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렴 버전 예술 감성 에세이 #02
진노의 날, 바로 그 날,
온 천지가 잿더미 되는 그날,
화가 난다.
억울하고, 부당하다.
소리를 지르고, 모두 쓸어버리고 싶다.
분이 풀리지 않는다.
가슴과 목 사이 시바신도 삼키지 못한 세상을 멸할 독이 걸린 듯
막막함이 걸려있다.
삼키면 내가 죽고,
뱉으면 세상이 죽는다.
결국, 분노가 나를 삼켜버린다.
신은 분노 했다.
나의 미천한 분노는 나를 삼키지만, 신의 분노는 사람과 도시를 삼킨다.
신의 분노가 숭고한 까닭은 분노에 삼켜지는 이들의 나약함 때문이다.
나의 분노가 미천한 까닭은 허허로이 사그라드는 분노의 나약함 때문이다.
분노가 나를 삼켜 버릴지언정, 분노하고 싶다.
치달리는 분노에 몸을 가누지 못할지언정 내달리고 싶다.
구마에도 분노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누명을 쓰고 멀리 부산까지 갔던 그도 분명 분노했을 것이다.
나의 분노를 어찌 그의 분노에 비할까.
그의 연주는 영혼을 심판하는 진노의 날을 지금 이 시간으로 만들어준다.
죽은 자를 위한 레퀴엠은 진노의 날 (디에스 이라이)로 시작한다.
심판의 시작은 분노이다.
미완성인 모차르트의 레퀴엠도, 진노하지 않은 포레의 레퀴엠도,
분노에 삼켜지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분노가 치달리는 베르디의 레퀴엠, 그리고 분노를 승화시킨 구마에의 레퀴엠이어야 한다.
미천할 수밖에 없는 분노이기에 더 서글픈 나의 분노는
끝없이 반복해 들려오는 구마에의 연주를 폐 속 가득히 담고 치달린다.
내뱉을 수도 없고, 삼킬 수도 없는 미천한 나의 분노에게 미안하다.
오늘 나는 너무 화가 난다.
내뱉을 수도, 삼킬 수도 없는 나에게 화가 난다.
치달리는 분노를 풀어줄 수 없는 나에게 화가 난다.
미천한 나의 분노를 끌어안을 수 없어 화가 난다.
치달리는 분노를 타고, 분노가 지칠 때까지 달려야겠다.
지쳐 쓰러지면 나약하고 미천한 분노와 끌어안고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