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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23. 2020

르완다 내전 100만 학살 배후,
프랑스는 어디있는가


 해마다 4월 7일 르완다에서는 ‘크위부카’라는 국가 추모식이 열린다. ‘기억하다’란 뜻의 크위부카로 1994년 르완다에서 벌어진 참극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것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학살이라 불리는 르완다 내전. 그날 르완다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르완다 내전 개입 : 르완다 내전 100만 학살을 함께 계획하고 도운, 학살 배후 프랑스 >
 

르완다는 원래 20개의 씨족이 모여 살던 땅이었다. 농업에 종사하던 후투족이 85%, 목축업에 종사하는 투치족이 14%, 수공업에 좋아하는 트와족이 1%로 구분은 되어 있었지만, 모두는 키냐르완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였고 문화적으로도 유사성이 높았기에 거의 같은 종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게 토지 소유 여부로 부족을 나누는 개념은 없었으며 서로는 잘 융화하며 평화롭게 지냈다. 그런 르완다의 평화를 깨뜨린 건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었다.
 
 1899년 르완다는 부룬디와 함께 독일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 ‘종족 분류’가 생겨난다. 독일인들은 키가 크고 피부색이 덜 까맣고 코가 높은 투치족을 ‘검은 유럽인’이라 부르며 후투족과의 ‘차별 개념’을 만들었다. 1918년부터 르완다를 지배하게 된 벨기에는 아예 부와 직업에 따라 차등을 매기고 신분증에 종족명을 명기하는 카스트제도’를 도입하였다. 왕족이자 부유층인 투치족은 ‘대접’을 받았고 그렇지 않은 후투족은 ‘차별’을 느꼈다. 제국들의 오래된 통치술인 ‘분리통치’ 전략이었다. 나아가 벨기에는 투치족을 식민지배 앞잡이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후투족에게 증오의 싹을 심어준 이다. 
 

 1950년대 말 엘리트층인 투치족이 자주독립을 위해 움직이자 후투족은 ‘반투치’를 외쳤고 벨기에는 반대로 후투족을 지원했다. 1959년 투치족 2만 명이 살해된 후 권력은 후투족에게 돌아갔고 1962년 르완다는 독립한다. 그러나 1973년 쿠테타 정권 후투족 대통령은 식민통치 잔재인 ‘종족차별 정책’을 펼쳤다. 

85%의 후투족은 원래 농경 민족으로 맑고 순한 사람들이었다(우) 르완다 전통춤을 추는 무용수들 복장(좌)
르완다 전통춤을 추고 있는 무용수(좌) 전통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드러머(우) 르완다 전통 헤어와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 남성(중)


 차별받던 많은 투치족은 고국을 떠났고 일부가 1987년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창립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1994년 4월 6일 후투족 대통령 비행기가 폭격되며 전원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리고 이튿날 르완다에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혹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3개월간 100만 명 학살이라는 끔찍한 집단광기가 휘몰아친 이다.     


 후투족은 자신의 이웃이자 친구이자 동료이던 투치족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살생하였다. 평범한 시민들은 하루아침에 살인자로 돌변하여 칼과 도끼, 몽둥이, 괭이를 들고 인간 사냥을 했다. 후투족의 뿌리 깊은 증오는 투치족의 머리를 내리치게 했고 사지를 자르게 했다. 르완다의 모든 강과 호수에는 마체테에 잘린 사람들의 머리와 손발이 무수히 떠다녔다. 그러한 집단 광기 표출은 르완다의 사회적 현실과 절망 속의 사람들을 부추긴 ‘선전’에 있었다. 
 
 
당시 르완다의 실업률과 양극화는 정점에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좌절 속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때 투치족에 대한 극단적 비방 내용으로 가득 찬 ‘라디오 방송은 그들의 분노가 향할 대상을 정해주었다. 후투족은 투치족의 노예였다며 ‘학살=노예해방’이라는 프레임이 주입되었고, 투치족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학살의 당위성이 설파되었다. 후투족의 증오는 하늘을 찔렀고 그들은 그대로를 실행에 옮겼다. 계획된 선전’이 있었던 이다.


 또한 후투족 민병대들은 투치족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강간’했다. 학살 기간 50만 명의 투치족 여성들이 강간 후 살해되었는데 그것이 단 3개월간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우발적 범죄가 아닌 처음부터 ‘계획된 범죄’여야 가능한 이다. 유엔과 열강들은 방관했다. 그들은 주민들의 구조 요청을 거부했고 대응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학살 기간 2500명의 군사를 르완다에 파병했음에도 주민들은 돕지 않고 프랑스인과 프랑스 소유 재산만 지켰다1994년 7월 4일 RPF가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학살은 종료되고 투치족은 권력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2000년 RPF 최고 지도자 ‘폴 카가메’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내전 진상 조사가 시작된다.

대학살로 르완다에는 10만명의 고아가 생겨났다. 엄마 아빠를 잃고 피 묻은 옷 그대로 넋이 나가 있는 아이들 
중국에서 수입하고 프랑스가 돈을 빌려 준, 르완다 대학살에서 사용된 무기 '마체테'(우) 피난길에 주저 앉아 울고 있는 여인(좌)
국경을 넘게 해달라며 군인들에게 애원하고 있는 르완다 피난민 아이들(좌) 희생자들 앞에서 코를 막고 지나가는 아이(우)


 2008년 8월 5일. 르완다 정부의 조사 보고서가 나왔다. 대학살 배후에 프랑스가 있으며 프랑스군은 투치족 직접 살해와 투치족 여성들 성폭행 등으로 학살에 적극 개입했다는 것이었다. 2014년 프랑스 탐사전문 기자들이 출간한 책의 폭로가 이어졌다. "대학살은 오랜 기간 준비된 것이며, 그 배후에 프랑스가 있다" 


 
프랑스는 1990년부터 약 1천 명의 군인을 파견하여 후투족을 군사훈련시켰으며, 후투족에게 무기를 공급해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당시 대통령 미테랑과 당시 총리, 당시 외무장관 등이 대학살을 묵인하거나 조장했다고 폭로했다. 프랑스 비밀문서를 수년간 추적한 결과였다. 1994년 비행기 격추사건의 미사일이 1km 이내에서 발사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 지역은 RPF의 접근이 어려웠던 곳으로 후투족 군대와 프랑스 군대가 머물던 지역이었다. 미테랑 정권은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투치족 살해 대상자 명단을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프랑스 관리들은 투치족 비방에 참여하여 집단학살 논리를 가다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학살에 사용한 마체테 50만 자루는, 학살이 있기 1년 전인 1993년부터 1994년까지 중국이 수출한 것이었고, 무기 구입 대금은 프랑스 정부가 빌려준 돈으로 지불된 임이 밝혀졌다.

 RPF의 반격으로 전세가 역전된 와중에도, 프랑스는 잔존해 있던 후투족들에게 계속해서 무기를 공급했음도 드러났다. 프랑스는 학살 4년 전인 1990년부터 이미 RPF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1970년대부터 후투족 정권을 지원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르완다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배제하고, ‘프랑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였다.


나치 부역정권 '비시 정부' 하급 관료였다가 레지스탕스로 신분세탁한, 사회당 '미테랑' 전 대통령(좌) 르완다를 독립으로 이끈 독립군 대장이자 현 대통령 '폴 카가메'(우)
르완다 대학살 배후로 지목된 프랑스 고위 정치인들(좌) 맑고 예쁜 르완다 어린이들 모습(우)
르완다 대학살로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


그럼에도 2006년 프랑스 법원은, 비행기 격추 사건 책임을 카가메 대통령 측에 물어 측근들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뻔뻔스러움을 보였었다. 르완다 정부는 대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프랑스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정치적 실수였다"며 줄곧 책임을 회피해오고 있다.
 
[현 르완다 정부는 후투족이 무기 구입으로 빌린 10억 달러 외채를 고스란히 넘겨받았다. 가족과 이웃의 목을 베고 손발을 토막치는 데 사용된 마체테 구입 자금을 유족들더러 갚으라는 소리였다. 부채 탕감을 호소했지만,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주도한 채권단은 오히려 르완다를 재정적으로 고립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살아남은 르완다 사람들은 동포와 이웃과 가족을 죽이는 데 든 비용을 ‘프랑스 은행에 갚기 위해’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학살을 피해 피난을 떠났던 300만 명의 후투족 난민들은 식량부족과 콜레라 전염 등으로 많은 수가 사망하였다. 
 
 프랑스는 후투족 민병대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 말은 ‘프랑스군의 전술’을 함께 전수해주었다는 말이다. 가까이는 알제리 전쟁에서 멀게는 이탈리아 정복에서 프랑스군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강간'이 프랑스가 훈련시킨 르완다 군대에서 재현되었다는 것은 우연일 수가 없다. 50만의 투치족 여성들이 당한 능욕이 더욱 가슴 아픈 이유다. 공식 학살피해자는 100만명이지만 AERG(학살 생존자 학생협회)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는 200만명이 살해된 것으로 나온다. 강에 버려지고 화장된 시신은 포함되지 않는다.   
 
 르완다가 묻는다. 르완다 대학살의 실질적인 배후이자 공범인, 프랑스는 어디에 있는가.





* [ ]안의 문장은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9 - 르완다 대량학살 사건 이후>에서 가져옴


본글과 연결된 필자의 다른 글








참고 자료 : 르완다 대학살 폭로, 미국 공영방송 PBS 영상 http://asq.kr/lfAGmrnIZhH9O, <"Au nom de la France". guerres secrètes au Rwanda> -"프랑스의 이름으로-르완다에서의 비밀 전쟁. 프랑스 탐사전문 기자 베노아 콜롱바, 다비드 세르베네 "르완다 대학살 배후는 프랑스다" http://asq.kr/3C2jOBCDNzlUq, 르완다, 프랑스만 사과하지 않았다 http://bitly.kr/LIN3AmCjsdA, 르완다 ‘프랑스 대학살 개입 명단’ 공개 http://asq.kr/OquqJmSSLi1vw, 르완다 대학살 ‘라디오 방송’ 선전 http://asq.kr/yt4HEkz42cPHl, 프랑스 르완다 대학살 책임 http://asq.kr/dSUNcaggdrGhl, 르완다 내전 나무위키 http://asq.kr/9cE65Bt3l2qEh, 르완다 애국전선(RPF) 위키백과 http://asq.kr/gbGYpdCfxjn6x, 1994년 비행기 격추는 "후투족 군대나 프랑스 군대가 발사한 미사일일 확률이 높다" http://asq.kr/eLab7oEtDIkZo1994년 격추된 비행기 "승무원은 프랑스인" http://asq.kr/iOayrbmelpYAs, 르완다 내전 생존자들의 삶 http://asq.kr/eodCZaHQs69AG, 사르코지, 르완다 학살 '과오 인정' 그러나 '사과 아님' http://asq.kr/U1NUC9PJYug2i, 마크롱, 르완다 프랑스 개입 진상조사위 출범? 진실은 밝혀졌음 http://asq.kr/ERFDD2aKzXbaP, 1994년 르완다 피난민들 사진 출처 http://asq.kr/CPAb0we2leHT3, 울고있는 어린이들 사진 출처 http://asq.kr/vbJZ0UEjp6gF3, 마체테 사진 출처 http://asq.kr/Q9mhbAwHjS9Gq, 프랑스, 또다른 제국주의적 국가 http://asq.kr/J7Kirt1qjKx2<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9 - 르완다 대량학살 사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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