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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Apr 12. 2024

1-8. 더 많이 속이는 자 더 많이 얻으리라

1장. 환희, 꿈에 그리던 미국

한국의 메이저 업체인 D사에서 연락이 왔을 때는 벌써 미국에서의 첫여름이 끝나가고 있었다. 법인의 경영을 도맡아 시작한 지 벌써 여덟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말에 나는 마음속으로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법인을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끌고 나가기 위해서 반드시 한 번은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단지 그 시기가 생각보다 조금 일찍 왔을 뿐. 어차피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가오는 파고를 이겨내야만 한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높은 파도가 밀려올 때도 있지만 파도가 높을수록 그 파도를 이겨낸 배는 더 먼바다에 이르게 된다. 이 단순한 진리는 나에게 일종의 설렘을 주기도 했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D사의 매출 현황을 철저히 분석했다. 그런데 지난해에 수입해 간 물량에 비해 올해는 그 물량이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D사는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원료만을 고집하는 업체였다. 그리고 그 원료는 우리 회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충분한 물량 조달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나는 D사 내의 원료구매 방식에 변화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출장 일정을 확정하고 진화식이 끊어 준 왕복항공권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음, 이 티켓이 나의 마지막 왕복항공권이 될 수도 있겠군.’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아니 낯설다는 생각보다 알 수 없는 고독감과 외로움이 진하게 느껴졌다. 마치 한국은 모두 나의 적이고 이 적진을 오로지 혼자서만 뚫고 나가야 하는 장수의 비장함이랄까. 나는 다른 모든 일을 제쳐두고 D사를 향해 돌진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D사의 담당 차장과 전무가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 회장실로 향했다. 넓은 회장실은 함부로 목소리도 낼 수 없을 만큼 엄숙함이 느껴졌다. 회장은 예를 갖추는 듯 마는 듯 악수를 청하고는 볼 것도 없다는 듯 응접탁자의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아니 법인장이 그렇게 높은 자리요? 그동안의 거래 방식이라는 게 있는데 거래처에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일방적인 결정을 해요? 안 그래도 법인장 바뀐 이후로 제품에 문제가 생겨 구매처를 완전히 바꿔버릴까 고민하던 차에 아주 잘 됐습니다.”     


“네? 제품에 문제가 있었다고요? 그건 제가 미처 알지 못,,,”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담당 차장이 서류 한 묶음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사진에는 우리 제품의 라벨이 붙은 많은 불량품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장의 사진에는 미국의 다른 거래처로부터 최근에 구매한, 누가 봐도 우리 제품보다 뛰어난 제품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담당 차장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법인장님 가신 뒤로 제품이 엉망입니다. 도저히 제품을 쓸 수가 없어서 다른 거래처 통해 일부 제품을 구매해 봤습니다. 그런데 제품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가 없어요. 작년까지는 정말 좋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무슨 큰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법인장이 바뀌는 틈을 타서 제품의 거래처를 바꾸려는 의도가 다분한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품 사진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 우리 제품을 다른 회사 제품과 바꿀 수도 있고 라벨은 어차피 포장지의 바깥 면에만 붙기 때문에 내용물은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모든 게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품에 문제가 있는 부분은 제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현장에 직접 가서 제품을 보고 싶습니다. 타사 제품도 마찬가지고요. 제가 부임하면서 오히려 QC 라인을 훨씬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제품 선적 전에도 몇 번을 다시 확인할 수 있도록 매뉴얼도 수정해 놨고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네요. 차장님, 같이 좀 가실까요?”     


나는 더 이상 머뭇거릴 생각이 없어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만약에 제품에 문제가 생겼다면 어차피 나의 자리는 이미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지못해 나를 따라 일어선 차장과 나는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향했다. 나는 개봉된 모든 제품을 비교하고 또 개봉되지 않은 제품의 박스를 열어 일일이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런 하자를 찾을 수 없었다. 나의 눈에는 여전히 경쟁사의 제품보다 우리 제품이 더 우월해 보였으며 크게 하자를 잡을만한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섬광처럼 어떤 생각이 떠오른 나는 정중하게 차장에게 요구했다.     


“차장님, 저 경쟁사라는 회사에서 보내온 제품 성분표 좀 볼 수 있을까요?”     


업계의 특성상 우리가 취급하는 제품은 항상 인증된 연구기관의 성분표를 받아 보관하게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원재료의 원산지와 연구기관이 표시되어 있음은 물론, 제품을 구성하는 성분과 비율이 아주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차장이 경쟁사 제품의 성분표를 내밀었을 때 나는 속으로 차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 이 까막눈아, 네 눈에는 이게 안 보이냐?’     


미국에서 발행해 온통 영문으로 작성된 제품 성분표가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문제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담당 차장은 그 성분표가 말하는 원산지의 약자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미국에서 생산하는 제품의 외향만으로는 그 원산지 비교가 잘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원산지에 따라 발생되는 가격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차장이 내민 성분표에 찍힌 원산지는 미국산 제품 중에 가장 저급한 원료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우리 제품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제품이었던 거다. 나는 차장에게 조용히 말했다.    

 

“차장님, 운전하세요. 당장 회장님께 갑시다.”     


그동안 우리 제품의 매출이 줄어든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담당 차장은 경쟁사를 통해 싼 제품을 비싸게 구매해 왔던 거다. 그리고 그 구매량이 늘어날수록 누군가에겐 그 이익이 돌아갈 거라는 건 굳이 따져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갑자기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많이 속이면 속일수록 더 부자가 되고, 더 떵떵거리며 사는 게 정녕 자본주의의 민낯이란 말인가. 정녕 그것이 자본주의의 선善이란 말인가. 굳이 제품 사진까지 조작해 가며 우리 제품을 저급으로 만들려는 그의 시도에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담당 차장에게 말했다.      


“차장님, 지금까지 당신 회사에서 생산되는 제품에 문제가 생긴 이유는 저 싸구려 원료 때문인 거 아시죠? 아니, 해 처먹는 건 좋은데 죄 없는 나를 이렇게 엮는 건 아니지!”     


순순히 나올 줄 알았던 그가 오히려 발끈하며 나의 말을 되받아쳤다.     


“아니, 법인장님, 다른 거래처는 우리 회사에 납품하려고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는지 알아요? 지금 저한테 말 다 했어요? 그걸 회장님께 일러바치면 회장님이 순순히 다 믿어 주실 거 같으세요? 그리고 내가 이 바닥에 당신이 이렇게 거래처에 막 하는 사람이라고 소문내면 당신은 아무 문제없을 거 같아? 잠깐 내려서 얘기 좀 합시다.”     


그는 차를 세워 담배를 건네며 내게 말했다.     


“어차피 같이 처자식 먹여 살리는 직장인인데 너무 그러지 맙시다. 거! 내가 앞으로는 장난 안 칠 테니 이번 한 번만 넘어갑시다. 회장님이 아시면 저 어떻게 될지 몰라요. 진짜.”     


“좋아요. 그럼 하나만 물어봅시다. 이처럼 우리 제품 구매가 줄어들고 있던 걸 진화식이도 알고 있었나요? 차장님이랑 진화식이랑은 엄청 친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걸 서로 몰랐을 리가 있나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진차장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친구는 정말 착한 친구예요. 한국 거래처 담당자들이 그 친구는 다 좋아해요. 거래처에 진짜 잘하는 친굽니다.” 손사래를 치며 그가 말했다.     


나는 다시 회장실로 돌아가 회장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회장님, 제품 불량 문제는 오해가 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저희 제품에는 큰 하자는 없는 걸로 판명이 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정찰제를 시행한 이유는 오히려 국내 산업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일이었습니다. 미국 업체들이 자기네 이익을 늘리려고 가격으로 장난을 많이 칩니다. 그걸 견제하기 위해 제가 정찰제를 시작한 겁니다. 철저히 원가를 따져서 가장 합리적인 가격으로 정찰제를 시행하면 미국 업체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대신 D사가 그동안 누렸던 가격 혜택은 장려금으로 충분히 커버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번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또 이런 문제가 생긴다면 그땐 제 직을 내려놓겠습니다. 남자로서 약속드립니다.”     


또 하나의 파고를 넘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회사 매출은 더 늘어났고 D사의 회장은 나의 진정성을 믿기 시작했다.     


수많은 거래처에서 미국을 방문했고 나는 태어나서 그 어느 해보다 바쁜 여름을 보냈다. 미국에 오는 손님들은 결코 그냥 가는 법이 없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들은 많게는 보름씩 미국에 머물렀고 나는 기꺼이 그들의 가이드와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6월부터 시작된 손님맞이는 9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고 내가 그동안 집에 들어간 날은 채 30일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치열했던 여름이 지나고 오리건의 10월을 알리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년 그렇듯 인사철이 다가오고 있었고 어김없이 인사 담당 차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현 법인장, 고생이 많다. 야, 너 사업 잘한다고 본사에 소문이 자자해. 천천히 해라야. 겁난다. 올해 흑자결산은 떼 놓은 당상이라고 사장님께서도 엄청나게 좋아하셔. 사람 하나 바뀌니까 모든 게 바뀌었다고, 요즘은 미국 법인 신경 쓸 일이 없다고 너무 흡족해하신다.”     


“그런데 말이야, 진화식이 이제 한국으로 들여보내야지? 어차피 주재원 공모하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빨리 결정해서 답을 줘. 미국 주재원 가고 싶어 안달 난 놈들 많다. 여기.”     


인사과에서는 일주일간의 말미를 주었다. 그 시간 안에 나는 진화식의 한국행을 결정해야 한다. 고민에 빠져있던 차에 진화식이 다가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건넨다.     


“법인장님, 주말에 가족 동반 낚시 어떠세요? 준비는 제가 다 해 놨습니다. 법인장님 가족분들은 그냥 오시기만 하시면 됩니다. 숙소도 제가 바닷가 경치 좋은 곳으로 싹 준비해 놨습니다. 정말 환상적인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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