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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 율리시즈 Jul 12. 2017

아, 예루살렘!

이스라엘 여행 에세이-예루살렘 키드론 계곡


예루살렘의 구시가지 동쪽 ‘키드론 계곡(the Valley of Kidron)’은 올리브 산과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성전 언덕(Temple Mountain) 사이에 있는 그리 크고 깊지 않은 계곡이다. 하지만 이 계곡은 이스라엘, 아니 아브라함 계의 세 종교(그리스도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 모두에 있어서 중요한 종말적 의미를 가진 곳이기도 하다. 세 종교 모두 메시아(Messiah)의 오심이 이 계곡에서 이루어 진다고 믿는다. 약 3천년 전, 그러니까 예수님 시대보다 천년 더 오래된 시기에 다윗 왕이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배반을 피해 요르단으로 피난가며 맨발로 눈물을 흘리며 이 계곡을 지나 올리브 산으로 올라간 곳이기도 하다(사무엘 후서 15:30). 배반한 아들 압살롬의 기념물(Monument)이 겟세마니 성당 바로 앞길을 건너면 왼쪽 아래로 보이는 곳에 서있다(무덤은 아니다. 사실 이 기념물은 그의 사후 천년이 지난 뒤에 세워졌다.). 아버지로써 자식의 반항과 죽음은 우리나라 속담,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에도 있듯이 맨발로 눈물을 흘리며 허둥지둥 이곳을 지났을 다윗왕의 마음이 언뜻 이해되기도 하고 더구나 자기를 배반한 아들임에도 부하 장군에게 잘 다루라고 부탁하는 걸 보면 잘못된 자식둔 아버지의 부정도 느껴진다. 그 후 예루살렘에서는 아버지가 말 안듣는 아들을 이 압살롬 기념물로 데려와 돌을 던지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가이드 말로는 특히 최근에 예루살렘에 말 안듣고(Naughty 한?) 속썩이는 자식들이 많아 던져진 돌들이 더 수북히 쌓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기는 부모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다윗 왕은 아들의 배신에 비록 가슴아파했지만 부하를 휘하에 거느리고 권위를 가진 왕으로서 이 계곡을 지났다. 이로부터 천년의 세월이 흐른뒤 다윗왕이 눈물로 지났던 이 계곡을 그의 후손인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로서 홀로 외롭게 지났다. 믿었던 제자들은 어딘가로 도망쳐 버리고 포승에 묶인채 계곡 건너편 대사제의 집으로 끌려 갔다. 예로부터 올리브 나무가 많다해서 붙여진 이름 올리브 산, 이 계곡 산중턱에 있는 이 곳 겟세마니 정원에서 유다는 배반의 입맞춤으로 로마 병사들에게 누가 예수님인지를 알려줬다. 압살롬의 배반과 유다의 스승에 대한 배반으로 이 계곡을 배반의 계곡이라 이름지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직도 나이 많은 올리브 나무들은 세월을 이기고 우뚝 서있었다. 특히 겟세마니 성당옆 올리브 나무들은 그 수령이 이천년도 넘어 이 나무들을 일컬어 침묵의 증인들(the silent witnesses)이라고도 한다. 구세주의 수난을 보았기에 그렇다. 지척의 거리지만 죽음의 여정을 오롯이 보여주는 곳이 이 계곡이다. 이 곳 겟세마니 성당에서 계곡 건너 오른편으로 보이는 대사제의 컴컴한 지하 감옥에서 예수님은 손발이 묶인채로 있던 바로 그 시각에, 믿었던 수제자 베드로는 그 대사제의 저택 바로 밖(St. Peter’s Gallicantu)에서 단호한 거부의 말을 3번이나 내뱉었다. 3번이나… 그리고 바로 그때 닭 울음소리.


이 울음소리는 지하감옥에서 터져나온 예수님의 고통의 신음소리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리스도교인은 귀를 항상 열어 놓아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누가 어디선가 고통에 몸부림치는지... 토마스 머톤( Thonas Merton)도 이 상징적인 닭울음과 베드로의 흐느낌을 귀를 열어 들어보았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베드로가 왜 세번이나 완강히 거부하고 첫 닭이 울자 터져나온 그 주체할수 없었을 눈물을… 이는 단지 신앙의 나약함을 지적한 스승의 예언이 적중했음 때문이 아닌, 내 생각으론, 자신의 본실체(진아)를 발견한 환희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나는 누구일까?”


이 내면의 소리에 답을 깨달은 이 눈물로 말미암아 실체를 감싸던 껍질은 툭툭 벗겨지고 본래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베드로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사토리(Conversion experience)’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혹시 토마스 머톤은 베드로의 눈물을 묵상하며 이 껍질과 본모습의 관계를 읽어내지 않았을까? 토마스 머톤의 시(트라피스트 수도원. The Trappist Abbey, Matins) 마지막 연을 감상하면 그의 묵상 결과를 조금은 엿볼수 있다.


Wake in the cloisters of the lonely night,
my soul, my sister,
Where the apostles gather, who were, one time, scattered,
And mourn God’s blood in the place of His betrayal,
And weep with Peter at the triple cock-crow.
(한 때는 흩어졌던 사도들이 모여사는
이 고독한 밤 수도원 회랑에서
나의 자매, 나의 영혼아,
깨어나라.
그리고
배반의 그 자리에 흘린 성혈에 가슴치며
세 번의 닭이 울면
베드로와 같이 흐느껴라.
(•저의 번역)


머톤이 살았던 미국 켄터키 주의 수도원도 이곳 겟세마니의 이름을 붙인 ‘겟세마니의 성모 수도원’이었다. 여기에 모여 수도에 정진하는 수도사들도 한때는 뿔뿔이 흩어졌던 사도들과 같은 방황하던 존재들이었다. 머톤이 영국 캠브리지 대학을 방탄과 방황으로 결국엔 졸업도 못하고 미국 콜롬비아 대학으로 간, 결국 머톤 자신의 이야기를 이 시로 성찰한 것 같다. 그리고 머톤과 같이 다른 수도사들도 다들 진리를 찾아 이 곳 수도원으로 모여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 베드로와 같이 흐느끼란 절절한 부탁은 앞 절의 잠자는 영혼을 깨워 일으키란 말과 상통한다. 이 겟세마니 수도원에 모여 사는 수도사들에게, 아니 자기 자신에게 머톤은 베드로와 같은 눈물이 없다면 깨달음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란 말이 논리적으로 성립이 될 수 없다. 어둠이 없다면 밝음이 왜 밝은지 모른다. 고뇌없이 성장을 못하고 고통을 감지치 못하면 치유를 할 수없다. 베드로의 눈물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 3의 눈(the Third Eye)’이나 ‘존 헨리 뉴만’ 추기경의 ‘마음의 눈’ 또는 ‘내면의 눈(the Inner Eye)’이 뜨여진 순간이었다고 믿는다. 진리를 직시할 수있는 영적인 눈(the Spiritual Eye) 말이다. 베드로 성인이 어떻게 순교로서 죽음을 초월할 수 있었는지? 왜 토마스 머톤은 좋은 학벌과 세속적 출세를 미련없이 내던지고 관상 수도사가 되었는지? 어쩌면 베드로 성인이 이 계곡 건너편에서 흘린 눈물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겟세마니 성당에서 앞을 바라보면 예루살렘 성전 언덕(지금은 알 악사, Al Aqsa, 모스크와 골든 돔 또는 바위 돔, the Dome of Rock이 있는)의 동쪽부분(서쪽 벽은 유명한 통곡의 벽, the Wailing Wall) 벽이 보이고 그 중앙쯤에 큰 문이 보인다. 동대문 또는 금대문(the Golden Gate) 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막아 놓았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고대하는 메시아가 올 때 이 성문을 통과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입성한다고 본다. 그래서 파리의 개선문과 같다. 그러나 이 대문은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말한다. 이와 비슷하게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의 재림때 이 성문을 통해 성전으로 입성한다고 믿는다. 두 종교 다 종말론적 메시아의 오심(또는 재림)을 고대하고 있는데 그 분이 오시면 이 문을 통과하기 전에 먼저 죽은자들 특히 이 키드론 계곡에 묻힌 자들에게 생명을 주고(부활시키고) 그런 다음 이 성문으로 입성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동쪽이며 동대문일까?


아침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은 해가 뜨는 동쪽으로 부터 온다고 믿어졌다. 부활의 영어단어가 Easter인 것만 봐도 그렇다. 하긴 지리적으로 봐도 이 계곡을 지나야만 성전 동문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런 연유로 이 키드론 계곡엔 큰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계곡의 올리브 산쪽은 거의 대부분이 네모로 반듯반듯한 묘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진정 메시아가 온다면 이 곳에 묻힌 자들의 생명을 먼저 불어 넣어 주실거라고 믿고 있기에 다들 여길 묻히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 키드론 계곡은 ‘조사팟 계곡(the Valley of Jehoshaphat)’으로도 불리며 이 계곡에서 세계의 모든 나라들을 불러 모아서 심판을 한다고 해서(Joel 3:2, Joel 3:12) 심판의 계곡으로도 불린다. 죽음뿐 아니라 심판도, 또 이스라엘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들도 이 계곡에서 세상 마지막 날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다니(에제키엘 예언자의 예언 중 ‘곡과 마곡’의 이야기)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곳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런 거창한 죽음과 마지막 심판이란 종말론적 신학을 떠나 우리에겐 죽음이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처럼 혼자만의 고독한 여행이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기에 죽음이 조금은 덜 공포스러울 거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병원의 원목 신부로서 중요한 임무 중의 하나가 “종부성사(the Sacrament of Anointing)”를 집행하는 일이다. 죽음을 앞둔 신자에게 마지막 성사를 집행하는 일이다. 지금은 아주 아픈 신자나 아니면 수술실에 들어가는 분들께도 이 성사를 거행하지만 옛날에는 죽기 바로전에 받는 성사라 말 그대로 종부성사 즉 “이 세상의 마지막 예식(the Last Rite)”이라고 불렸다. 이는 The Atonement를 쓴 Ian McEwan작가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병원에서 일할 땐 이 성사를 하루에도 몇번씩 거행한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대여섯 명의 죽음을 하루에 다 봤다는 거다. 지독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은 죽음앞에 선 사람은 모두 외로움과 공포를 경험한다는 것이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맨체스터 대학에서 연구하던 시기에 하루 종일 누구보다 더 열심히 연구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따뜻한 욕조에 누워 어떻게 자살할까만을 샹각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는 딱 두가지,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죽을 생각만을 했다. 그러나 이는 일반인들의 죽음과는 전혀 다르다. 세기의 천재였던 비트겐슈타인의 삶은 우리와 달랐다. 병원이나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앞둔 환자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이들을 보면서 죽음의 여정이 다른 사람이 ‘절대’ 대신할 수 없기에, 예수님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갔듯이, 죽음은 자기 혼자만이 쓸쓸히 걸어가야하는 여정이기에 원초적 외로움은 자연히 생기는가 보다. 이렇게 보면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주창한 인간조건이 언뜻 맞아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보면 삶의 정의는 죽음에 한 발자국 씩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너무 비관적으로 이해하지 마시길). 반야심경의 요지도 여기 차안(此岸 이 세상)에서 저쪽 피안(저 세상)까지의 여정을 위한 가이드 북(톰톰이나 GPS로 해결이 될수 없는…)이다. 그 여정은 지혜 즉 난해한 선문답같은 “공즉시색 색즉시공”으로 요약 된다고 한다. ‘공'(Emptiness. Nothingness. 또는 ‘진리 Truth’ 나 ‘법 Darma’ 자체)이 ‘색'(Something. 보이는 모든 헛것들. 또 그걸 잡을 수 있고 가질 수 있다는 망상자체)이고 똑같이 ‘색’이 ‘공’인. 사실, 그리스도교에서도 요르단 강의 이쪽(모압산. 이 세상)과 저쪽(가나안. 저 세상. The Promised Land/Paradice)을 지리상뿐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구분한다. 왜 모세가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밟지 못했는지? 왜 장례식 땐 항상 요르단강 저쪽의 피안을 노래하고 성서 구절은 진복팔단을 선택하는지? 우리는 이쪽과 저쪽의 구분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


지난 번에 본 요르단 강은 너무 좁아 강이 아닌 작은 개울이었다. 그 좁은 요르단 강의 폭만큼이나 우리 삶의 여정도 우주적 공간과 시간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고 짧을지도 모른다. 키드론 계곡도 사실 좁고 크지 않은 계곡이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 같은 곳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요르단 강물도 깨끗하고 물고기가 많이 서식하는 북쪽 갈릴리 호수(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의 삶의 터였던)에서 남쪽 죽음의 바다인 사해(the Dead Sea)로 흐른다는 사실이다. 어떤 생명도 살수 없다는 죽음의 바다로 말이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로의 여정을 떠났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자기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피할수 없는 이유를 여기 성서의 땅에서 재확인해 본다. 그러나 죽음을 비관적으로 봐선 안된다. 그리스도교에선 죽음으로서 생명의 끝남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특히 신부님이 장례미사때 올리는 Preface에도 이 세상의 삶이 저 세상의 삶으로 “바뀌었지 끝난 게(…changed not ended)” 아니라고 강조한다. 우리나라 말로 죽은이를 왜 ‘돌아가셨다’라고 할까? 왜 영어에선 ‘passed away’라고 할까? 어디로 돌아가고 어디로 pass했을까? 그래서 더욱 우리 삶의 현재위치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바실 흄 추기경’이 말한대로 우린 모두 다 저 세상으로 걸어가는 순례자들이다. 우리 삶의 하루하루가 또 걷는 자국마다 의미가 새겨진다는 뜻이다.


다시한번 키드론 계곡의 이쪽(올리브 산) 베드로(예수님이 잡힐때 로마 병사 마르쿠스의 귀를 자를 만큼 용기백배했지만 실체를 덮은 껍질의 베드로였던 그래서 닭이 울기전 세번이나 부인했던)와 계곡 건너편의 저쪽 베드로(참회와 깨달음의 눈물 뒤 껍질을 벗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 삶은 베드로와 같이 계곡 이쪽으로부터 계곡 저쪽으로의 순례이다. 그리고 이 삶의 여정 중에 흘린 눈물은 세례때의 성수와 똑같다. 왜 신부님들이 성수를 축성할때 소금을 조금 넣을까? 사해의 물처럼 짠... 세례란 새 생명을 죽음(사해 즉 죽음의 물속에 잠김)으로서 얻는 것이란 뜻이다. 왜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 세상에 두가지 종류의 물만 있다고 단언했을까? 하나는 참회/깨달음의 눈물이요  둘째는 그 참회의 물로 씻어 얻은 새 생명의 성수라고 했다. 문득 죽음을 대하는 우리나라 남도민요 한가락이 기억난다.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이 성주풀이의 가사가 죽음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덩실덩실 춤으로 어떤 사람들은 짧은 시로 삶과 죽음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신라의 월명사는 “삶과 죽음의 길이 예 있음에 너는 가노란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는가?” 라며 여동생 죽음의 미스테리를 노래했습니다. 성주풀이에 나오는 중국 낙양성 바깥에, 거대하고 오만한 황하강마저 비껴 흐르는 망산의 북쪽, 즉 우리가 많이 들은, 죽으면 간다는 ‘북망산’이 있다고 한다. 이 곳 키드론 계곡의 공동묘지를 보면서 북망산이 떠오르다니 한국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국 북망산에 묻힌 온갖 세속적 부귀영화를 누린 제왕과 제후가 모두 2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성주풀이를 볼륨 최대치로 해서 들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마음을 다시 다질 필요가 있다.


“죽음이란 영웅이든 아니든 절세미인이든 아니든 다 똑같은 거라는 것.”


북망산에 있는 묘가 높든 낮든 크든 작든 누구의 죽음도 마찬가지란 뜻이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죽음에 대한 묵상은 진리를 체험할 수있고 또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필수요소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리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이 시간도 순례의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면 우리 순례의 의미를 더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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