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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Apr 23. 2024

2-3. 미국 땅, 영주권 없는 서러움

2장. 욕심, 가자! 더 큰 세상으로


옐로스톤으로 가는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아침의 밝은 기운 때문인지 대부분 사람은 걱정과 달리 의외의 밝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니면 버스에서 들은 불평 몇 마디를 나 혼자 너무 크게 해석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버스에 오르자 가이드가 오늘의 일정을 안내한다. 그리고 옐로스톤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지자 버스 안은 작은 흥분이 감지될 정도로 웅성거렸다.     


“여러분, 어제 버스에서 정말 고생 많으셨죠? 제가 장담하는데 이제 몇 시간 후면 그 고생이 감동으로 바뀔 겁니다. 오늘 여러분이 가실 옐로스톤은 미국인들도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 보고 싶어 하는 꿈의 여행지입니다. 여기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모든 주의 자동차 번호판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미국의 주가 몇 개인지 아시죠? 네 50개 맞습니다. 그런데 49개 주의 번호판을 이곳 주차장에서 볼 수 있는 거죠.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뭐다. 네 맞습니다. 하와이주 자동차는 여기에 못 옵니다.”      


가이드는 혼자 신이 난 듯 말을 이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이 찾는 여행지란 뜻이죠. 그런데 여러분, 미국의 49개 주 번호판 말고도 13개의 다른 번호판도 구경할 수 있는데요. 왜 그럴까요? 네 맞습니다. 바로 캐나다 13개 주의 번호판도 동시에 구경할 수 있는 곳이죠. 주차장에 북아메리카 대륙 62개 주의 모든 차들이 모여있는 거죠. 여러분은 정말 복 받으신 분들입니다. 여행사 입장에서는 한국 손님들 모시고 이런 데 오는 거 반기지 않습니다. 힘들기만 하고 돈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또 없지요. 인생 최고의 경험이 될 겁니다.”     


가이드의 말대로 옐로스톤은 정말 이 세상이 아닌 듯 신비롭고 거대했다. 충청남도 크기의 분화구에 각양각색으로 끓어오르는 간헐천과 온천은 신비로움을 넘어 두려움을 자아낼 정도였다. 우리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고 어제의 불평과 불만은 오간 데 없었다. 이런 게 바로 인간의 간사함이랄까.     


이동은 비록 멀고도 길었지만, 여행은 대만족이었다. 사장 중 몇몇은 오히려 나에게 다가와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여행이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이렇게 편하지 않은 사람들과 굳이 이 먼 곳까지의 여행을 자처하겠는가. 나는 이 여행을 마무리하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진심은 결국 통한다. 눈앞에 닥친 작은 일에 연연해하지 말자.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방향이 옳다면 언젠가는 이르게 되리라. 언젠가는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묵묵히 나의 길을 가자.’      



새해에도 사업은 순항을 이어갔다. 아니 진화식이 나에게 약속한 대로 사업은 사상 최고를 향해 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시행한 정찰제는 완전히 제자리를 잡아갔고 신뢰를 바탕으로 영업을 펼치면서 거래처는 끊임없이 늘어갔다. 제조업은 생산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고정비가 비례하여 감소하는 특성이 있다. 그만큼 수익이 증가한다는 의미다. 나는 늘어난 수익만큼 직원들에게 혜택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동안 적자에 허덕이느라 손보지 못한 사무실의 집기와 비품을 교체하고 내부 인테리어를 새롭게 교체하면서 회사는 완전히 새로운 회사로 변모해 갔다. 1년 전에 다녀갔던 거래처 직원이 그해 다시 방문했을 때, 마치 다른 회사에 잘못 들어온 걸로 착각했을 정도라고 했다. 그만큼 회사는 바뀌었고 직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제 회사는 거칠 게 없었다. 그동안 앤써니 박 회장을 비롯한 여러 거래처에서 다녀가면서 나에게 새로운 방식의 사업을 제안했지만 나는 모두 거절했다. 지금처럼 원칙을 지키며 마음을 다해 사업을 추진해 나간다면 이제는 무리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1년간 회사는 실로 안팎의 모든 상황을 역전시켰다. 모든 면에서 간섭을 일삼던 본사에서도 대부분의 일을 나에게 일임했고 한국에서 전화를 받는 일조차 뜸해졌다. 경영개선과 함께 펼친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인해 한국 거래처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다녀간다는 걸 빼면 회사는 말 그대로 무사태평이었고 탄탄대로였다.      


하지만 모든 역사가 보여주듯 이런 태평성대의 시절에는 꼭 내부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자중지란自中之亂’. 그 누구보다 묵묵하고 성실하게 회사를 잘 다니던 정해진이 나에게 한 장의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법인장님, 저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정해진은 회사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직원이었다. 그는 미국 대학에서 MBA를 마친 인재이자 미국 회계를 다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한국 사람이었다. 아무리 진화식에게 많은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회계만큼은 정해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미국 회계가 가능하면서 한국 본사와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직원이 이 미국 시골 바닥에 얼마나 있겠는가?     


더 큰 문제는 회사가 아니라 정해진에게도 있었다. 정해진은 미국 영주권이 없이 우리 회사가 제공하는 비자로만 그동안 일을 해오고 있었다. 영주권이 없이 회사 비자로 근무한다는 말은 만약 회사를 그만두면 더는 미국에서 일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그 말은 곧 미국을 떠나야 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사실 영주권이 없는 정해진을 해고하는 일은 정해진과 그 가족 모두를 미국에서 추방하는 거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이게 미국에서 영주권 없이 살아가는 가장 큰 서러움이다. 나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정해진으로부터 회사를 그만두는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지금까지 회사 그만둔다는 내색 한번 없던 사람이.”     


죄송합니다법인장님제가 회사를 그만두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약속이라니? 누구랑 무슨 약속을?”     


진차장님이랑 약속을 했습니다만약 한 번만 더 실수하면 그만두기로요.”     


“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히 다 얘기를 해봐 속 시원하게.”     


나는 진화식에 비해 항상 정직하고 성실한 정해진을 깊이 신뢰했다. 그는 꾸밈이나 과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보기 드문 직원이었고 욕심이라는 게 아예 없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정해진 그대로를 고집했고 가장 충실하게 업무처리를 하는 스타일이었다. 물론 사무실 직원들도 그를 좋아하고 따랐으며 특히 현장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지내며 항상 나를 흐뭇하게 만들어 주었다. 학벌이나 능력과 비교해 터무니없이 연봉이 적었던 그를 나는 항상 안타까워했고 급기야 본사의 승인을 얻어 연봉을 올려주며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에 항상 그의 의견을 들어 반영했다.      


문제는 바로 그거였다. 진화식은 나의 그런 사랑을 독차지하는 정해진이 못내 마땅치 않았던 거다. 그리고 정해진의 성장은 바로 진화식의 존재가치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둘은 나이가 동갑임에도 언제나 예의를 갖춰 존칭과 존댓말을 쓸 정도로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했다. 편하게 지내라는 나의 제안에도 진화식은 그런 상하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렇게 정해진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진화식은 정해진에게 어떤 원칙 하나를 제시한 것이다.     


그 원칙은 “진화식을 거치지 않고 법인장인 나에게 어떤 보고도 하지 말 것”이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진화식에게 먼저 보고하고 진화식이 승인한 내용만 나에게 보고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이미 한 번 어겨 진화식이 나에게 혼난 일이 있었고, 만약 다시 한번 이런 일시 반복되면 사직서를 쓰기로 서로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말이 약속이지 이건 일방적인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진화식은 영주권이 없는 정해진이 만약 우리 회사를 그만두면 갈 곳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회사에서 쫓겨나면 바로 미국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 약점을 잡아 정해진을 이용해 온 것이었다. 다른 건 다 용서할 수 있어도 약자의 약점을 잡아 그걸 자신의 목적 달성에 이용한다는 건 내 삶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약자는 보호되어야 한다. 더욱이 둘은 같은 한국인에 동갑내기 친구가 아닌가. 도대체 진화식은 무엇을 위해 이토록 냉정하고 모질단 말인가. 그걸 통해 얻어지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진화식을 조용히 불렀다.     


“진차장, 정해진 과장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고 저렇게 일도 열심히 하는데 지금까지 왜 영주권 지원 안 해줬어?”     


아 네 법인장님그게 전 법인장님이 영주권을 신청하시면서 같은 회사에 신청자가 또 있으면 영주권이 거부될 확률이 높다고 정과장은 신청하지 못 하게 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띵하게 진동해 옴을 느꼈다. 이게 정녕 알만한 대학교를 나와서 대기업에 다니며 미국에서 주재원씩이나 하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수준이란 말인가? 의지할 사람 하나 없는 먼 이국땅에서 한국 사람끼리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그리고 언제든 우리를 한입에 털어 넣으려고 호시탐탐하는 저 노랑머리 경쟁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싸워도 승산이 있을까 말까 한 마당에, 가장 힘없는 직원의 신분을 살려 사기를 북돋아 주지는 못할망정 그 신분의 취약함을 이용해 사람을 노예처럼 굴복시키고 이용하려고만 한다니 도대체 이 인간들의 의식 수준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역시 탐욕스러운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힘없는 동포를 볼모로 나의 이익을 취할 만큼 양심을 져버리지는 않는다. 그동안 정해진은 곪아 터진 상처를 애써 숨겨가며 겉으로 웃어온 것이다. 비정한 상사들을 위해 싫은 내색, 작은 불만 하나 표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온 것이다. 그런 정해진이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회사라면 이 회사는 더 이상 나에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선량한 약자인 정해진을 위해서라도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불렀다.     


“두 사람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어차피 두 사람 사이에 약속이 있었다니 사직서는 수리한다. 대신 진차장은 이 모든 문제를 정리해서 본사에 보고하고, 정과장을 대체할만한 회계담당자를 이른 시일 안에 채용하도록 해.”     


의외의 빠른 결정에 두 사람은 모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는 최대한 감정을 눌러 다음 말을 전했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다른 직원들로부터는 어떤 결재든 보고든 직접 받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진차장이 취합해서 일일이 나한테 직접 보고하고 결재도 모두 진차장이 나한테 직접 받아, 그 어떤 일이라도 다른 직원이 나한테 직접 보고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래야 너희 둘의 약속이 모든 직원에게 공평한 거니까. 책임자가 한 번 정한 원칙은 지켜지는 게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럼 둘 다 나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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