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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상작가 해원 May 10. 2024

2-8. 운명의 장난은 시작되고

2장. 욕심, 가자! 더 큰 세상으로


D사의 이 회장은 술에 취한 듯 나에게 제안해 왔으나 그는 분명 술에 취하지 않았다. 특히 사업에 있어서는 1원짜리 하나라도 ‘철두철미徹頭徹尾’한 사람 아닌가? 30년 가까이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그는 회장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대표이사와도 아주 막역한 사이라고 소문이 나 있었다. 그야말로 승진 시기에 이른 나 하나쯤 승진시키는 건 그에게 땅 짚고 헤엄치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 하나 잘되자고 그동안 고수해 온 가격 정책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조만간 있을 10주년 행사에 인사의 실질적 모든 권한을 가진 대표이사가 오기로 되어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는 대표이사와 밥 한 끼 함께 한 적 없었지만, 이번은 다르다. 누군가와 열흘 가까운 일정을 같이 한다는 것, 그것도 해외에서 열흘을 같이 보낸다는 건 생각보다 너무나 많은 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줄 수 있다. 어쩌면 내 삶 전체를 보여줄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원칙과 소신’ 그것만이 나의 길임을 나는 다시 한번 어금니를 깨물며 다짐하듯 이 회장에게 말했다.     


“형님, 제가 법인장으로 있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사람을 잘 못 보셔도 한참을 잘 못 보셨어요. 그리고 진화식한테 배우라니요? 그럼 그 자식이 제가 부임하기 전 지금껏 그 짓을 해 왔다는 말입니까? 그걸로 그 자식이 얻는 이익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니야진화식이가 무슨그냥 진화식이처럼 좀 나긋나긋해지라는 말이야아니 근데이거 너무 심하게 구는 거 아냐 나한테세상일이 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거 몰라그런 식으로 나가면 재미없어 당신!”     


진화식의 얘기에 적잖이 놀란 듯 급하게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지만 분명 그 둘 사이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되레 심하게 화를 내는 꼴이 마치 무언가를 반드시 감추려는 모습으로 비쳤다. 하지만 막상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뭔가 뜨끔함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심하게 얘기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정중하게 돌려서 말했어도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항상 욱하는 성미가 일을 그르친다. 나는 쓸데없이 강하게 그의 심기를 건드린 점이 못내 찝찝했다. 그렇게 우리는 성사되지 않은 ‘딜(Deal)’을 뒤로한 채 라스베이거스의 밤은 깊어 갔다.     





“뭐라고? 대표이사님 미국 일정이 취소되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한국 본사로부터 전화를 받은 정해진이 곤란한 얼굴을 하며 10주년 행사에 대해 보고했다.      


갑자기 정부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답니다장관이 참석하는 자리라 대표이사님이 빠지실 수가 없다네요. 10주년 행사도 사장님이 참석하신답니다주지사를 초청하는 문제도 전면 재검토하라는 지시입니다국내에서 참석하는 인원도 대폭 줄이겠답니다행사를 축소해야겠습니다법인장님!”     


다행히도 아직 주지사에게 정식 초대장을 보내기 전이라 행사를 축소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대표이사의 일정에 맞춰 준비한 항공권과 각 지역의 숙소 예약이 모두 끝난 상태라 전 일정을 거슬러 모든 예약을 취소해야 했다. 사실 그것도 어찌 보면 별일 아닐 수 있다. 다만 대표이사와 동행하며 나를 보여줄 기회를 상실했다는 게 나에겐 가장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다. 이상하리만치 대표이사와의 인연은 나를 비껴갔다. 과거 같은 건물에서 수년을 함께 지내면서도 단 한 끼의 식사도 해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비껴가는 인연도 좀처럼 흔하지는 않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그를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었을까? 그렇게 대표이사의 참석이 취소되자 10주년 행사는 조촐하게 끝이 났다.      




여름과 가을이 지나 겨울을 향해 가는 시점에 나에게는 또 한 가지 결단의 시간이 다가왔다. 바로 진화식과 약속한 또 다른 1년이 모두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화식이 올해를 최고의 해로 만들겠다던 약속처럼 사업은 순항에 순항을 거듭했다. 위기 때마다 거짓말처럼 구원군이 나타났고 사업은 처음의 두 배로 규모가 커졌다. 가격 인상 없이 국내 판매를 시작한 신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공장은 더 이상 가동할 여력이 없을 만큼 24시간 내내 돌아갔다. 사업이 이처럼 확장 일로를 내달리자 본사에서는 아예 인력 충원 얘기까지 나돌았다.     


이미 내부적으로는 성장의 한계까지 성장했고 이제 남은 건 외적인 성장이다. 외적 성장의 의미는 생산제품을 우리 공장이 아닌 현지 미국 공장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회사가 미국에서 서자로 취급당하며 서러운 삶을 살았다면 외적 성장은 이제 우리가 미국 회사에 일을 주는 주인으로서 다시 서는 일이었다. 그 일을 도모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당연히 진화식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진화식이 이번에도 나에게 다가와 새로운 제안을 했다.     


“법인장님, 아시다시피 지난번에 신청한 영주권 인터뷰 날짜가 아직 잡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올해 들어가게 되면 저와 제 집사람의 영주권이 날아갑니다. 본사에서도 인력충원 얘기가 나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인장님과 김주환 사장님이 아주 막역한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법인장님께서 요청만 하시면, 아니 저를 한국으로 돌려보내겠다는 말씀만 안 하셔도 제가 1년 더 근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화식은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를 어쩌면 그렇게 빼놓지 않고 속속들이 알아내는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모름지기 그의 뒤에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엄청난 세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근무하는 7년 동안 벌써 두 명의 법인장을 한국으로 돌려보냈다. 해외 사무소에서 7년을 근무한다는 건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 회사에서는 주재원의 임기를 3년을 넘기지 않는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그의 행동에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승진과 진화식의 거취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김주환 사장이라면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 해답이 언제나 정답일 수는 없다. 살아오면서 늘 느끼는 거였지만 그 당시에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언젠간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반대로 최악의 순간이라 여기며 괴로워하던 일이 삶의 자양분이 되어 더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에 반드시 옳은 선택이란 없는 것이다. 단지 그 순간의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김주환 사장의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고 명료했다.     


“현 법인장, 일단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대표이사님께 인사 내신을 올렸어. 그러니까 출국 전에 꼭 대표이사님 만나 뵙고 다시 한번 부탁을 드려. 자네가 2년간 만든 성과라면 대표이사님도 충분히 반영해 주실 거야. 그리고 진화식 차장 말이야. 나한테도 여러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한국으로 복귀시키고 싶은데 지금은 때가 아니야. 내년이면 법인장도 3년 차 근무잖아? 진화식 인사는 내년에 하는 게 좋겠어. 내년 말에 진화식이 들어오면 현 법인장이 미국에서 2년을 더 근무하고 들어와. 이왕 나간 거 5년은 채우고 들어오란 말이야.”      


이보다 더 아름다운 시나리오는 없었다. 더는 망설일 일이 없었다. 나는 한국의 모든 거래처 일정을 마무리하고 출국 전에 대표이사를 찾아갔다. 김주환 사장의 말대로 마지막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대표이사님, 10주년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셔서 정말 아쉬움이 컸습니다. 내년에는 꼭 미국에서 한 번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좋은 실적을 기대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내년이면 3년 연속 흑자 달성은 물론이고 기존 경영악화로 잠식된 자본금도 모두 회복할 수 있을 걸로 보입니다. 제가 처음 갔을 때 미국 회계상 부도 직전 위험기업으로 분류되었던 회사가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뜻입니다. 회사의 미국 내 입지도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내년에는 한국 내 수요가 늘어 외부 주문 생산도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번 인사에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대표이사는 나의 설명에 그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10주년 행사에 대표이사가 참석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지만, 나로서는 할 일을 다 했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왜 이리 멀게만 느껴지는지. 지난 2년간 미국에서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살면서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언제였던가? 하늘은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계절은 어느덧 한겨울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에서 한 장의 인사문서가 날아들었다.          



<감사 인사>


지금까지 저의 부족한 소설에 과분한 사랑을 보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것으로 2장 <욕심가자더 큰 세상으로>를 마치고 다음 화부터는 3장 <음모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가 이어집니다.     


사실상 이제부터가 시작입니다. 재미와 감동이 있는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를 구독해 주시는 여러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2024년 5월 10일 천상작가 해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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