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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원 Mar 09. 2016

스페인에서 맛 본 미역국

사아군에서 만난 씩씩한 한국 여성의 배낭에서 나왔다

이틀 전, 까리온에서 보낸 나의 양력 생일. 와인 한 잔 그리고 같은 알베르게에서 만나게 된 솔이씨, 이름이 기억 나지 않는 스페인 아주머니와 함께 하몽과 빵 등으로 때웠었다. 물론 특별한 미사에서 신부님의 안수도 받았고, 갑자기 나타나 준 나타나엘의 피리연주도 나에게는 선물이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난 8월5일, 나는 스페인의 한가운데, 이름도 낯선 깔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Calzadilla de Los Hermanillos)라는 마을의 식당에서 두 명의 한국 여인 그리고 토마스와 함께 미역국을 먹고 있었다.


[8.5 화요일 / 걸은지 19일째] 유럽여행이 길어지면 가장 그리운 것이 한국음식이라고 했던가. 인천에서 비행기를 함께 타고 날아왔지만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했던 정호씨에게는 라면스프 한봉지가 있다. 하지만 그와 떨어져서 자야 하는 날들이 많아지면서 라면스프의 맛을 포기하고 스페인 음식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뭐 스파게티나 미트볼, 하몽(햄) 같은 음식은 우리 입맛에도 어느정도 맞았다. 하지만 시루에냐에서 맛보았던 콩수프라던가 묘한 맛을 선물한 이상한 고깃덩어리 등은 여전히 적응이 안되는 음식들이었다.


모라띠노스에서 출발하여 처음 들른 마을은 세뀌요강 동쪽에 자리한 산 니콜라스(San Nicolas del Real Camino)였다. 산 니콜라스를 지나면 팔렌시아주와 레온주의 경계가 나온다. 드디어 레온이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모라띠노스의 아침

메세타의 끝도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작렬하는 태양을 피해 일찌감치 나서지만 오전 열시만 되어도 길은 타들어 간다.

까미노에서 제법 유명한 마을 중 하나인 사아군(Sahagun) 진입로 부근에서 한국 여성 한명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녀는 어찌나 잘 걷는지 길 위에서 '잘 걷는 한국 여인'으로 소문까지 난 모양이다. 배낭도 꽤나 무거워 보였고 성격도 털털해서 함께 걷는 시간이 즐거웠다.

사아군의 과일가게 부근에서는 또다시 토마스가 나타났다. 함께 담배를 나눠피우며 잠시 담소를 한 뒤 헤어지게 되었는데, 이상하리만큼 토마스와는 길 위에서 자주 마주쳤다. 심지어 폰페라다를 지나서까지도.

사아군을 지나 깔사다 델 코토(Calzada del Coto)라는 마을 인근에 까미노의 갈림길이 나온다. 하나의 길은 A231 고속도로를 따라 엘부르고 라네로 등 렌페(스페인의 국영 철도) 남쪽을 따라 걷게 되며, 내가 걸었던 길은 깔사디야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 마을을 통해 렌페 북쪽을 따라 걷는 길이다. 두 길은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라는 레온 남쪽의 한 마을에서 만난다.

여기가 두 길의 갈림길이다 우리는 우측길을 택했다

우측길을 선택한 이유는 별 거 아니었다. 길이 더 멀고 돌아서 가기 때문에 좀 더 한산하다는 이유였다. 깔사디야 마을의 기부제 공립알베르게가 나름 운치있다는 소리도 들었었다. 과연 길은 멀고 볼품 없었으나 깔사디야 마을은 무척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 곳 알베르게에서 짐을 풀고 있을 무렵 토마스가 또다시 나타났다. 이 날 알베르게에 묵은 한국인은 나를 포함하여 세사람이었는데, 그 중 사아군에서 만난 여성분의 배낭에서 미역이 나왔기에 저녁메뉴는 자연스럽게 미역국으로 정해졌다. 벨기에사람 토마스도 우리의 만찬에 초대되어 기꺼이 맛있게 -비릿한- 미역국밥을 먹었다.

이런 작은 마을(수퍼마켓이 한두개 뿐인)에서는 시에스타(낮잠시간 보통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지속)에 걸리면 저녁 늦게까지 아무것도 살 수 없으므로 시간 조절을 잘 해야 한다.

알베르게에는 20대의 한국 여학생도 한 명 만찬을 함께 하게 됐는데 그녀는 영어를 모국어처럼 하는 사람이었다. 부르고스 이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토마스와 내가 나눴던 대화의 100배 정도는 됨직한 대화를 그녀는 저녁시간 한시간여 동안 해냈다. 부러우면 지는거지만 그 날의 충격으로 나는 올해부터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저녁식사 준비를 위해 마켓을 찾아가는 길에서 토마스는 나에게 "Sun, Moon, Star"를 한국어로 알려달라고 졸랐다. "Sun은 해, Moon은 달, Star는 별이라고 하면 돼" 라고 알려주고 우리말로 적어주었다.

저 뒷 날 폰페라다 인근에서 다시 만난 토마스는 나에게 "해는 양(남성), 달은 음(여성)을 상징하지?" 라며 '음,양'을 정확히 발음해서 나를 놀라게 한다.

깔사디야 기부제 알베르게의 방명록

[전체일정] http://brunch.co.kr/@by17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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