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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Apr 16. 2024

2-1. 비극의 씨앗은 뿌려지고

2장. 욕심, 가자! 더 큰 세상으로

진화식과 함께 다다른 바닷가 숙소는 한마디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망망대해茫茫大海’라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오리건주의 바다는 다른 주와는 달리 유독 주의 이름을 따 오리건 코스트(Oregon Coast)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 해안선이 미국 내에서 최고로 손꼽을 만큼 아름답고 유명하기 때문이다. 인적이 드문 10월의 바다는 사람의 마음을 툭 틔워 대범해지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다. 진화식은 그걸 노린 걸까?      


나는 낚시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흉내만 내는 걸로 만족했다. 뭐든 열심인 진화식은 어떻게든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뭐라도 잡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허사였다. 때로는 그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연기인지 아니면 정말 해보려고 애를 쓰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돌아온 숙소에는 진화식의 아내가 차린 요리로 냄새가 진동했다. 두 가족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왁자지껄한 만찬을 시작했다. 내가 애주가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진화식은 유명 와이너리에서 사 온 포도주라며 종류별로 몇 가지의 포도주를 내와 잔에 넉넉하게 부었다. 저 멀리 태평양이 들려주는 몽환적인 파도 소리와 함께 우리는 술잔을 비우고 또 비웠다.      


진화식은 미국에 와 있는 동안 한국인 아내를 만나 결혼했고 첫 아이를 출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술을 마시다 말고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이 된 진화식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법인장님, 담배 하나 피우러 나가시겠어요?”     


술이 거나하게 취한 나는 한껏 기분이 올라 있었다. 진화식이 담배 한 개비를 입술로 가볍게 물어 불을 붙인 다음 양손으로 받들 듯이 건네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법인장님, 오늘 인사과에서 전화받으셨죠? 제 동기가 인사과에 근무하는데 오늘 인사 차장님이 통화하시는 걸 우연히 들었나 봅니다.”     


외로운 이국땅에서 두 가족이 함께 한 자리, 그리고 기분 좋게 와인을 들이켜 한껏 마음이 말랑말랑해진 나에게 진화식은 드디어 그의 속내를 드러냈다.     


“법인장님, 제가 미국에 와서 철없이 5년이라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겨우 결혼하고 이렇게 아들까지 얻었지만 수중에 돈 한 푼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작은 전셋집이라도 얻어야 하는데 그럴 형편조차 안 됩니다. 더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법인장님, 저에게 딱 1년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면 그동안 돈도 좀 모으고 주변 정리도 하면서 법인장님 부족함 없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막 회사가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경험 없는 친구가 이 정도 규모의 살림을 맡기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내년 한 해를 회사 역사상 최고의 해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법인장님 승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 아니겠습니까? 정말 약속드리겠습니다. 법인장님 인생에서도 최고의 한 해가 될 겁니다. 제가 저의 모든 걸 갈아 넣겠습니다.”     


“야 진차장, 인사가 뭐 내 맘대로 되냐? 너도 알잖아 인사과 놈들 지네 맘대로 사람 갖고 노는 거. 우리는 종이 위에 이름 석 자 찍히면 하루아침에 어디든 날아가는 거야. 오늘 기분 좋은데 그런 얘긴 그만하고 들어가서 술이나 마시자.”     


내 말이 끝나자 흐릿한 어둠 속에 흐르던 시간이 잠시 뚝하고 멈추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바라본 진화식의 눈빛은 그 순간 퍼렇게 변해 있었다. 술이 버쩍 깰 정도였다. 섬뜩한 살기가 느껴진 나의 온몸에 닭살 같은 소름이 번지고 있었다. 금세 눈빛을 바꾼 진화식은 다시 한없이 온화해진 아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법인장님, 제 어린 아들을 봐서라도 내년 한 해만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은혜는 제가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는 단어가 나의 뇌리를 스쳤다. “밤 잔 원수 없고, 날 샌 은혜 없다.”라는 말이 있다. 원수를 생각하면 하룻밤도 제대로 잠드는 일이 없고, 은혜는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 쉽게 잊힌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작은 피해라도 준 원수는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한다. 하지만 은혜를 입고 나면 금방 잊어버리기가 쉽다. 지금 진화식을 한국으로 돌려보낸다면 나는 분명 그의 원수가 될 게 뻔하다. 전세금도 없는 어린 처자식을 매몰차게 내쫓은 사람이 될 것이니 말이다. 반대로 그에게 1년이라는 기회를 더 준다면 그건 은혜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은혜가 정말 백골난망이 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

회사로 돌아온 우리를 기다리는 건 또 하나의 큰 숙제였다. 지난달에 선적해서 한국에 도착한 컨테이너 5대 분량의 제품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제품에 수입이 제한된 불순물이 검출되었다는 것이다. 불순물이 검출되었다는 건 검역을 통과할 수 없다는 뜻이고 검역을 통과하지 못하는 물량은 다시 미국으로 반송되어야 한다. 그리고 반송은 그 자체로 어마어마한 손실을 의미한다.     


제품에는 제품 원가와 생산비, 판매관리비 그리고 내륙운송비와 판매마진 등 모든 금액이 포함된다. 그리고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의 해상운임과 보험료 등 어마어마한 돈이 그 컨테이너 안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만약 불순물이 검출되어 반송된다면 돌아오는 비싼 운송료를 부담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돌아온 후에 반송된 제품은 규정상 모두 폐기되어야 한다. 제품은 만드는 비용보다 폐기하는 데에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 이 정도 물량이 반송된다는 의미는 지금까지 1년간 공들여 만들어 놓은 흑자 전환이 한순간에 모두 증발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법인은 다시 적자기업으로 돌아서는 건 당연한 일이고 만일 취급 과정에서 직원들의 실수나 관리 소홀이 적발되면 심각한 징계를 면치 못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순간 미국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한 명은 당연히 진화식이고 다른 한 명은 진화식보다 1년 늦게 현지에서 채용한 정해진이라는 직원이었다. 정해진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다 중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캘리포니아에서 정규대학을 마친 그는 오리건으로 건너와 우수한 성적으로 MBA를 마친 유능한 직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진화식과는 달리 한국 기업에서 중요시하는 눈치나 요령이 부족했다. 한없이 정직하고 모든 걸 원리원칙에 따라 정해진 그대로 따르는 직원이었다. 항상 진화식에 밀려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나는 진화식과 정해진을 급히 불러 모았다.     


“과거에도 이런 사례가 있었나?”     


진화식의 눈치를 살피던 정해진이 뭔가 신호를 얻었다는 듯 서둘러 대답했다.     


“네, 법인장님, 예전에도 반송된 사례가 두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지금처럼 물량이 많지 않았고 회사도 워낙 적자가 심하던 때라 누구 하나 신경 쓴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본사에서 사장님과 모든 경영진이 흑자결산을 전망하고 있었고 법인장이 바뀐 이후로 개선되는 경영상황에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하고 있는 시기였다. 만약 반송이 확정되면 모든 손실처리는 물론 사고 보고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로서는 또 한 번의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자, 그렇다면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뭐가 있을까?”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화식이 말을 이어갔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게 쉽지는 않은데요. 검역 당국에 재심사를 요청하는 겁니다. 그리고 재심사가 결정되는 동안 문제가 되는 제품의 하자를 살펴서 보완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검역 당국에서 재심사를 받아 준 사례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의 자회사로 오기 전에 본사에서 대정부 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었다. 검역 쪽 공무원이라면 충분히 손이 닿을 수도 있을 법했다. 문제는 시간을 버는 동안 한국에서 제품의 하자를 보완할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다.      


“좋아, 재심사는 내가 정부를 통해서 해결해 볼게. 대신 진차장은 지금 당장 비행기 알아봐서 한국으로 들어가. 내가 시간을 버는 동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품 하자를 보완하고 절대 반송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알았지? 이번 일 해결되기 전엔 한국에서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마.”     


나는 한국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재심사를 끌어냈고, 그동안 한국으로 건너간 진화식은 일사천리로 제품 하자를 보완했다. 그리고 재심사 결과 모든 제품은 그대로 수입통관 처리되면서 안전하게 거래처로 입고되었다는 진화식의 최종 보고가 따랐다.     


또 한 번의 위기가 지나갔다. 그리고 진화식에게는 한국에 간 김에 가족들 인사도 할 겸 며칠간의 휴가를 주었다. 그런데 진화식이 한국에 있는 동안 나에게 의미심장한 몇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모두 우리 제품을 구매하던 메이저 업체의 대표들이었다. 평소에는 전화할 일이 별로 없었던 그들이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와 내게 건넨 말은 대개 이랬다.     


“법인장님, 진화식 차장이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는지 아시죠? 어제 제 사무실에 다녀갔는데 뭐 인사발령 이야기를 합디다. 진화식 차장이 그동안 우리 회사에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이런 친구가 미국 법인에 있어야 한국에서 우리 마음이 놓입니다. 법인장님도 진화식차장 같은 베테랑 직원이 있어야 일하시기도 좋은 거 아닙니까? 보아하니 진차장 사정도 딱하던데 좋은 게 좋은 겁니다. 법인장님!”     


‘아니, 진화식 이 자식은 한국에 가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설마 컨테이너에 이물질을 섞어 넣은 것도 다 이 자식이 의도적으로 계획한 일 아냐?’      


나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진화식, 너 이 자식! 내 너를 반드시 한국으로 돌려보내고야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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