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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캐처 Aug 16. 2022

나의 엄마 이야기

제 엄마는 지금 세상을 조용히 떠나는 중입니다.




나의 엄마 이야기


제 엄마는 지금 세상을 조용히 떠나는 중입니다. 



아주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올립니다.


사실은 그 누구보다 이 세상을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 누가봐도 다 포기해 버릴 상황인데도 자식들 먹여 키울 생각에 무던히 맞서 버티고 견디고 달려온 한 사람, 온몸이 부서져라 애쓰며 살다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곁에서 가장 오래 많은 모습을 지켜봤고, 살아온 이야기들을 가장 많이 들었던 사람으로서 이제는 그 분의 이야기를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남겨야만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게는 '엄마'라는 역할로 40여년간 살다가 곧 하늘나라로 가실 분입니다.

엄마는 지금 고통이 있는 세상과 고통이 없는 편안한 세상의 경계를 지나고 계십니다.


심장 박동의 시그널 파동만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고,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엄마에게 직접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제는 사라져서, 저 혼자만 되뇌이는 엄마의 이야기를 하며 마음 속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나마 전하고 싶습니다.




엄마에게 받은 무한한 사랑은 문득 문득 마음 속에서 치솟아 올라 눈물로 떨구어집니다.


자신에게 나쁜 말을 하지만 않는다면, 선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는 마음이라 배신 당하는 일이 꽤 많았지만, 직접 누군가를 배신하거나 나쁘게 대한 적은 없는 분이었습니다.


여자로서 엄마의 삶을 보자면, 딸이 아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결혼해서 그렇게 살라고 하면 절대 결혼같은 건 하지 않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으니, 아무리 우리 어머니들이 모진 삶을 사는 것이 평균값이라고 해도 눈물없이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나날들을 버텨왔습니다.


엄마를 움직이게 한 것도, 고되고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한 것도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는데, 먼 길을 떠나시는 엄마를 보내는 자식의 마음은 한없이 못 미치는 게 죄송하고 또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제와서 눈물 흘려도 소용없지만, 그 때는 매 순간 그 선택이 가장 최선이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엄마를 떠올리면 후회가 밀려오는 것이 너무 괴롭습니다.


살아계실 때 잘하는 게 맞다고 자주 말을 하지만, 당당할 만큼 아무런 아쉬움 없이 매우 잘 해드리지는 못했습니다.    


엄마가 저의 가장 큰 스승입니다.

 

받을 것을 계산해 가며, 형편을 헤아리면서 사랑을 주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무한한 사랑을 알게 해 준 유일무이한 분이 바로 제 엄마였고, 배운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말씀을 자주 하셔서 엄마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릴 때 반복해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 몇 가지가 떠오르는데, 이 이야기는 아마 가족 중에서 저만 알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세상 모든 엄마가 말씀하시듯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책을 쓰면 몇 권이라도 나올 거야"라고 하셨는데, 딸이 능력이 부족해서 그 수 많은 이야기들을 책으로 내지는 못하지만, 몇 가지 일화들은 떠올려 남겨두고 싶습니다.  




"나는 멍청한데 너는 어떻게 이렇게 똑똑하니~, 애들이 아빠 닮아서 똑똑한가보다."


칭찬을 할 때도 한 마디만 하지 않고 본인 추억을 꺼내서 들려주셨습니다.


"어릴 때 엄마 삼촌이 엄마와 엄마 남동생을 한 자씩 한 자씩 공부를 가르쳐주는데, 공부가 너무 머릿 속에 안 들어와서 공부는 포기했다"고 크게 '하하하하~!' 웃으면서 이 이야기를 꼭 덧붙여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늙었어도, 내 마음은 꼭 열 여덟살 같아."


어릴 때 같이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소녀같은 표정에 신나게 박수치며 박장대소 웃음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건 엄마가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와 노래하는 가수를 볼 때였습니다.


엄마가 본인의 이이야기를 많이 하기보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으면서 크게 호응해 주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프로 경청러이다보니, 언제가 추운 겨울 감기를 크게 앓아서 한 쪽 귀가 고막이 터져 귀가 잘 안 들렸는데 잘 들리든 안 들리든 상관없이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크게 리액션을 해 주셨습니다.


나중에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냐고 하면 모른다고 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무슨 말인지 머리로 이해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엄마가 안 들리는 귀로라도 최선을 다해 마음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나 봅니다.


당연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상대는 집중해서 잘 들어주는 엄마에게 고마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내내 좋은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이제보니 귀 불편했던 것을 알면서도 귀 검진이나 치료도 안 해드렸네요 ㅠ ㅠ 엄마 스스로 굳이 내 아픈 귀를 꼭 치료해야겠다고 말씀하시거나 요구하지 않는 분이어서 챙기는 것 조차 완전히 잊고 있었네요.



"내가 너무 좋아서 나를 꼭 외국에 데려가고 싶다는데, 나 따라가도 되냐?"


열심히 병상 간호를 하던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갑자기 혼자 지내시게 되어 외로움이 크셨고, 몇 년 뒤 해외에 계시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이후에 보고싶은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해 치매를 앓게 되셨습니다.


평상시에는 "동네 할아버지 누가 데이트를 신청했지만 다 거절했다, 다른 할머니들하고 다르게 난 안하고 싶다."고 하던 엄마였는데, 종종 현실을 망각하는 망상을 겪는 치매이다보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사람과 본인이 연락을 하고 지내는데 영국으로 초청을 했다고 가도 되겠냐고 너무 태연하게 말을 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자식의 띄엄띄엄 희미한 사랑 말고, "꼭 당신이어야 만 하는 확실한 사랑" 자신을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살아갈 의미이자 힘이었을 것입니다. 머리로는 이해를 하면서도, 딸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나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니 딴소리만 하고 소통이 안되서 참 답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 또한, 자식인 제가 채워드릴 수 없는 외로움일지라도 전화도 자주 안하고, 자주 만나러 가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치매 판정 - 요양원 입소 - 코로나19 확진 - 악화된 폐질환 - 당뇨 고혈당 쇼크  


치매 판정 후 몇 개월 간 요양보호사님의 방문 요양을 받으시긴 했지만, 치매가 점점 더 심해져서 더 이상 혼자 지내시기에는 화재 등 위험한 일이 생길 조짐이 많았기 때문에 어렵게 고민한 끝에 요양원에 가셨습니다.


엄마는 파마를 하러 나가고 싶은데, 나가고 싶을 때 병원도 가고 싶은데 요양원은 외출을 전혀 못하니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염려가 많은 자식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상황이 엄마 혼자 지내실 때보다는 쾌적하고 많이 나았기 때문에 요양원으로 모시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도 다행히 잘 지나오시다가 3차 접종까지 다 마치고 나서, 요양원 측에서는 최대한 조심했음에도 아래 외래 환자가 오가는 병원이 있고, 집단생활을 하는 요양원이다보니 코로나19 감염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2022년 2월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불안해 했는데, 다행히 격리 병원에서 큰 고비는 넘기셨습니다. 다만, 젊은 시절 앓았던 결핵 병력이 있고, 그 때문에 폐가 안 좋은 상태였는데 코로나19가 폐를 더 손상시켰고, 천식이 나타날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이후 여러가지 징후로 기력이 점차 쇠약해 지고 계신다는 상태를 기관 소식으로 접하다가, 4월 말에 아침 식사를 하시다가 목으로 잘 넘기지 못해 기도가 막혀서 얼굴이 파랗게 질려 돌아가실 뻔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간호사님이 차후에도 목에 음식이 걸려서 돌아가실 것을 염려해 코에 호스를 넣는 것을 적극 권하셨는데, 이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연락 받고 움직였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위험과 고통이 따르지만, 많이 고통스럽지만 목숨에는 덜 치명적인 쪽을 선택했습니다. 간호사님이 호스 삽입을 안 하기로 하는 자녀들도 많다고 하셔서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요양원이라는 현실에서 매 식사 때마다 종사자분들이 불안해하며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모두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호스를 넣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빼려고 하는 절박한 손짓을 막는 것은 괴로움이었는데, 이 날은 의사소통이 되서 '호스를 안 넣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해서 하는 거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이후에 계속 호스를 손으로 빼서 몇 번 호출 연락을 받았습니다.  


중간 중간 어떤 신호나 몸이 건강하지 않은 상태를 보고 몇 가지 약 처방 조치를 하긴 했지만, 근본적인 처치는 어려웠는데, 그 때 심각하게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던 것을 감히 예상하지도 못하고, 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요양원 간호사님께서 당수치를 최대한 신경써서 관리해 주시던 와중에 말도 안되게 높은 수치가 나타나서 8월에는 큰 병원으로 이동해 보라고 급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상황과 여건, 모두의 큰 도움으로 빠르게 응급실로 와서 피검사 CT검사를 하고, 인슐린으로 혈당 낮추는 조치, 수액 주사를 진행했습니다.


검사를 어렵게 마친 후 검사 결과를 보고 대체로 모든 상태가 다 안 좋아서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어떤 장기 부분은 다행히 괜찮으니 큰 규모의 다른 병원으로 이송을 해서 시술을 하셔야 할 것 같다고 의료진분의 조언을 들었습니다.


나이가 많은 중환자를 받아줄 용의가 있는 수도권 병원이 거의 없는 상황인데, 감사하게도 여러 군데 전화로 수소문해 주시면서 갈만한 곳을 찾고 세심하게 상의해 주셨습니다.


큰 병원에 잠시 나왔다가 다시 요양원에 모셔다 드린다는 생각만 하다가, 갑작스런 다른 지역 큰 병원 이동 이야기를 듣고 보니, 집에서 너무 아무런 준비없이 나왔던 것입니다.


급히 몇 가지 준비물을 챙길 필요가 있었고, 엄마에게 잠시 다녀온다고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운 사이, 바로 그 때 엄마에게 심정지가 찾아 왔습니다.    


요양원 연락을 받고, 당뇨환자가 혈당이 안 떨어지면 쇼크가 올 수 있다고 찾아보긴 했는데,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 예상치 못한 시점에 벌어진 것입니다.


응급실 의료진 분들이 17분여 동안 긴급 심장충격기 처치로 심장이 다시 뛰게해 주셨는데, 나중에 설명을 들어보니 3분 정도부터 뇌손상이 시작된다고 하셨고, 다른 장기부전(기능을 못하게 되는 것)이 뒤 이어 진행되는 상황이라고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엄마의 심장은 뛰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초조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다리는 중입니다. 코로나가 심각하기 때문에 중환자실 면회는 안되지만, 매일 병원 소식을 문자로 받고 있는데,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며칠 안남으셨다는 신호가 명확히 있다보니 대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기다리는 것 말고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1년 넘게 치매로 힘들었을 엄마를 최선을 다해 잘 돌봐주신 요양원 관계자분들께는 무한 감사한 마음입니다.   



엄마가 이제 고통 없는 곳으로 가시게 되서 다행입니다.


제 곁에 엄마가 없어지는 것도 맞고, 갑자기 떠나시는 것은 맞지만, 나이도 꽤 있으시고, 허리가 조금씩 굽어가고, 걷기가 힘들어지고, 나중에는 누워 계신 모습만 내내 지켜봤습니다.

 

엄마가 아프다고 해도 해 드릴 수 있는게 없어서 죄송했습니다. 뭔가를 먹고 싶다고 해도 당뇨 관리를 생각하면 절대 사 드리면 안되는 음식이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엄마 스스로 자신의 행동과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어지고, 고통만 남은 상태로 지내셨기 때문에 고통이 없는 또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엄마의 여행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통없는 삶으로 가는 엄마에게 그 동안 사느라 너무 고생 많았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진심을 다해서 더 잘 해 드리지 못한 지난 아쉬운 일들이 자꾸 불쑥 불쑥 생각나서 죄송하고 또 죄송한 마음에 눈물이 납니다. 평소에 지난 일들에는 후회를 거의 안하는 편인데, 엄마에 대해서 만큼은 후회스러운 마음이 많이 남을 것만 같습니다.



엄마에게 받은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제는 더 이상 만질수 없고 음성을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면회를 한 번이라도 더 갔어야 하는데, 볼 수 있을 때 좀 더 자주 만났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아마, 돌아가시기 전이 아니었다면 이런 죄송한 마음이나 아쉬운 생각보다는,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내 기준에서 마음 편한 생각들을 더 많이 했을 것입니다.


후회와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는데,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최대한 잘 해 드린다는 것이 뭔지에 대해서는 사실 단 하나의 정답이 없고, 그 때 그 때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합니다.


더 잘 해 드릴 방법은 없었을까 혼자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서 괴로운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깊이 괴로워하고 많이 죄송한 마음을 가지는 시간도 지금 뿐일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바쁜 일들에 휩싸여 그리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슬퍼하지 못하는 대신 엄마에게 예전보다 더 많이 깊이 고마워하겠습니다.


엄마는 사실 40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제 엄마는 42년생이라고 주민등록에 등록은 되어 있지만, 사실 너무 아이들이 많이 죽던 시절이라서 오래 살라고 2년이나 지나서 출생신고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40년생입니다. 원래 외갓집에서 엄마를 부르던 진짜 이름도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엄마와 저만 아는 게 나을 것 같은 이름입니다. 왜 예전에는 딸 이름을 그렇게 막 지었을까 싶습니다.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외갓집에는 딸이 많고 아들이 하나였는데, 전염병 때문에 엄마와 동생인 아들이 함께 심하게 앓았고 그 때 동생이 죽고 엄마는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때 동생이 살고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딸에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저에게 해 줬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어릴 때 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지만, 외할머니가 100살 넘게 건강하게 사셨던 것을 은근히 믿고 엄마도 장수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엄마가 어릴 때는 먹을 것 걱정할 일도 없고 큰 부족함 없이 살다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가 너무 고생을 많이 하며 살아왔다고 들었습니다. 현업에서 은퇴하시기 전까지 쉼없이 일만 하느라 엄마 건강을 제대로 살필 여유가 없던 것이 내내 안타까웠습니다.  


저에게 들려준 다른 이야기도 많지만 '엄마는 한없이 위대해지고, 아빠는 비교적 점수를 잃기만 할 것 같은 일화'가 많아서 여기까지만 해야겠습니다.  




이렇게나 많은 자식 낳고 기르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손자 손녀들 열심히 길러준 할머니께도 감사합니다.  



저는 82년생입니다.


자식들 중에서 가장 늦게 태어난 덕분에 많은 사랑을 받았고, 저도 눈치껏 엄마 아빠 곁에서 두 분이 각자 많이 애쓰며 살아내시는 상황에 맞춰 지냈습니다. 크게 뭔가 바라거나 기대하지도 않았고, 결코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않고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습니다.


엄마의 상황이 지치고 힘들어도 딸인 저를 보면 활짝 웃으며 바라보는 '사랑의 눈으로 바뀐' 엄마 덕분에 좋은 관계의 딸로 내내 살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나중에 커서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웠던 건, 엄마가 많이 아프면서도 일을 놓지 못하고 "약을 먹으면 된다"며 고생을 계속 해 왔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노후를 아주 편안하게 책임져 드리는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는데, 받은 만큼 다 못 돌려 드려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82년에 태어났는데 저도 2년이 다 지나서 출생신고가 됐네요. 출생연도는 맞겠죠. 출생 신고부터 엄마와 비슷한 면이 있네요.





바쁜 와중에도 예쁘게 멋내고 싶은 어떤 날은 한복을 꺼내 입었습니다.  


엄마는 한복을 참 좋아하셨어요. 멋내고 싶은 날은 한복을 꺼내 입으셨어요. 치매에 걸리셨을 때도 예쁜 옷 사야한다며 고운 한복을 사러 시장에 가셨습니다.


한복 입은 모습이 기억나는 날이 몇 번 안되는 것을 보면 대부분의 날들을 치열하게 일을 하며 사셨습니다. 저는 기억을 잘 하는 편이라서 엄마가 놀지도 않고 주로 일만 많이 한 것이 분명합니다.

 

어느새 포토샵 장인이 된 외손녀의 세심한 손길로 엄마의 고운 미소를 온화하게 담은 영정사진을 손수 준비할 수 있었어요. 엄마가 이렇게 멋진 사진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날 살려줬네! 너무 착해! 고마워! 건강해!


엄마가 생전에 저에게 가장 자주, 생생한 음성으로 크게 들려준 말입니다. 더 건강하게, 이 세상 누군가를 살리는, 고마운 일들을 하겠습니다.  


그 누구도 엄마의 사랑만큼 저에게 큰 사랑을 줄 수도 없고, 엄마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세상에 나와 눈 뜨자마자 온전히 의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어려운 시절의 연속이라, 길 건너 아주 돈 많은 이웃집에서 저를 아주 잘 키워주겠다고, 수양 딸로 보내라는 러브콜이 있었음에도 저를 포기하지 않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들려주던 사랑담은 좋은 말과 행동, 그 모든 순간과 순간들이 모여서 "엄마가 나를 진짜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이 되었습니다.



엄마는 내 귀에 좋은 말만 들려주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온전한 사랑을 주셨고, 인내심 없는 나약한 저라는 사람에게 "힘든 일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일하게 해 준 원동력과 삶의 의미"가 되어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좋은 것을 주고, 기분 좋은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지내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나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내 이득을 위해 남을 이용할 궁리 없이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곁에서 보고 오롯이 느낀 "엄마의 삶" 자체가 딸인 저에게는 "가장 위대한 유산" 그 자체였습니다.


누구라도 반갑게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는 모범을 보여주셨어요. 배운대로 잘 따라서 살지는 못하지만, "아주 좋은 큰 영향"을 주신 분께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제가 좀 더 열심히 베풀고 착하게 잘 사는 것으로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세상에 아름답게 표현하겠습니다.


엄마가 세상을 떠날 때가 되서 돌아보니, 어떻게 보면, 평범하지만 평범하다고 하기엔 저에게는 좀 많이 아쉬운 분입니다. 오히려, 세상에 힘차게 자랑하고 싶은 분이었네요.



엄마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큰 만큼 내리 사랑에 더 힘쓰고, 또 다른 저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사랑을 잘 보여드리고 표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고 또 고마운 엄마, 내 엄마여서 감사했습니다.



태어난지 80년 조금 넘었지만 사는 동안 내내 "죽었다가 살아났어~" 죽을 고비 고비를 참 많이 넘겼다고 말하던 엄마, 이제 당뇨니 뭐니 아플 일도 없을 거야. 아무 걱정 말고 맛있는 거 원없이 먹고, 많이 웃고 행복해!


아주 많이 미안하지만 조금은 덜 미안할 수 있게 잘 살게!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로 건강하게 살게!


고마워~ 내 엄마여서!




제 엄마에게 보내 드리는 마지막 편지이자 저의 다짐이기도 하면서, 많은 분들께 들려드리고 싶은 엄마와 딸인 저의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저와 엄마에게 전해 주실 말씀이 있다면, 아래 링크를 눌러서 남겨 주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 전해주실 말씀 남겨주실 곳 >  링크(터치)


8월 16일에 기록하기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후.



선종(善終)


『한불자전』에 의하면 선종은 ‘착한 죽음’, ‘거룩한 죽음’을 의미하는 말로, 착하게 살다가 복되게 끝마친다는 뜻인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준말이라고 합니다.


즉,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착하고 바르게 살아, 삶을 마감할 때 거룩한 죽음을 예비하라는 천주교의 지향이 담겨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특히 ‘착하게 산다’라는 뜻의 선생善生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수덕修德을 강조한 것으로 유학에서 논하는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가르침과 그 형식에서 완전히 일치하는 용어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엄마는 기독교이지만, 천주교인 제 친구에게 위와 같은 말을 건네 들으니 무엇보다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선하게 울려 퍼지는  고운 소리, 그저 사랑해서 세상에 마구 펼쳐놓은 엄마의 소중한 사랑들이 보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인생의 스승이자 따스함이자  빛이자 쉼이 되어준 사람, 겸손하고 스스로를 낮추며 한 없이 작지만 세상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넓고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엄마에게 너무 고마웠다고 내내 감사할 예정이라고,


그러니 아쉬움 없이, 언제나처럼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손 흔들어 인사를 보냅니다.


천국에서 눈물과 고통, 그 어떤 슬픔도 없이 만나길.


2022년 8월 22일

앞서 돌아가신 아버지 옆에 모셔드리기로 한

여전히 잠이 잘 안 오는 새벽,

기나긴 글을 마무리합니다.


심장이 멎는 두 번째 순간,

부여잡고 버텨내다 마지막 고통의 끝에 있던

엄마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어서

임종을 지켜보고, 손을 잡고

선종을 함께한 막내딸이어서

더없이 감사했습니다.


끝까지 내 엄마답게

조용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한없이 기다리던 애처로운 사랑의 모습은

영영 못 잊을 것만 같아요.



그래서 계속

문득 문득 생각이 나고

눈물 흘리고 마음 아프고

짠하고 찡합니다.


화장을 하면 두 번 죽는다더라.
무서워




화장을 하면 두 번 죽는다더라. 무서워


아빠 돌아가셨을 때 산소에 모셨는데, 엄마가 화장은 무섭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그 옆에 약 8년여간 비워둔 자리에 엄마를 모셔다 드리고 왔습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는 본인이나 유족 의사와 관계없이 어쩔 수 없이 화장을 하셨을 분들도 많다보니, 이렇게 고민할 수 있는 상황인 것도 감사할 일일 것 같습니다.

 

편히 가기에는 이 곳이 너무 멀어서

가까이 모시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여러 상황상 제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어요.


마음은 늘 함께 하시니

거리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애쓰고 마음 아파하시며

위로해 주시고

바쁘신 와중에도

달려와서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받은 사랑 잊지 않고 잘 보답하고,

다른 분이 겪는 슬픈 일을 마음 깊이 공감하며

위로를 잘 전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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