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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돌의 책 글 여행 Sep 30. 2022

치욕의 역사

J.M. 쿳시, <추락>, 동아일보사, 2004



쿳시는 <추락> 등 주요 작품을 통해 현실밖에 선 사람이 놀랍게 현실에 관여하게 되는 양상을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해 왔다. 쿳시의 작품은 정교한 구성과 풍부한 화법으로 잔인한 인종주의와 서구 문명의 위선을 끊임없이 비판하고 진지하게 의심해 왔다." - 스웨덴 한림원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에서



존 쿳시 작가의 책, <추락> 뒷면의 평가가 인상적이었다. 퓰리처상보다 훨씬 권위 있는 부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책이었다. 제목이 주는 강렬함과 수상 이력에 대한 내용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역시나 문장이 술술 읽히며 속도감 있게 전개되었다. 제자와의 사랑, 부랑아들에게 강간당하는 딸의 이야기가 사건의 줄기를 이루며 고구마 열개는 먹은 것처럼 답답함을 안겨주었다. 그렇다면 어떤 메시지가 이 책을 대단한 작품으로 인정받게 한 것일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얽힌 시대 상황과 인종주의, 서구 문명의 위선에 얽힌 역사적 흐름을 근간으로 읽어 내려가자, 작가의 의도가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존 쿳시는 194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네덜란드계 백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케이프타운 대학에서 수학과 영문학을 공부했고, 영국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했다.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며, 1974년 첫 소설 <어둠의 땅>을 발표하며 데뷔했다.



그는 1977년 <나라의 심장부에서>로 남아프리카 최고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1980년 <야만인을 기다리며>를 발표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83년 <마이클 K>로 영국의 세계적인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했다. 이어 1999년 <추락>으로 한 작가에게 두 번 주지 않는다는 부커상을 2회 수상한 최초의 작가가 되었다. 그 외에도 <포>, <철의 시대>, <페테르부르크의 대가>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추락>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이  무대다. 인종 간의 갈등과 폭력을 드러내고 그 원인을 탐구한 소설이다. 백인 지배가 끝나고 흑인 정권이 들어섰지만 수백 년간 지속된 흑백갈등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걸 일깨워준다. 백인 대학 교수와 남아프리카의 땅을 사랑하는 딸이 겪는 사건을 중심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주인공 루리 교수는 우연한 기회에 제자와 사랑에 빠져  추문에 휩싸이고, 자신의 죄를 명하지 않아 교수직에서 쫓겨난다. 그 후 전처 사이에 낳은 딸 루시의 농장에 은둔하면서 추락은 거듭된다. 루시가 흑인 부랑자들에게 강간당하고 땅까지 빼앗긴다...



  그가 운전한다. 놀랍게도, 루시가 집으로 가는 도중, 중간쯤에서 불쑥 얘기를 꺼낸다.
  "그것은 너무나 개인적인 일이었어요. 그들은 제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처럼 그 일을 하더군요. 무엇보다도 그것 때문에 간담이 더 서늘해지더군요. 나머지는... 예상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이 저를 왜 그렇게  증오했을까요? 저는 그들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그는 더 기다린다. 하지만 더 이상의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가 마침내 설명한다.
  "그것은 역사가 그들을 통해 말을 하기 때문에 그래. 죄악의 역사가 말이다. 도움이 된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해라. 그것은 개인적인 것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았을 게다. 그것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
(235쪽)

 


존 쿳시의 <추락>은 정교한 이야기 장치 속에 죄악의 역사를 끄집어낸다. 인종차별과 문명 간의 갈등이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표출되는지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 흑인 정권이 들어서고 회복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억눌린 증오와 분노의 응어리가 남아 여전히 폭력성을 드러낸다. 안타깝게도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약자에게 돌아가고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한다. 다루기 쉽지 않은, 묵직한 주제를 통찰력 있게 풀어내어 역사적 과오를 통감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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