바꾸어 다른 쪽에서 세상을 볼 때 정답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체게융 / 이미지는 실체가 아니다  


 내가 프랑스 남자와 결혼하여 프랑스에 살게 되었을 때, 한국의 모든 이들이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모두는 나를, 가여운 신데렐라가 드디어 왕자님을 만나 꽃길 속으로 들어가듯 바라보았었다. 나는 단번에, 세상의 모든 성공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머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선택한 곳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땅’ 유럽의 선진대국 프랑스였기에. 그러나 그들의 부러움도 나의 기대감도 똑같은 환상이었음을 직시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그저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만족스럽고 행복해야 마땅한 이곳에서 나는 숱한 ‘이상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라면 겪지 않았을 생경한 경험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것들은 주로 나를 불편하게 했고 불쾌하게 했고 분노하게 했다. 아시안이라는 이유로 나는 길거리에서 프랑스 아이들에게 물벼락을 맞았고, 동네 채소가게 아저씨로부터 매번 싸늘한 눈빛을 받았고, 병원 접수대 직원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적인 망신을 당했다. 내 아이에게서 ‘불어가 완벽하지 않은 엄마가 부끄러우니’ 더 이상 친구들 앞에서 한국말도 하지 말고 학교에도 오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아이 학교에 봉사하러 간 날은 내 아이와 반 친구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중국년이래요’라는 놀림을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이 나라의 불편한 것에 대해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내가 겪은 차별의 경험은 단지 몇몇 무지한 사람들만의 단발적인 문제가 아니었음을. 그것은 이 사회에 집단무의식으로 내재되어 있는 뿌리 깊은 제국주의 관점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그렇기에 작은 문제들이 여전히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는 것임을 말이다. 남들처럼 적당히 사랑받고 적당히 안락하고 적당히 행복했다면 나도 적당히 만족하며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삶은 원하지 않아도 다가오고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것은 보통 ‘전통’이라 말하여지는 이 사람들의 완고한 ‘고집’과도 닿아 있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 최고라는 자부심, 그러한 과한 자기중심적 사고와 자긍심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남편도 시댁 가족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차별의 문제는 ‘좋은 사람’과 상관없다는 뜻이다. 그것은 의식적 행동이 아닌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매번 ‘우월하다고 느끼는 그들’과 ‘그렇지 못한 우리들’이라는 불편함을 내게 상기시켜주었다. 그리고 그것의 근본을 찾아 나서도록 나를 일깨워주었다.


이 풍요, 이 여유, 이 낭만은, 수많은 힘없는 나라들의 수탈과 학살로 세워진 것들임을 잊어선 안된다. 그들의 땀과 피가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왕국이었다.


 사람은 ‘자신에게 닥쳐야’ 비로소 관심을 가진다. 내가 프랑스에 대해 불편한 글을 쓰게 된 것은 이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들을 거친 결과였다. 그것은 ‘불만’이 아닌 ‘정당한 분노’였고 계속된 불편함은 나를 사유하게 했다. 그리고 각성하게 했다. 내가 이 땅에서 경험한 차별들은 현재도 계속되는 모두의 차별적 경험들과 연결된 것이라는 것을. 오늘도 프랑스 폭격기에 죽어가는 아프리카와 중동 사람들의 비극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비극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경험은 소중하다.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나는 생각하였고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프랑스 글들이 불편한 분들의 마음을 안다. 그분들은 나와 같은 모욕적인 경험을 겪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들에게 프랑스는 따뜻한 미소, 친절한 사람들, 예쁜 기억들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만큼 프랑스에 커다란 애정이 있고, 나아가 내면에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프랑스를 ‘나’와 같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기에 프랑스를 비판하는 글은 자신이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게 한다. 한국인이 한국에 대한 싫은 소리를 들을 때와 같다. 그 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한 가지를 얘기해주고 싶다. 어떠한 한국도 내가 아니 듯 아무리 고결해 보이는 프랑스도 당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고결함 안에 불편한 진실들이 숨겨져 있다. 아무도 얘기하지 않지만 없어지지 않는 그것 말이다. 앞으로 내가 들려줄 프랑스 얘기들은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고 들어 본 적 없는 불편한 이야기들이 될 것이다. 그것은 견고한 성과 같은 프랑스 이미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무엇보다 프랑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할 것이다. 진실은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 때문이다.

진실은 불편하다. 진실은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 안을 때 우리는 균형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더 이상 그것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진실은 내 앞에, 여기 내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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