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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May 03. 2024

2-6. 성공이라는 이름의 독배, 마시는 자 죽으리라!

2장. 욕심, 가자! 더 큰 세상으로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There is nothing new under the sun.” 구약성경 전도서 제1장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가 숨 쉬는 이 태양 아래에 온전히 새로운 건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새롭다고 말하는 것들은 단지 누군가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것일 뿐이다.     


진화식이 나에게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던 것도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미국의 경쟁 기업들은 모두가 하고 있던 일을 우리 회사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법인장님, 지금 미국 경쟁 기업들은 모두 한국의 쿼터 제도(Quota System)를 피하려고 제품을 약간 변칙적으로 생산합니다. 쿼터가 줄어들 때마다 그들은 그런 변칙적인 수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단지, 우리만 그 방법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참에 아예 우리도 본사의 승인을 얻어 쿼터 제도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뭐? 변칙적인 수법으로 생산한다고? 변칙적이란 말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야? 불법이란 뜻이야?”     


“절대 불법은 아닙니다. 변칙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기존 제품에 일부 물질을 혼합해서 제품을 생산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생산하는 제품은 정부에서 지정하기로 혼합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 가공품으로 분류됩니다. 정부에서는 그 순수 가공품에 대해 수입을 제한하는 거고요. 그런데 여기에 아주 소량의 다른 원료를 혼합하면 그건 일반 가공품이 됩니다. 품목도 완전히 다른 품목이 되고 제한 규정도 피해 갈 수 있습니다. 미국의 다른 경쟁업체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야!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는데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안 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렇게 쉽게 규정을 피해 갈 수 있다면 제도를 시행하는 의미가 없는 거잖아?”     


“맞습니다. 사실 규정의 허점을 누군가가 교묘하게 이용한 거죠. 벌써 10년도 넘은 일입니다. 근데 우리 회사는 정부의 눈치 때문에 한 번도 시도해 보지 못한 거고요. 말씀하신 대로 이게 불법은 아니지만, 편법적인 요소가 다분합니다. 괜히 이거 생산하다가 정부에 걸려 괘씸죄라도 적용받는 날에는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지는 거죠.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습니까?”     


“뭐라고? 그럼 지금 나보고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라는 거야? 죽음을 무릅쓰고?”      


“아이고, 아닙니다. 법인장님, 그래서 본사의 승인을 받자는 겁니다. 이참에요.”     


세상에는 참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진다. 정부의 쿼터 제도로 인해 미국에 나가 있는 한국 회사가 오히려 피해를 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더군다나 미국 기업들은 이런 기회를 활용해 더욱 손쉽게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내 시장에서의 미국산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똑같은 제품에 아주 소량의 혼합물을 섞어 무늬만 다른 제품으로 만들어 팔고 있었던 거다. 더군다나 그 제품은 순수 제품보다 훨씬 비싸게 시중에 판매되고 있었다.     


미국 기업들로서는 오히려 우리 정부가 쿼터를 축소할수록 더욱 쾌재를 불렀다. 한국 기업인 우리는 쿼터라는 밧줄로 손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그들은 원가가 거의 늘어나지 않는 무늬만 다른 제품을 만들어 기존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한국에 판매해 막대한 수익을 챙기는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에 던져주는 ‘일석이조 一石二鳥’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돌마저 그들을 대신해 우리 정부가 던져주고 있으니 새 두 마리를 거저 줍다시피 한 그들은 얼마나 우리를 우습게 볼 것인가.


실지로 나는 이런 상황을 우리에게 두 배의 원료공급을 약속한 미국의 메이저 공급사 사장을 만나 얘기했다. 원료 이월을 걱정하는 나를 위로한답시고 그가 들려준 한 단어가 한국 정부를 말하는 것인지 나를 지칭하는 것인지, 부끄러움에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Idiots!”     


“얼간이들” 이것 말고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 말을 듣고 나는 가슴속으로 다짐했다. ‘이런 일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이건 반드시 풀어내야 한다. 대한민국 소비자가 더 이상 호갱이 되는 일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더욱이 이 일은 우리 회사의 명운이 달린 일이기도 했다. 이런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적자를 감내하고 사랑하는 직원을 해고하는 짓이라면 그건 나의 상식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차장, 이건 내가 어떻게든 승인을 받아 낼 테니까 승인 서류 꾸며서 본사에 올려. 한국 사람 위하라고 만든 법이 한국 기업도 죽이고 한국 소비자도 죽인다면 이건 당장 갈아엎어야지. 이런 건 망설일 이유조차 없어. 최대한 빨리빨리, 알았어?”     


나의 그런 지시에 진화식은 이미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대답하며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 짧은 웃음이 주는 어떤 묘한 불쾌감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의미를 그때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한편 주지사와의 토론회 날짜가 다가올수록 나는 피가 바짝바짝 말랐다. 회사소개 자료와 핵심 이슈, 예상 질문 등을 뽑아 아무리 준비해도 좀처럼 불안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발표와 토론이 한국어로 이루어진다면 우황청심환이라도 먹고 진정시키겠지만, 오직 영어만을 써야 하는 상황, 그것도 온통 미국인에 둘러싸여서, 더욱이 주지사와 고위 각료가 바라보는 앞에서 발표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나를 좀처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생쥐처럼 오돌오돌 떨고 있을 나를 상상하면 자다가도 벌떡 눈이 떠질 정도였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한심스러워할 진화식과 정해진이었다. 지금까지는 항상 강한 모습만을 보여왔던 나이기에 걱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오죽하면 교통사고라도 당해서 일정이 취소되기를 바랄 정도였으니 그 스트레스가 얼마만큼이었는지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드디어 토론회 날, 나와 진화식 그리고 정해진은 평소보다 더 깔끔한 차림으로 주 정부청사를 향했다. 각종 발표 자료와 회사 소개자료를 챙겨 토론회가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앞서 주 정부 청사로 들어갔다. 1855년에 최초로 지어져 1938년 대공황 당시에 재건축되었다는 청사 빌딩은 200년 미국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 있는 의회며 각종 건축물은 일부 관광객을 위해 개방되기도 했다. 나는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사진도 찍고 끝없이 움직이며 긴장감을 털어내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드디어 토론회장에 들어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주지사와 여러 각료가 나타났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여성인 주지사는 의외로 왜소했고 주지사로서의 권위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리에 앉자 너무나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자기를 소개하며 농담을 끌어냈다. 동석한 각료들도 웃으며 인사를 주고받았고 무슨 정해진 순서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준비해 간 자료를 볼 겨를도 없이 질문에 대답하며 서서히 긴장이 풀려감을 느꼈다. 토론회는 내가 생각했던 한국의 그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마치 우리의 긴장감과 어색함을 배려라도 하듯 분위기는 편안하게 흘러갔다. 가끔 말을 버벅거리거나 실수를 해도 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고,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는 진화식과 정해진이 눈치껏 치고 들어와 토론을 이끌었다. 그렇게 시간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흘러갔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중하게 10주년 행사에 주지사를 초청하며 축사를 요구했고 주지사는 기쁘게 웃으며 참석을 약속했다. 걱정했던 것보다 토론회는 너무도 짧고 싱겁게 끝났지만, 우리로서는 대성공이 아닐 수 없었다.      


성조기가 찬란하게 빛나는 토론회장에서 주지사와 기념사진을 찍으며 나는 생각했다.      


‘생각은 모든 것을 불가능으로 만든다. 하지만 행동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한다.’      


그동안의 걱정이 오히려 후회로 밀려왔다. 오직 생각만으로 스스로 괴롭혀온 나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사회의 수직적 상하관계에 젖어있던 나의 한계에 나는 스스로 경종을 울렸다. 앞으로는 그 어디에 서더라도 주인으로서 당당히 서리라 다짐했다. 이번 주지사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스스로 한계를 만드는 어리석음을 그만두기로 했다. 만약 내가 한계라고 규정한 일에 정해진이 시도라는 말로 나를 설득하지 않았다면 한계는 영원히 한계로 끝났을 것이다. 우리에게 한계는 없다. 한계라고 거짓부렁 하는 자기의 생각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성장이라는 건 한계라고 생각하는 어떤 선을 넘을 때 따라오는 결과물이다. 99도라는 한계를 넘지 않으면 물은 절대 끓지 않는다.

    




이제 본사에서 혼합 신제품에 대해 승인만 해준다면 다시 모든 것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본사에서는 문서에 대해 승인하는 대신 관련 부서의 최고 책임자인 전략사업단장을 미국으로 급파했다. 그만큼 이번 사안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섣부른 승인으로 정부의 미움을 산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본사에 귀속될 것이고 자칫 문제가 커진다면 김주환 사장은 물론 제품 승인 부서장인 전략사업단장에게도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승인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이번 제품 승인을 포기한다는 건 장수로서 적진에 있는 병졸들을 모두 버리고 혼자만 도망치는 꼴이다. 방법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모두를 살릴 수 있음에도 그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건 살아도 수치요. 죽어도 치욕이다.     


“단장님, 이번 승인 건만큼은 물러설 수 없습니다. 겨우 위기를 넘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제품을 취급하지 않는 것은, 미국 기업들이 두 발로 달리기 할 때 우리는 두 발을 묶고 뛰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불공정한 게임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현 법인장이 무슨 말하는지 내가 알겠어요. 그런데 본사의 결정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정부와의 관계도 아주 중요합니다. 굳이 본사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있겠어요?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법인장 재량으로 취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아니 단장님, 만약 제가 재량껏 제품을 취급했다가 말씀하신 대로 정부에서 문제 삼으면 그 책임은 누가 집니까? 저더러 그 책임을 모두 떠안고 사업하라 이겁니까?”     


“아무튼 저로서는 그 어떤 결정도 할 수 없습니다. 죄송해요. 현 법인장.”     


“좋습니다. 제가 이 문제는 저의 직을 걸고서라도 사장님과 직접 해결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나는 단장이 일어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보란 듯이 김주환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저 현해원입니다.”          



이전 13화 2-5. "주지사가 만나잡니다. 미국 주지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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