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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21. 2020

프랑스의 베트남 착취와 학살,
'문명화'는 프레임이다


 프랑스의 잔악한 식민통치는 곳곳에서 계속되었다. 프랑스는 당시 영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식민제국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식민지 경제로부터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인도차이나의 베트남과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프랑스는 또 다른 악랄함으로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마다가스카르 70년 지배 : 혹독한 지배. 독립을 열망한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프랑스  > 
 
 마다가스카르의 토착 원주민은 인도네시아에서 넘어온 폴리네시아인들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여러 열강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중 1811년 영국이 점령했다가 1883년 프랑스가 점령하게 되고, 1897년부터 1958년까지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극악한 노예 제도와 무한 착취와 억압적인 통치는 아이티와 같았다. 더구나 프랑스가 자신들이 침략한 나라에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뻔뻔함을 보인 것은 아이티만이 아니었다.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전쟁 보상금을 요청’하였고, 불평등조약으로 인해 마다가르카르는 1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 '파리 국립 당국'에 돈을 빌렸다. 프랑스는 노예 제도의 유지와 모든 학교의 폐쇄를 결정했다.
 
 플랜테이션 농업 형태로 프랑스 자본가들만 배를 불리고 현지인들을 가혹하게 착취한 것은 기본이었다. 그들의 본성은 독립을 위해 저항하던 현지 독립군들을 15년간 처참하게 학살한 것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마다가스카르는 이 기간동안 70만명의 사람들이 희생당했다고 말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2차대전 기간 '프랑스 해방'을 위해 징집되어 싸운 마다가스카르인들은, 드골이 자신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독립을 인정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린건 프랑스의 대규모 학살이었다.


말라가시 봉기가 일어난 마다가스카르 도시 Moramanga 국가 기념물로 조성된 '말라가시 봉기 기념' 조형물(우) 말라가시 봉기 당시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힌 마다가스카르인들(좌)
2019년 제작된 말라가시 봉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Fahavalo> (좌) 말라가시 봉기 당시 조국 마다가스카르를 위해 싸운 독립군들 모습(우)

 

 1947년 원주민 말라가시인들은 독립을 위한 대규모 무력 투쟁을 다시 일으켰고 수도까지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18,000명의 정규군을 파견해 진압한 과정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프랑스군은 고문, 강간, 대규모 처형, 마을 파괴, 비행기에서 산 채로 던지기 등의 만행으로 아이티의 지옥을 그대로 펼쳐놓았다. '말라가시 봉기'로 알려진 독립투쟁의 진압으로 1년간 10만명의 마다가스카르인이 학살되었다. 겨우 70년 전의 일이다


나치로부터의 해방에 기뻐하던 프랑스가 같은 시기, 학살자의 얼굴로 남의 나라를 탄압한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 착취와 학살은 아시아에서도 자행되었다. ‘인도차이나’라 불리던 프랑스 식민정부가 동남아에 있었고 대표적인 나라가 베트남이다. 베트남에서는 아침으로 바게트빵을 먹는다. 바게트빵 안에 베트남식 재료를 넣어 만든 샌드위치 ‘반미’를 먹는 것이다. 프랑스가 100년을 지배했으니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100년의 세월이 남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베트남 100년 지배 : 플랜테이션 농장의 착취와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학살 >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였던 ‘응우옌 왕조’는 당시 베트남에 카톨릭을 전파하던 프랑스 아드란 주교의 지원을 받고 건국되었기에 베트남은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을 중국 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카톨릭 탄압을 빌미로 1858년 침략하게 된다. 1862년 프랑스는 베트남에게 400만 달러의 '전쟁 배상금' 지급 강요 등의 불평등 조약인 ‘사이공 조약’을 체결하게 하여 무력화시킨 후, 1945년까지 베트남을 식민통치하였다. 1885년 수립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포함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정부’였다. 

 

프랑스 식민지배 시절 베트남 Quan Loi의 한 플랜테이션 공장 모습
1858년 베트남 침략후, 프랑스 타이어 회사는 플랜테이션 착취로 '세계 최고 기업'이 되었고, 1900년 '미슐랭 가이드'를 만들어 프랑스를 '미식의 나라'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10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자행한 것은 ‘베트남의 노예화’ 그리고 ‘프랑스 이윤 극대화’에 맞춰져 있었다. 프랑스는 저항을 최소하 하기 위해 베트남을 3개(통킹, 안남, 코친차이나)로 나누어 분할통치 하였는데 이것은 지역사회와 종교 세력들 간의 적대 구도를 만들어 통일을 방해하려는 전략이었다.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이라는 단어 사용을 금하였고 대부분의 토지를 몰수한 후 거대 플렌테이션 농장으로 재조직하였다. 베트남 농민들은 무임금과 구타와 각종 질병과 영양실조 속에서 하루 15시간이라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농장에서는 매일 수천명이 사망하였는데 유명한 ‘미셸린 타이어’의 고무 농장에서는 세계 대전기간동안 17,000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다. 베트남의 고무 생산은 연간 6만톤으로 전세계 생산량의 5%에 해당할 만큼 거대 산업이었고 철저히 프랑스 자본가들을 위해 착취되었다. 농민들에게는 노동세, 인두세, 공공문서세 등 각종 세금이 무겁게 부과되었으며 술과 쌀, 소금, 아편 생산을 프랑스가 독점함으로써 식민정부는 세금으로만 연간 50억달러를 벌어들였다. 1902년에는 베트남인들에게 술 구입을 의무화하였고, 매년 80톤 이상 생산되던 아편은 프랑스 식민정부의 중요한 수입원이자 현지인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게 했다. 

 
 1880년부터 1930년까지 베트남의 쌀 재배 토지면적은 4배가 증가했으나 같은 기간 농민의 쌀 소비량은 25%으로 감소하였다. 베트남의 수공예 산업은 파괴되었고, 베트남인들은 광산이나 건설 현장, 공장,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식민정부의 공공사업에 강제노역으로 동원된 철도 노동자 25,000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아연, 주석, 석탄 같은 지하자원을 착취하여 수출하였다. 1908년 베트남 농부들의 시위를 프랑스는 총살과 마을 파괴로 응대했으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이던 1947년에는 300명이 넘는 베트남 민간인이 프랑스군에게 학살당했다. 170명은 여성이었고 157명은 어린이였다. 여성들은 살해되기 전 강간당했다. 326채의 집이 불태워진 ‘My Trach’학살이었다.


2차대전 후 베트남에서 일본군이 물러나자 도착한 프랑스군(좌) 1913년 베트남 안남 해변을 행진중인 프랑스 해병특공대원들(우)
프랑스 군인순찰단이 베트공으로 의심되는 시민을 심문하는 모습(좌) 프랑스에서 열린 무수한 '식민지 박람회'중 베트남 전시회 포스터(우) 자국민들에게 오리엔탈리즘을 팔았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대부분의 열강들이 식민지를 독립시켰을 때 오직 프랑스만 더욱 적극적으로 식민지에 집착하였다. 1946년 프랑스는 베트남 지배 권리를 다시 주장하였고, 호찌민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았다. 2만명 상한성인 프랑스군 병력을 15만명으로 확충한 프랑스는 11월 북부 항구 하이퐁에서 폭격을 하였고, 그날 하루에만 6천명 이상의 시민을 학살하였다. 1949년 사이공에 친프랑스 괴뢰정부까지 수립한 프랑스는, 이후 8년간 이어진 전쟁에서 베트남 독립 저지를 위해 5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무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의 일이다. 

 

 이 모든 선명한 역사와 증거가 있음에도 프랑스는 말한다. 그것은 ‘문명화 사명’이었다고. 그러나 프랑스의 식민지배 말기인 1939년까지 베트남 인구의 80%가 문맹이었으며 2천만명 인구를 가진 베트남에 학생수가 700명 미만인 대학이 1개뿐이었다. 베트남인 10만명당 의사는 고작 2명뿐이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도 프랑스는 계속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굶주림과 질병과 폭력과 학살 앞에 완벽하게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베트남인들의 그 시간을 프랑스는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침략한 나라에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는 프랑스 법의 정체는 무엇인가

 
식민지 국민들을 온갖 법으로써 구속하고 속박한 ‘프랑스의 법’은, 무엇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는가


말라가시 봉기를 다룬 다큐영화 <Fahavalo> 생존자 증언 장면(좌) "이성이 인간을 업악하고 규제하며 계몽주의는 실패했다"고 비판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우)


프랑스의 서아프리카 식민지 ‘코트디부아르’는 나라 이름 자체가 프랑스말로 ‘코끼리 상아 해변’이라는 말이다. 프랑스는 거기서 코끼리 상아를 대량 반출하여 유럽에 내다 팔았었다. 또한 카카오의 주요 생산지였던 그곳에서 아동 착취 노동으로 초콜렛을 만들어 프랑스와 유럽의 시민들을 기쁘게 했다. 아이티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40%를 커피의 60%를 생산했었다. 세계 최고 타이어 회사의 고무는 베트남의 비윤리적 플렌테이션 농장에서 나왔다. 
 
프랑스의 식민지 경영 목적은 처음부터 ‘착취와 이윤 창출’이었으며, "문명화 사명은 식민지 국민들을 충성스러운 프랑스 시민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행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문명화’라는 말은, 오로지 프랑스를 위하여 만들어진 정당화 프레임일 뿐이다.
 
 
 
 


* 마지막 문장 " "의 말은, 역사학자 Melvin Euguen 말을 인용하였음

 

프랑스의 또 다른 학살


참고자료 : 마다가스카르 학살 자료 http://bitly.kr/0qFr7MveuYhttp://bitly.kr/8bwxjTwCWhttp://asq.kr/ftVXDrMm4oYD, http://asq.kr/7d93YjvQQJQthttp://asq.kr/juzGhTVR38fwP말라가시(마다가스카르) 봉기 위키피디아 http://asq.kr/P9vDCiBBQ78rH말라가시 학살 생존자 증언이 담긴 다큐영화 http://asq.kr/rBo688hp7vijrhttp://asq.kr/98MA6k1BZkDWr베트남 'My Trach' 학살 자료 http://asq.kr/WGc4kXCa3xFQu,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통치 구체적 내용, 브리타니카 http://asq.kr/GD7GOZfFWZTB, <french colonisation in vietnam> Jennifer Llewellyn http://asq.kr/lDkV4Hmb1HNf프랑스의 베트남 학살 http://asq.kr/PpOVhV53HYNWhttp://asq.kr/lDkV4Hmb1HNf, 사이공 조약 내용과 전쟁배상금 강요 http://asq.kr/yaHhMqKqjZBbL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위키피디아 http://asq.kr/qoGXFDzkG1I3나무위키 http://asq.kr/cP75wNFrmZZS마다가스카르 독립군 사진 출처 http://asq.kr/Fc6MLN6ZkIVYm베트남 전쟁 사진 http://asq.kr/WeBlkEDBjSgnf가슴 아픈 노동의 역사, 플랜테이션 http://asq.kr/a3cvpHwxXEiI, <식민지의 경제적 착취> <식민지 고유문화의 해체와 식민지 문화의 형성> 강철구 교수 http://bitly.kr/DS2EOCaDUfc, http://bitly.kr/iXM9ioy1Pm3식민지 아동노동착취, 코트디부아르 http://bitly.kr/lFTC9TglPRT, 역사학자 Melvin Euguen http://asq.kr/pPgguYb1i5c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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