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리온에서 모라띠노스까지. 레디고스에서 종이배를 만났다
내가 이 길을 걸은 것은 2014년 7~8월이었다. 그 해 4월16일 대한민국에는 너무도 엄청나고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세월호. TV 생중계로 바다 속으로 잠기는 배를 바라보며, 발만 동동 구르며 국민들은 분노밖에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정부의 무차별적인 아니, 경제성장 위주의 규제철폐가 불러온 인재였다. 그리고 정부는 그 죽음들을 슬퍼하는 분노한 국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 고 윽박질렀다. 진실을 요구하는 유가족들도, 함께 슬퍼하는 시민들도 그들에게는 극렬분자에 불과했다. 내가 스페인으로 건너갈 즈음에도 세월호는 여전히 진행중이었기에 순례길을 떠나면서도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8.4 월요일 / 걸은지 18일째] 피레네를 오르던 날도, 수비리 가던 길에 건국청년님의 엽서를 발견했던 날도, 뻬르돈 고개에서도, 부르고스와 로그로뇨와 오르테가의 수도원에서도 눈 앞에 세월호의 처참한 모습이 가끔 떠오르곤 했다.
감동의 까리온을 출발하여 모라띠노스로 향하던 이 날만은 아침부터 너무 힘겨워 머릿 속에 아무런 생각도 떠올리지 않고 무념무상의 걸음만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종이배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레디고스라는 마을 인근 어느 까미노 표지에서였다.
메세타를 걸을 때 가장 힘든 것은 다음 마을이 눈 앞에 보인다는 점이다. 분명히 보이는데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마을이 코 앞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깔사디야 데 라 쿠에사(Calzadilla de la Cueza)라는 마을에 다다르자 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에 누군가 재치있게 써놨다. "거룩한 집에 갈래? 달콤한 휴식을 선택할래?" 정도로 해석되는 글자. 우측은 성당 가는 길이고, 좌측은 알베르게와 바르로 가는 길이다. 많이 지쳐있지만 두 곳 모두 Pass. 마을을 그냥 지나쳐 다시 길로 나선다.
약 5km 정도를 걸었을 때. 레디고스(Ledigos)라는 마을을 앞둔 어느 표지에 누군가 종이배를 접어 올려두었다. 내륙의 순례길에서 발견한 종이배라니.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종이배 앞에서 떠올렸을 그 장면.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이번 순례 중 가장 경건해진 순간이었다.
레디고스를 지나 한시간여를 더 걸어 모라띠노스(Moratinos)라는 마을의 작은 알베르게에서 여장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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