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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20. 2020

프랑스의 식민지 만행과 학살,
'지옥'이 된 아이티


 ‘프랑스적 기준의 세계화’라는 프랑스 목표는 ‘군국주의’와 만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무자비한 식민지 침탈과 살육이라는 프랑스의 반인류 범죄가 시작된 것이다.
 
 프랑스가 다른 열강들처럼 식민지를 경영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식민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다. 
식민지를 정복했다는 것은, 문화와 경제적인 예속뿐만 아니라 원주민의 모든 고유한 권리를 함께 박탈했음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생명권이 포함된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 만행에 치를 떨지만 프랑스가 그러한 일을 했을 거라고는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아는 프랑스는 ‘자유와 인권의 나라’라는 깨어지지 않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 제국의 행패를 부린 역사는 알고 있어도 프랑스나 영국 같은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 만행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누구도 얘기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식민지인들을 얼마나 악랄하게 수탈하였고 잔인하게 학살했으며 잔혹하게 능욕했었는지 말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실제 일어난 일이고 분명한 프랑스의 과거다. 일본이 과거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듯, 프랑스가 모른체하고 있는 그 과거를 상기해보고자 한다.


'프랑스 기업들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착취당한 아이티인들(좌) '프랑스를 위해 목숨 바친' 아프리카 식민지 군대 병사들이 프랑스에 학살당한 티아로예 학살(우)


 프랑스의 식민지 침탈 야욕은 왕정 시절이었던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03년 '퀘백'으로 불리는 땅이 포함된 북아메리카 땅의 절반을 점령하여 '누벨 프랑스(새로운 프랑스)'라 칭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된 탐욕. 그 면적은 무려 8,100,000km2에 달했다. 그로부터 20년 후 남아메리카의 '기아나'를, 30년 후 '괄룹' '마르티니크' '세인트루이스'같은 카리브해 섬들을, 60년 후 '아이티'를, 17세기 후반 인도 해안 일부를, 18세기 후반 아프리카 '세네갈'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몰락과 영국, 스페인과의 패권에서 밀려 많은 식민지를 빼앗기게 된다. 이 시기를 프랑스의 '제1차 식민제국'이라고 한다. 이때 점령했던 나라 중에 프랑스가 유독 중요하게 생각한 나라가 있었다. 아이티 였다.  
 

< 아이티 140년 지배 : 식민지 배상금을 청구하고 독가스 대량학살까지 자행한 프랑스 >
 
 중앙 아메리카에 있는 섬나라 아이티는 16세기초 스페인에 점령당한 뒤 원주민들이 몰살 당했기에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데려와 정착시켰고 그들이 현재의 아이티 주민들이다. 1664년 프랑스 서인도 회사가 식민지 경영을 인수하고 공식 영유권을 선언한 후, 섬은 반으로 나뉘어 동부는 스페인이 서부는 ‘생도맹그’란 이름으로 프랑스가 지배하게 된다. 아이티는 현재 세계 최빈국 중에 하나지만 당시만해도 세계 최대의 설탕과 커피 생산국이었으며, 유럽의 아메리카 단일 식민지 중 가장 많은 ‘부’를 조달한 국가로 한때 프랑스 국부의 70%까지도 조성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는 당연히 아이티를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아이티는 1804년 오랜 식민지배를 끝내고 자주 독립을 이룬다. 


카리브해의 나라들과 아메리카 대륙으로 팔려가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강제로 '노예선'에 승차하고 있다
1685년 루이14세의 노예 칙령 '코드 누와'에 의해 인간의 권리를 박탈당한 흑인들(좌) 15년의 전쟁 끝에 독립을 이룬 아이티(우)

 
 프랑스 농장 소유주들은 북미의 2배인 80만명의 아프리카 노예들을 아이티로 데려왔다. 그러나 식민지가 끝날 무렵에는 50만명으로 감소했다. 가혹한 노동과 학대, 고문, 살인으로 이어진 결과였다. 프랑스의 노예제도는 가장 잔혹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인에게 불복종한 노예들은 채찍질 당하거나 거세 당하거나 산채로 팔다리가 바퀴에 부서지는 등 극도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독립 직전 나폴레옹은 아이티를 필사적으로 지켜내려 군대를 파견했는데 이들이 저지른 만행과 학살이 실로 참혹하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프랑스는 1794년 ‘해외 식민지에서의 노예제도 폐지’를 발표하였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사상에 감명받은 아이티 흑인 독립군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는 아이티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군과 협력하였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아이티를 교두보로 북미에서 영국을 몰아내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아이티 원주민들과 흑인들은 2만명의 막강한 나폴레옹 군대와 싸워야 했고 심지어 프랑스군은 독립군 지도자 ‘투생’을 평화논의 제의로 초대한 후 납치하여 옥사시켰다. 필사적으로 아이티를 사수하려던 프랑스는, 포로들을 화형 시키거나 수장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가마솥에 산채로 넣어 죽이거나 원형 경기장에 몰아 넣어 개가 물어 뜯어 죽이게 했고, 심지어 대량학살을 위해 흑인을 가득 태운 배의 짐칸에 이산화황 가스를 넣어 질식해 죽였다. 

이런 배가 바다로 나갔다가 텅 빈 채로 돌아오는 일이 무수히 반복되었고 파도에 떠밀려온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며, 이러한 가스 선박 학살 피해자만 1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평소에 나폴레옹을 깊이 존경했던 히틀러가 여기서 가스실 아이디어를 얻었을 거라는 얘기도 있다.
 

나폴레옹은 아이티에서 12세이상을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좌)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은 사탕수수를 먹지 못하도록 깡통 입마개를 착용한채 노역을 했다(우)
아이티 독립운동 독립군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좌) 1791년부터 15년간 계속된 '아이티 독립운동'(우)

 

 실로 프랑스 혁명이라는 이름이 무색한 잔혹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독립한 아이티에게 무려 ‘식민지배 배상금을 요청’했다. 아이티가 독립함으로써 자신들이 1억5천만 프랑를 손해봤다는 이유였다. 프랑스는 독립한지 21년이 지난 나라의 수도 앞 바다에 군함을 정박해 놓고 협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른 유럽 열강들과 결탁하여 계속 압력을 넣었다. 아이티는 막대한 배상금 지불을 위하여 미국과 독일에게 돈을 빌려야했고, 배상금의 이자까지 쳐서 완전한 지불이 끝난 것은 그로부터 122년이 지난 1947이었다. 이것이 현재 아이티가 세계에서 가장 처참한 나라로 전락한 직접적인 이유다. 


 아이티를 잃은 프랑스는 서아프리카 나라들(코트디부아르, 말리, 가봉, 기니)과 마다가스카르, 중앙 아프리카에 공을 들이며 1890년대 차례로 식민지화 한다. 그 중 1차 식민제국 때 이미 식민지가 되었던 세네갈에서 1944년 노골적인 학살이 있었다. '프랑스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식민지 군대에 대해서였다. 
 

< 티아로예 학살 : 부당함에 항의한 징집된 식민지 병사들 300명을 군부대에서 사살한 프랑스 >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는 일제의 징용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병사들을 대규모로 징집했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가장 먼저 프랑스 식민지가 된 세네갈의 청년들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부터 1,2차 세계 대전과 1차 인도차이나 전쟁까지 조국 세네갈이 아닌 프랑스를 위해 징집되고 목숨을 바쳤었다.


'프랑스 제국' 국기를 들고 있는 '프랑스 식민지 군대' 아프리카 병사들 모습
1차대전에 징집되어 '프랑스를 위해' 싸운 후 학살당한 티아로예 캠프 세네갈 병사들(좌) 프랑스에서 10년간 상영금지 당한 영화 'Camp de Thiaroye'(우)


 그러나 프랑스 병사들과의 노골적인 임금 차별과 형편없는 복지가 주어졌고, 결정적으로 약속한 연금과 보상금이 식민지 병사들에게만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1944년 참다 못한 식민지 병사들이 티아로예 병영에서 시위를 일으키자 프랑스군은 이들을 향해 발포했고 300여명의 흑인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비무장인 아프리카 병사들을 프랑스군이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무자비하게 사살한 것이다.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34명으로 알려졌으나 프랑스 역사가 Armelle Mabon에 의하면 400명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후 프랑스 군사재판소는 생존한 식민지 군인들에게 10년형을 선고하기까지 하였다. 드골이 이끌던 임시 정부 시절이었다.


 이 사건은 <Camp de Thiaroye> 라는 영화로 1988년 세네갈에서 제작되었는데, 프랑스에서 10년간 상영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좌파 정권이라는 미테랑 시절이었다. 식민지 청년들은 프랑스에게 총알받이 그 이상이 될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일본 제국의 영광을 위해 징집되고 죽어 나갔던 우리 조선의 청년들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그 부당함은 직접 당해본 민족이 아니면 모르는 설움이다.


1944년 티아로예 학살을 기억하기 위해 세네갈 다카르에 그려진 벽화


 이렇듯 프랑스는 ‘자유와 인권의 나라’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완전히 반대편의 정서에 있는 과거를 지녔다. 오히려 잔악한 역사를 가진 일본과 같은 결을 지닌 나라에 가깝다. 

 
 
분명한 건, 그 모습은 지금껏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와 정반대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본글과 연결된 필자의 다른 글


참고 자료 : 나폴레옹의 아이티 학살 http://bitly.kr/IckkcomWN나폴레옹은 '인종 청소 원조' http://asq.kr/lmHQfehpIEUY, 아이티 역사 위키피디아, "생의 절반을 노예로 살았던 아이티인의 프랑스인들 범죄 내용 상세증언" http://asq.kr/zsWOK8o1HlYoG<프랑스 아이티 탐험의 역사> Antoine Métral "사방에 시체더미가 쌓여 있었다" 목격자의 진술 토대로 쓴 책 http://asq.kr/enMtXKzG00UZi<Mémoires d'un esclave> Frederick Douglass, 카리브해 노예들에게 가해진 신체 훼손 행위들과 잔혹 역사 http://bitly.kr/F4wGGylsfpY프랑스 기업들에 가려진 과거 노예무역 https://url.kr/QCdxsa아이티 혁명 위키피디아 http://asq.kr/7Gn6CGajsV6df<나폴레옹의 범죄> 클로드 리브, 위키피디아 http://asq.kr/OUrcg9GlazUf, 나폴레옹은 '히틀러, 무솔리니 모델' http://asq.kr/opOcdWjIQ흑인 살생 역사 성찰 http://bitly.kr/z60sxY2IEzs, 티에로예 학살 http://asq.kr/dq8cUjJtIUJ5, http://asq.kr/EcDpITclaDW4, http://bitly.kr/rsExIs5OQ'식민지의 경제적 착취' 강철구 교수 http://bitly.kr/DS2EOCaDUfc, 아이티/생도맹그 나무위키 https://namu.wiki/w/아이티http://bitly.kr/9XyNjPxgO, 티아로예 실제 학살자수 400명 추정 http://asq.kr/GhOBc2Dl3VUq, 티아로예 세네갈 병사들 사진 http://asq.kr/2fZMmQspvQPMg, 드골이 이끌던 '자유프랑스군' 65%가 서아프카 병사들 http://asq.kr/FeZNSsSE2gY1<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제임스 불로트 "유럽중심주의는 식민주의에 대한 면죄부" http://bitly.kr/N4NX3CPrP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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