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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Apr 09. 2024

1-7. 환희의 신대륙, 선악과는 열리고

1장. 환희, 꿈에 그리던 미국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가?’     


진화식의 얼굴은 언제 보아도 붉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과일처럼 느껴졌다. 연하게 자국이 있는 여드름성 피부에 엷은 분홍빛이 감도는 그는 술을 마시거나 조금만 긴장해도 마치 카멜레온의 보호색처럼 낯빛이 바뀐다. 이미 붉어진 얼굴로 놀라는 척 나에게 대꾸했다.     


“법인장님, 신기원 전무가 말하는 건 그 어떤 거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지난해에 신기원 전무가 경쟁사의 임원으로 간 거 아시잖아요. 그 인간이 그 회사로 들어가면서 저에게 전화가 여러 번 왔습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우리 제품을 공급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계속 대응을 안 했습니다. 근데 본인이 먼저 저에게 딜을 걸어온 거예요. 잘 협조하면 미국 법인장을 만들어 줄 수도 있다면서요. 저는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거부했어요. 그래도 한참 선밴데 막 대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도 끊임없이 저를 유혹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화도 안 받고 카톡에 답도 안 한 겁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모르지만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법인장님.”     


두 사람의 말은 모두 완벽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나로 하여금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두 사람이 잘 짜놓은 대본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진화식은 언제나 그 말에 거짓말인 듯한 단서를 남겼다. 마치 살인의 피해자가 죽기 직전 남긴다는 다잉메시지처럼.     


“무슨 말이 오갔는지 모르지만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모르면 그는 억울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마치 무슨 말이 오갔다는 걸 아는 사람이 하는 말처럼 나에게 들렸다. 하지만 당시의 나로선 그 둘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길이 없었다.     



#

내가 회사를 위해 가장 급하게 할 일은 진실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회사를 먼저 살리고 보는 일이었다. 회사가 없다면 나도 진화식도 의미 없는 존재가 된다. 더욱이 업무를 장악하고 경영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기존의 틀을 완전히 부수는 전략이 중요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다. 나는 직원들의 썩어 빠진 정신상태와 이미 엉망이 되어버린 경영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두 가지 전략을 구상했다.      


첫째는 나 자신의 마음가짐을 단속하기 위한 것으로 <해병대 훈련소> 전략이라는 것이다. 해병대 출신인 나는 위기의 순간마다 이 전략을 세워 6주간 아주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세운다. 철저한 루틴과 절제된 행동으로 무너지지 않을 심리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 전략은 회사 경영을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환골탈태 換骨奪胎> 전략이다. 4년간 적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면서 사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던 회사의 분위기를 전면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다.     


<소통>

정식으로 미국에 부임하기 전, 잠깐의 출장으로 왔을 때 나는 법인장실의 위치에 큰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직원들은 모두 1층에서 업무를 하는 사이 법인장은 홀로 동떨어진 2층에서 하루를 보냈다. 직원들은 각종 결재를 위해 2층을 오르내려야 하고 혹시 자리를 비우는 날에는 다시 몇 번을 오가는 번거로움을 겪어야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소통의 부재’였다. 경영자와 직원 간 소통이 없는 회사는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다.      


부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1층에 있는 여유 공간으로 집무실을 내리는 것이었다. 창고처럼 방치되어 있던 조그마한 방 하나를 치우게 해 작은 집무실을 만들었다. 사실, 작은 회사의 경영자는 집무실이 클 필요가 없다. 크고 동떨어져 있을수록 소통은 단절된다. 차라리 그럴 바엔 아예 집무실이 없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경영자는 물리적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창의와 소통의 정신적, 심리적 공간이 필요한 사람이다.     


<분위기>

회사 내에 새로운 소통의 분위기가 정착되면서 나는 전 직원 회식을 준비했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심지어 같은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끼리도 회사 이외의 공간에 모여 따로 얘기해 본 적이 없다는 거다. 나는 모든 직원에게 회식 날짜를 공고하고 그날은 일을 일찍 마감하게 한 다음 파티를 열었다. 음식은 그동안 알게 된 한인 식당사장을 통해 일부 준비하고 나머지는 삼겹살을 사서 같이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술과 곁들여 한국의 다양한 음식을 맛보게 된 직원들은 난생처음 겪어보는 문화에 처음엔 얼떨떨해했지만 이내 적응했고 분위기는 진정한 파티 분위기로 변해갔다. 급기야 직원들은 그날의 회식을 “Korean Party”라고 명명했으며, 멕시코 출신 직원들이 많았던 탓에 다음 파티는 “Mexican Party”가 될 것임을 자기들끼리 떠들어 대곤 했다.      


소통으로 시작해 회사의 분위기가 좋아지자 사업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악순환의 연속으로 웃음을 잃었던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사무실을 채워가고 있었다.     


<비용 절감>

회사의 경영은 내 외부를 통틀어 무엇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는 정도였다. 큰 기계설비를 중심으로 제조업을 영위하는 회사에서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고정비는 경영에 큰 성패 요인이 된다. 제일 먼저 손을 댄 건 기계와 장비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동안은 기계가 고장 나면 그때마다 생산 반장이 땜질 식으로 부품을 사다가 교체하거나 수리하는 형태였다. 그야말로 공급처에서 발행하는 영수증이 바로 매출 전표가 되는 ‘묻지마’ 구매가 되었다. 심지어 같은 부품을 짧은 기간에 여러 번 교체한다 해도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당장 <구매/수선일지>를 만들도록 해 기록관리 하도록 했다. 그리고 회사 창업 이래 단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이용하던 수선유지업체 선정에 처음으로 입찰방식을 도입해 새로운 업체로 교체하면서 고정비를 대폭 삭감했다.     


뿐만 아니라 화재보험에 전문성이 없던 직원들은 터무니없는 보험료를 한 번의 검토도 없이 습관처럼 지급해 오고 있었다. 큰 건물에 기계와 고가의 장비 그리고 막대한 재고를 보유하는 회사의 화재보험료는 그 금액이 상상을 초월한다. 보험 가입금액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고 다른 몇 개 업체로부터 견적을 받은 결과 한순간에 나의 연봉과 맞먹는 금액이 절감되기도 했다. 


또한 수출업체에 있어 제품 수송용 컨테이너를 확보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동안 외부에 맡겨 만만치 않은 용역비를 지급하던 예약업무를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을 교육해 일을 수행하도록 했다. 그 또한 그 직원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 절감되었고 절감된 금액 일부를 담당 직원에게 추가로 지급하자 직원의 업무 만족도와 전문성 그리고 충성도를 한꺼번에 개선하는 효과를 냈다.     


이처럼 비용 측면에서는 심하게 말해 밑 빠진 독에 물처럼 새어 나가던 수많은 비용을 점검해 하나하나 효율적으로 바꾸어 나갔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자 수십 개월 연속 적자에 허덕이며 폐쇄 직전까지 갔던 회사가 아주 미약하지만, 흑자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마케팅>

기업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경영도 생산도 기획도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마케팅이다. 제품을 팔 곳이 있어야 비로소 그 이외 모든 기능이 부차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 법인의 마케팅은 그야말로 구멍가게 수준에도 못 미치고 있었다. 세상에 정리되어 있는 거래처 명단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물론 전산상에 거래처 코드며 매출액 등등은 출력할 수 있다. 하지만 마케팅과 영업에 사용할 정보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거래처의 담당자, 직함, 전화번호, 성향에 가족관계 심지어 생일과 사소한 마케팅 포인트 등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관리되어야 한다. 그런 자료도 없이 그동안 회사가 돌아가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이 정도로 회사가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진화식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정보와 그의 기억력 덕분이었다. 그는 5년을 넘게 이 일을 해 오면서 그러한 정보를 자신만의 성처럼 쌓아 두고 있었다. 회사는 한 사람의 머리에 의해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러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되고 의존도가 높아진 뒤 그 사람이 떠나면 회사는 망한다. 회사는 직원들의 머릿속에 있는 정보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그 직원을 통제할 수 있다. 이건 주객이 바뀌어도 그 정도가 너무 심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문제는 제품의 가격에 있었다. 진화식의 머릿속에 있던 정보로 좌지우지되던 거래처 관리는 가격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거래처에 따라 주문 물량에 따라 또는 진화식의 기분에 따라 가격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거의 동등한 거래처라 할지라도 공급받는 가격에 차이가 있었다. 미국 법인의 한국 거래처는 업계 특성상 거래처 간에도 소통이 원활한 편이었다. 만약 비슷한 규모의 거래처에 상당한 가격 차이가 있었다는 걸 인식하게 되면 비싸게 우리 제품을 쓰던 회사는 우리에게서 떠날 게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생각해 보라 나에게 돈을 더 받아서 나의 경쟁자에게 그 이익을 준다면 참을 수 있는 경영자가 하늘 아래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창립 이래 최초로 가격 정찰제를 도입했다. 그리고 문제는 매출이 큰 거래처와 적은 거래처의 차별화였다. 그 모든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역시 창립 이래 최초로 장려금 제도를 도입했다. 기여도가 큰 업체는 별도 평가를 통해 사후 장려금을 주는 방식으로 제도를 개선하고 이 사실을 한국의 모든 거래처에 통보했다. 대부분의 거래처에서는 투명한 가격 정책에 강력한 지지를 보내왔다.     


하지만 언제나 기존의 틀을 깨려는 시도에는 반드시 저항이 따른다. 그동안 가격 면에서 이익을 보던 거래처의 반발은 삼척동자도 예감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한국의 한 거래처 대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 거래처는 진화식이 무려 5년을 공들인 국내 메이저 업체였다.      


“법인장이 도대체 어떤 놈인지 지금 당장 한국으로 기어들어 오라 그래. 안 그러면 너희랑은 이걸로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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