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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Sep 08. 2022

당신이 지닌 색채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기억을 어딘가에 잘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사라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것만은 기억해 두는 게 좋아. 역사는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거야. 그건 당신이라는 존재를 죽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51-52쪽)



1초, 1분, 1시간이 흘러 보이지 않는 기억의 층을 만들어낸다. 세월의 단 만큼 쌓아 올린, 나라는 존재의 역사가 색을 입는다. 한치의 오차도 거짓도 없이 기억옷을 껴입으 점점 흐려진다. 그런 기억들 속에  눌러놓은 마음을 집고 올라오는 것들이 있다. 지울 수도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나의 역사 속 생채기.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민음사, 2013)라는 책을 읽으며 생각했. 크고 작은 상처의 흔적을 안고 살아가는 나는 어떤 색채를 띠고 있을까. 민트색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 타인이 나를 바라보 색채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을까. 궁금하던 터에, 초록과 파랑을 섞어놓 첩된 느낌의 색채가 떠오른 누군가에게 . 책 속의 유의미한 단어들을 통해 색다른 관점으로 나를 이해하고 알아가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49년 교토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교 문학부를 졸업했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제81회 군조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며 29세에 데뷔했다. 1982년 첫 장편소설 <양을 쫒는 모험>으로 노마 문예 신인상을, 1985년에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다. 1987년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를 발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전 세계적인 작가로  알려졌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그가 3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출간 이후 7일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하는 등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다시 쓴 화제작이다.



이 책은 스스로를 색채가 없다고 생각하는 다자키 쓰쿠루가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순례를 떠나는 여정을 담았다. 다자키 쓰쿠루는 대학교 2학년 여름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다섯 명의 친구가 완전 공동체를 이루며 지내오던 어느 날 네 명의 친구로부터 영문도 모른 채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 달라는 통보를 받은 후부터다. 30대가 되어 철도 회사에서 근무하다자키 쓰쿠루여자 친구의 제안으로 잃어버린 과거의 진실을 찾아 운명적인 여행을 떠나게 된다. '순례의 해(프란츠 리스트)'를 음악적 배경으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의 여정은 도쿄에서 나고야로, 핀란드로, 다시 도쿄로 돌아오며 상실감에서 희망으로 회복된다.



 "아마도 나한테는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이렇다 할 개성도 없고 선명한 색채도 없어. 내가 내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게 오래전부터 내가 품어 온 문제였어. 난 언제나 나 자신을 텅 빈 그릇같이 느껴 왔어. 뭔가를 넣을 용기로서는 어느 정도 꼴을 갖추었을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내용이라 할 만한 게 별로 없거든... (중략)...
 "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그런 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 안 해? 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 지는, 확실히 호감이 가는 그릇으로."
(380-381쪽)

 

 

다자키 쓰쿠루 자신을 이렇다 할 개성도 없고 선명한 색채도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언제나 자기 자신을 텅 빈 그릇같이 느껴왔 그는  친구들에게 절교당한 후 자존감이 더욱 낮아진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침잠한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며 30대의 직장인으로 살아가지만 치유되지 못한 상처 새로운 관계의 흐름을 방해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며 상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를 마침내 여자 친구 사라가 순례를 제안하며 이끌어낸다. 




내게도 그런 기억들이 있다. 고등학교 시절 색채가 선명했던 친구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고 이탈해 혼자만의 시간을 자처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함께 일했던 팀 리더와 뜻이 맞지 않아 소외되었던 기억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픔이 퇴색되긴 했지만 멈칫거리게 하는 그 무엇이 마음을 무겁게 붙들곤 했다. 나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기보다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마음의 짐을 덜고자 애써왔다. 이런 노력 끝에 새로운 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며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왔다. 이렇듯 힘겹게 인생을 살아내며 아픈 상처 하나쯤 끌어안고 있을 누군가에게 회복의 여정을 제안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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