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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13. 2020

일본 군국주의를 만든 프랑스, 프랑스 경제를 살린 일본


 2018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기념일. 샹젤리제 거리에 욱일기가 나부꼈다. 파란 하늘에 대비되는 선명한 빨강. 일본과의 수교 160주년 기념으로 프랑스 정부가 일본 자위대를 공식 초청했고 일본 육상자위대가 버젓이 욱일기를 들고 퍼레이드를 한 것이다. 행진이 끝난 후 마크롱 대통령은 웃으며 그들을 맞이하였고 엘리제궁 앞에서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파리 한인사회는 충격을 받았고 아시아인들은 분노하였다. 1940년 7월 14일 나치가 하켄크로이츠 기를 들고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한 이후 처음보는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위안부정의연대(CWJC)는 프랑스 정부에 항의하는 공개서한도 발표했지만 프랑스는 침묵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동안 등장하던 욱일기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나치문양 사용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강력히 처벌하는 프랑스의 ‘전범기 용인’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이다. 엄연한 일본 제국 범죄의 묵인이었고 선전장까지 만들어준 셈이다. 왜 그랬을까.

 

2018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기념일에 욱일기를 들고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는 일본자위대 모습


 1600년대 초 처음 접촉이 시작된 이래 1844년 프랑스 해군 원정대의 오키나와 파견과 1858년 일본이 유럽 5개국과 맺은 수호통상조약으로 프랑스와 일본의 관계는 시작된다. 17세기 네덜란드와 활발한 상거래를 하던 일본은 그들을 통해 최신 서양 지식들과 나폴레옹 이야기를 접하고 있던 터였다. 당시 프랑스는 중상주의 정책 아래 패션과 사치재 산업 특히 견직물 산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에 누에 전염병이 확산되며 1860년 프랑스는 생사의 84%를 수입에 의존해야 했고 이때 일본 생사를 발견한다. 그리고 1885년까지 일본 생사 생산량의 50%를 수입한 프랑스는 실크무역의 세계 리더가 된다. 

19세기 프랑스 산업의 중심이던 견직물 산업은, 전적으로 일본에 의존했던 것이다.

 프랑스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준 일본에게 프랑스도 보답을 했다.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일본을 공식 초대해 일본 문화의 유럽 시장 진출 발판을 마련해주었고 이때 소개된 ‘우키요에로 자포니즘이 탄생’하게 된다. 식민지배 정당화를 위해 오리엔탈리즘을 차용한 것이 처음이 아님에도 일본 문화는 열광적인 팬덤을 만들며 무섭게 뻗어 나갔고 프랑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유럽 문화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우키요에 그림들은 철저히 일본 정부 주도하게 선정된 출품작들로, 풍속화 속 모습은 19세기 실제 일본이 아닌 ‘보여지길 원하던 이미지’였다.


1880년 일본 생사를 수입한 프랑스 '실크와 빛' 포장 라벨 이미지(좌)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건립된'일본관' 건물과 관람하는 파리지앵들(우)
일본 복식을 하고 사진을 찍은 프랑스 인상파 화가 '뚤루즈 로트렉'(좌) 1887년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 뒤로 우키요에 그림들이 보인다(우)

 

 이뿐이 아니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1871년 ‘이와쿠라 사절단’을 서양 각국에 보낸 일본은, 프랑스에서 법률시스템을 연구하였고 1873년 일본에 파견되어 22년간 일본을 도운 프랑스 법률전문가를 통해 ‘현대법률시스템 구축’을 완료하였다. 물론 일본은 당시 ‘강한 프로이센’에 경도되고 비스마르크에 감명받아 1882년 독일 프로이센의 헌법을 가져와 메이지 헌법을 탄생시켰지만, 시스템의 기초를 다지도록 도운 것은 프랑스였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일본의 성장에 기여한 결정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
 
 일본이 가장 원했던 것, 서양 열강들처럼 ‘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필요했던 것을 프랑스는 제공해주었다. 바로 ‘군사력의 증강’이었다.

 1865년 프랑스는 100명의 엔지니어와 노동자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공장 건설과 인프라 설계를 도우며 일본의 초기 산업화에 기여했는데, 이때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일본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진다. 나폴레옹 시절 군대 혁신을 이루며 프랑스 육군을 세계 최강군대로 이끈 프랑스의 ‘선진 군사 시스템’이 전수된 것이다. 1867년 일본에서의 첫번째 프랑스 군사절단 임무가 시작되었는데, 프랑스는 일본의 7개 보병연대와 4개 포병대대, 1개 기병대대와 1만 명의 병사들과 신병들을 훈련시켰으며, 일본 최초 해양 무기고를 건설했다.


1861년 '프랑스군과 게이샤' 그림(좌) 1872년 1년 넘게 12개국을 시찰하고 온 '이와쿠라 사절단' 런던(우)
1867년 Jules Brunet 대장과 함께한 프랑스의 첫번째 일본군사임무 사절단(좌)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일본관 홍보 포스터(우)

 

 이때 프랑스가 건조한 일본 최초의 철갑전함 Kōtetsu는 1869년 하코다테만 해전의 신정부군 승리에 기여함으로써, 메이지유신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막부 세력과의 전쟁이던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은 최신 무기로 무장했는데 이때 프랑스에서 제조한 ‘Minié 소총’이 일본에 대량 판매되었다. 10년 뒤인 1874년 프랑스의 두번째 군사절단이 파견되었고 일본에 군사훈련 센터가 세워진다. 1884년 프랑스의 세번째 군사절단이 파견되며 일본 해군의 현대화가 이루어졌고, 1886년에는 프랑스 엔지니어가 4년간 일본에 파견되어 새로운 무기고 건설과 전체 함대 건설을 돕는다.
 
 이때 건조된 것이 ‘마츠시마 전함’으로 후에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5년)의 승리를 견인하게 된다. 많은 일본 장교들은 프랑스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프랑스는 정기적으로 일본 해군에 전함을, 육군에 군비를 공급했다. 1910년부터 프랑스는 일본에 비행기와 항공 장비들을 배달했으며 1918년 프랑스는 네번째 군사절단을 파견하여 군사 항공 임무를 전수해주었다. 프랑스의 군사적 도움이 ‘일본의 근현대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셈이다.

 일본이 병력을 2배로 증가하고 해군 전함 운용력을 2.5배로 늘리고 국가 예산의 27%를 군비로 사용하며 ‘강한 군사국가’를 완성하였던 때이다. 그 이듬해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10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였다. 유럽 열강들의 팽창주의와 군국주의를 닮고 싶었던 일본의 야욕이 실현된 것이다.
 

프랑스가 건조한 일본최초 철갑전함 Kōtetsu, 메이지유신을 이끈 주역이다(좌) 프랑스가 설계하고 건조한 '마츠시마 전함'. 중일 분쟁까지 일본 해군의 기함이었다(우)
나치 하켄크로이츠기와 함께 걸려있는 일장기. 욱일기를 들고 있는 2차대전 일본군. 프랑스 군복 입은 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1867년


 이처럼 프랑스와 일본은 경제, 법률, 예술 분야에서 서로 긴밀한 관계였을 뿐만 아니라 군사 산업의 매우 중요한 파트너였다. 일본이 프랑스 무기 소비국이 되어줌으로써, 일본은 프랑스의 군수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주었고, 프랑스는 제국의 야망을 품고 있던 일본의 군국주의 실현을 도왔다. 
 
 그러한 두 제국의 야욕 뒤에는 ‘프랑스 계몽주의’가 있었다.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현대화와 메이지유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그는 자유주의, 공리주의, 부국강병을 주장한 계몽주의자로 1862년 분큐 유럽 사절단 시절 프랑스 계몽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었다.
 
 충직한 신민을 만들겠다는 메이지유신의 ‘정한론’과, 무지를 계몽하겠다는 프랑스의 ‘식민지 팽창론’은 똑같이 ‘국가 공리를 추구’하며 ‘문명개화’라는 소명을 실천한, 계몽사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된후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 공진회' 개막식 근정전 앞에 걸린 일장기(좌) 2018년 프랑스 브랜드 Dior 가 선보인 욱일기 드레스(우)
프랑스 여배우 '마리옹 꼬띠아르'가 2019년 행사장에 쓰고 온 모자(좌) 일본을 44번 방문한 프랑스 전 대통령 자크 시라크가 일왕 부부 앞에서 공손히 두손을 모으고 있다(우)


 2011년 무기수출 금지 원칙을 완화한 일본은 이듬해 바로 프랑스와 공동 무기 개발에 착수했고, 2014년 프랑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무기 전시회’에 신무기를 내놓았다. 미쓰비시 같은 일본의 전범기업들이 참여했다. 욱일기 모자를 쓰고 나타난 한 프랑스 배우에게 한국 팬이 욱일기 의미를 알려주자 그녀의 매니저는 말하였다. "프랑스인들이 욱일기 무늬의 뜻도 모르고 아무 때나 쓰고 있는 것은 미친 짓 같다" 프랑스인들의 이러한 ‘무지’는 프랑스가 2차 대전에서 일본의 의미를 전혀 교육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전범국가의 전범기를 공식적으로 지지하였다. 그 행위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모독이며 반인류 범죄에 대한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한다. 나치 처벌에는 강경하고 일본의 전쟁범죄에는 관대한 프랑스의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프랑스는 과연 ‘역사를 바로 세운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는 그것을 질문할 차례다. 






프랑스는 전통적인 군국주의 국가


* 참고 자료 : 프랑스 일본 관계 위키피디아 영문 '일본군 현대화 시켜준 프랑스' http://asq.kr/95PmUQS9B2jz1, 프-일 관계 위키피디아 한국어 번역 http://asq.kr/ohriubPPMNAi, 일본 군대 근대화는 '프랑스 도움' 영문 http://asq.kr/8RW5Lg6Grlm6, 프랑스-일본 관계 역사 영문 http://asq.kr/9PABw4GI8GH8, '일본 제국주의 정신구조' 논문 '충직한 신민'과 프랑스 계몽주의 상관관계 http://asq.kr/ui1xvzqFn9Md, 프랑스 Minié 소총 '보신 전쟁'에서 일본에 대량 판매 http://asq.kr/FVKzaexMeqV9, 파리 시내 행진한 욱일기 기사 http://asq.kr/cDupMtXru3wf, 샹젤리제 '욱일기 퍼레이드' 영상 https://url.kr/6sHmYR, 일본 문인 '시가 나오야' 프랑스어 공용어 주장 http://asq.kr/3T7RBlQ3TBZ8h, 일본 생사 팩 스티커 이미지 출처 http://asq.kr/01nRuMsiGJKt,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 일본관 이미지 출처 http://asq.kr/yGM2LVJJGAxD, 프랑스 여배우 '욱일기 모자' 사건 http://asq.kr/ctYnFaQDjuEj, 2014년 프랑스 무기 전시회에 참가한 일본 http://asq.kr/94p9QDqZgG7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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