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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Dec 01. 2017

통곡의 벽에서 비밀을 속삭이다...

이스라엘 성지순례-예루살렘

통곡의 벽을 바라보았다.



귀가 먹었나? 꺼이 꺼이 소리내어 우는 이는 거기 없었다. 억겁의 세월이 스치고 지나간냥 붉은색 엷게 감도는 높다란 절벽이 거기 서 있었다. 그 절벽에 ‘화양연화(In the Mood for Love)’의 마지막 씬이 스크린처럼 울렁이며 펼쳐지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저널리스 Mr Chow역을 맡은 양조위는 망망대해로 흘러가버린 ‘몰래사랑’절망하며 쓸쓸히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폐허를 찾았다.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말못한 비밀의 ‘말', 세상에서 딱 한사람에게만 말하고 싶었던 그 소중한 ‘말', 성스럽고도 아픈 ‘고백'을 앙코르 와트 사원의 벽 조그만 구멍에 대고 속삭였다. 하늘을 등지고 면벽 침묵한 뒤 누가 들을세라 입가에 두손을 모으며 속삭일 때, 폐허의 벽 저편 ‘압사라’들은 천상의 춤을 추고 있었다. 무슨 말을 속삭였는지는 그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귀로 듣지 못한 이 고백을 가사를 걸친 동승이 면벽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압사라는 천상의 춤을 추는데 지상의 동승은 침묵하누나. 폐허의 정글에는 새소리가 들렸다. 는 왜 허물어진 폐허의 사원벽에다 고백을 털어 넣었으며 왜 그 작은 공간을 막았을까? 혹시 마음속 깊은 곳,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사랑에 대한 질긴 애착을 끊어 내고자 하였을까? 아님, 한때 아련히 꿈꾸었던 몽환흔적을 보고 앙코르 와트의 폐 그 흔적을 묻어려 했을까?


‘삶에는 정해진 정답이 없다.’


그렇듯 이 영화는 단순하게 사랑만을 주제로 하지 않는다. 단순히 보면 기혼자의 일탈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 주인공의 상처가 더 뚜렷이 보인다. 거기엔 ‘배신’도 있고, ‘상실’도 있으며, ‘기억’이 있는가 하면 잡지못한 ‘애석한 기회’도 있다. 거기엔 또 지독한 ‘외로움’이 배어 있으며 좌지우지 못할 ‘운명’도 도사리고 있다. 사실,... 거기엔 끝이 없다. 그러나 한마디만 더 보태자면, 거기엔 삶의 여정에서 오는 야만(brutality)이 있다. 그 야만을 이 영화는 ‘프레임 속 프레임(Frames within frames)’이란 절묘한 방식으로 이들의 상처를 몰래 엿보게 만든다. 이 또한 야만스럽다. 목탁구멍같은 작은 공간에 비밀을 속삭인 뒤 사원을 걸어나오는 폐허의 프레임 속 양조위의 모습을 자세히 보라.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저항없이 그와 일체화되어 버리고 만다. 자신의 사랑을 묻고 나오는 앙코르 와트 프레임 안 그의 얼굴엔 표정이 전혀 없다. 산송장이다. 우리 모두 폐허가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폐허의 벽에 묻고 나온 것은 사랑이 아닌 그 자신이다. 묻고 나온 사랑없인 그는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속이 텅 빈 껍데기로 걸어나오는 그의 모습 뒤로 카메라는 앙코르 와트의 폐허만을 야만스럽게 보여줄 뿐이다. 폐허(ruin)… 그러면 결국 우리 삶은 야만이고 폐허란 말인가?



통곡의 벽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통곡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저 이해못할 낭낭한 기도소리가 조용히 들릴 뿐이었다. 높은 성벽위로 그보다 더 높은 하늘을 올려 보았다. 예언자 예레미나는 ‘애가(Lamentation)’에서 유대인의 고통을 구구절절 얘기했다. 성서책 중에 가장 슬프고 애절한 책일 것이다. 유대인들은 여기서 이 책 구절 구절을 읊으며 기도한다. ‘방랑하는 유대인(Wandering Jew)’이란 유럽인의 언어에는 정처없이 나그네로 떠돌았던 그들의 사연이 담겨있다. 그들의 선조 아브라함도 떠도는 아람인이라 불렸다. 기원 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되어 무너져 내린 흔적 한자락, 이 성전벽으로 세계 곳곳으로 방랑했던 유대인들은 이제 그 긴 방랑에서 돌아와 통곡한다. 바로 선조들 흔적앞에서 바빌론 강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불렀던 슬픈 애가(lamentation)를 여기서도 똑같이 소리내어 읊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의 뿌리를 기억한다. 기억의 방법치곤  묘하고 역설적이다. 그러면 통곡은 잃었던 것에 대한 통곡일까? 아님,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재발견의 기쁨의 환희인가? 또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찾으려 할까?



통곡의 벽에 대고 속삭였다.



내 손바닥을 햇살에 따뜻하게 구워진 벽면과 겹쳐보았다. 고통의 역사가 역설적으로 따뜻하게 전해왔다. 시편에 나오듯이 내 마음을 돌덩이가 아닌 피와 살임을 느낌과 동시에 역사의 돌덩이를 터치함으로 역사와 소통하고 싶었고, 시간을 감히 거꾸로 돌리고 싶었고, 그래서 모든이의 고통과 통곡이전의 상태, ‘원상’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이전의 낙원을 여기서 느끼고 싶었다. 잃었던 ‘것’을 다시 찾아 원상복귀시키고 싶은 무의식의 욕망이 일었다. 먼 방랑에서 뿌리를 찾아 돌아 온 유대인처럼, 나의 DNA 흔적을 찾아 충전시키며 원상복귀하고 싶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여기서 높고 높으신 그분, 깊고 깊으신 그분, 크고 더크신 그분과 소통하고 싶었다. 양조위는 앙코르 와트에서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작은 벽무덤에다 묻었다. 꿈도, 사랑도, 좌절도, 기억도 끊어내 단절을 고하며 껍데기로 걸어나왔다. 그러나 난 단절의 상징인 벽에 대고 소통을 부르짖고 싶었다. 잃어버린 것,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워 하는 것, 그리고 후회막심한 것들과 다시 소통하고 싶었다. 감았던 눈을 떴다. 벽돌과 벽돌 사이로 꼬깃꼬깃 접혀서 끼워져 있는 수없는 종잇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적었을까?


무엇을 적었을까?


무엇을 찾아달라고 적었을까?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갑에서 꺼내 주시던 꼬깃꼬깃 접은 천원짜리 지폐처럼 그렇게 접 있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꼬깃꼬깃 마음을 펴지 못하고 사셨던 어머니가 그리웠다. 벽돌 틈새로 보이는 수많은 쪽지들은 하나 하나 마음속의 비밀을, 상처를, 소원을, 희망을, 치유를 적은 쪽지이리라. 앙코르 와트의 양조위처럼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말못했던 고백도 거기 적혀 있으리라. 쪽지를 넣는 대신 틈새에 대고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영구히 이 틈새에 저장되리라. 그 누구도 꺼내 듣지 못하리라… 오직 그분만이 가진 열쇠로 열수 있으리라.



나오는 길에 주교님들이 쓰시는 ‘주케토(zucchetto)’같은 유대인의 흰 머리덮개를 벗고 나를 드러내었다. 양조위가 사원에서 걸어나오던 무표정과 달리 마음은 가벼웠다. 벽 틈새로 할 말을 시원히 다해서 그럴까? 한무리의 순례자들이 압사라처럼 춤추듯 들어왔다. 저들은 저마다의 비밀과 소원을 지니고 벽에 쪽지를 밀어 넣겠지 하는 사이 ‘화양연화’의 영화음악이 흘러 나왔다.



“끼사스, 끼사스, 끼사스,... (Quizas, quizas, quizas)...”



혹시, 혹시, 혹시,... (Perhaps, perhaps, perh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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