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y little cabinet Mar 22. 2023

8. 코끝이 찡한 사랑

할머니, 할아버지

늘은 학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티타임이 있는 날이에요. 몇 주 전부터 티타임 시간이 있으니 참석이 가능한 가족은 미리 알려달라는 메일이 왔지요. 처음 이메일을 받았을 때 지수에게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요. 지수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학교에 오실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친구 누구누구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교실에 오셨고, 점심도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도 내심 섭섭한 눈치였지만, 내색하지 않더라고요. 또 얼마 전에는 학교에서 오래된 장난감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있었어요. 반 친구인 아치의 할머니가 교실에 오셔서 동화책도 읽어주시고, 오래된 기차 장난감도 보여주셨데요. 그러더니 집에 있던 옛 장난감을 꺼내와요. 나의 외할아버지가 런던으로 출장을 오셨다 사다 주신 2층 버스 장난감이 있어요. 런던에 와서 살고 있는 내 인생과의 연결고리가 재미있어 한국에 다녀오는 길에 가져왔었죠. 장난감을 꺼내온 지수는 엄마도 이걸 학교에 가져와서 보여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다음번에 기회가 될 때 꼭 가겠노라 약속을 하고 아이를 보는데 마음이 좋지 않네요. 행사에 참여하는 가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시간이겠지만, 절대적 이유로 참석을 못 하는 가족이다 보니 엄마의 마음은 섭섭하고 속상하기만 합니다.


태어나자마자 한국에 방문했을 때. 지수의 할아버지 나의 아빠는 아기가 어떻게 될까 안아보지도 못하셨어요. 모든 게 조심스럽고 신기해하셨죠. 그때 살아계셨던 나의 할아버지, 지수의 증조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챙겨 나와 거실에 하루 종일 앉아 계셨어요. 아이가 칭얼거리면 지팡이를 쭈욱 뻗어 아기 요람을 흔들어 주셨죠. 60세의 할아버지와 96세의 증조할아버지가 태어난 지 50일 된 갓난쟁이 앞에서 갖은 재롱을 보여주는 이 아이러니한 광경. 미소 가득한 두 분의 모습을 보며, 나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18개월 한국 방문을 3개월 남겨놓고 나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이제 얼마 후면 지수가 오겠구나’하시며 달력에 날짜를 세고 계셨다고 하는데 가까이 있었다면 더 예쁜 모습 많이 보여드렸을 텐데 아쉽고 슬퍼요.

대구에는 지수의 친가가 있어요. KTX 열차를 타고 내구려 내려가면 플랫폼 열차 문 앞에 서서 지수를 반겨주세요. 기차역은 참 이래저래 울 이유가 많은 곳이에요. 오랜만에 만나 너무 반가워서, 헤어짐이 아쉬워서 울지요. 대구에서 아빠의 외할아버지 댁에도 방문했어요. 지수의 아빠가 어릴 적 자랐던 아빠의 외할머니 댁에서 아들이 아장아장 걷고 있어요. 치매로 누워 계셨던 증조할머니의 병원도 방문했어요. 병실 벽은 지수의 사진으로 가득했죠. 지수가 왔다며 한참 동안 사랑스럽게 바라보셨어요. 몇 번이나 더 놀러 올 수 있을까, 몇 번이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면 또 코끝이 찡해져요.

한국 여행에서 지수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어요. 제일 먼저 호칭을 정리해야 하더라고요. ‘외증조할머니’는 18개월 아기에게 너무 어려운 발음이에요. 그래서 나의 외할머니는 ‘왕 할머니’가 되었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20대의 삼촌 연애 사업에 눈치 없이 끼어 여기저기 놀러 다녔죠. 그랬던 조카가 이제 다 커서 아이를 낳아 왔고, 나의 삼촌은 삼촌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내 기억 속 아직 청년인 삼촌이 삼촌 할아버지가 되었다니요. 이상하고 이상합니다.


3년 동안 코로나 덕분에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수 없었어요. 서로를 그리워했죠. 하지만 화상 통화라는 수단이 있어 매일 얼굴을 볼 수 있었어요. 봉쇄령으로 집에서 꼼짝할 수 없던 시기, 엄마인 나의 휴식시간이 필요할 때면 한국에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SOS 화상 통화를 걸었죠. 한국 동화책도 읽어주시고, 같이 보드게임도 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시간을 보냈어요. 이 시기에 지수의 한국어 실력이 쑥 늘었던 것 같아요.


4살이 지나고 한국에 지수의 장난기가 최고조에 닿았을 때 한국을 방문했어요. 이제 말도 통하고 활동량도 많아지고 말 그대로 장난꾸러기였죠. 외동딸만 키웠던 엄마 아빠는 아들 육아의 정수를 경험합니다. 정말 몇 개월 만에 얻은 휴식에 저는 쉬기 바빴고, 지수는 당연하다는 듯 아침에 일어나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찾았어요. 아침 6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 방으로 와 다다다 달려가 와락 안기는 손주를 보고 어찌 안 일어날 수 있겠어요. 나에게 아침잠을 물려준 나의 아빠는 퉁퉁 부은 눈으로 손주와 놀이를 시작해요. 엄마가 지수와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엄마가 나를 이렇게 키웠을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죠. 덕분에 저는 꿀 같은 아침잠을 잘 수 있었어요. 침대에 누워 나의 엄마, 아빠 그리고 지수,  셋이서 깔깔깔 웃으며 노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빙긋이 웃음이 지어졌어요.


하루는 딸 쉬라고 아이를 데리고 백화점으로 마트로 놀러 갔다 오셨어요. 한껏 흥분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고 커다란 쇼핑백이 줄줄이 이어졌어요. 이거 저거 사고 싶은 것은 더 많았지만, 더 사면 엄마가 혼낼 것 같아서 꾹 참았다나요? 나의 엄마 아빠는 깔깔 웃으시면서 아이와의 나들이를 무용담처럼 풀어내셨어요. 애가 너무 똑똑하고, 야무지고, 말도 잘하고, 겁도 없고, 세상에 우리 손주 같은 아이가 없지요. 지수는 할아버지와 단둘이서 세차장도 다녀왔어요. 한국의 기계식 세차를 경험한 아이는 너무 신이 났죠. 아빠는 지수가 너무 의젓하게 잘 앉아있었다며 칭찬하셨어요. 아빠의 옆자리, 조수석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어릴 적 나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빠도 그랬을까요?


남자끼리는 통하는 걸까요? 아빠는 퇴근길에 딸내미 몰래 손주를 위한 장난감을 하나둘씩 사 오세요. 그러고는 딸 몰래  꺼내주시죠. 버릇 나빠진다, 짐 늘어난다 투정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어느 날은 드론을 사 오셨어요. 드론을 날린다는 핑계로 손주를 할아버지 회사에 데려가셨어요. 지수 인생 최대의 이벤트 날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회사에는 그림책으로 보던,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던 트럭과 지게차, 각종 기계들이 쌓여있었거든요. 트럭 뒤에도 올라타보고, 지게차 운전석에도 앉아보고, 드론 날리기는 뒷전이고 할아버지가 보여주는 신기한 세상을 구경하기에 바빴죠. 이날 이후 할아버지는 지수의 모든 애정을 독차지하게 됩니다. 엄마는 절대 사주지 않는 막대 사탕도 아이스크림도 다 할아버지한테 배웠어요. 다 해주고 싶은 할아버지의 사랑과 참을 수 없는 엄마의 팽팽한 대결이 이뤄졌죠. 할아버지가 막대사탕을 주셨다며 얼굴에 짓궂은 웃음을 띠며 자랑하는 아이를 보며 너도 일탈이 필요했겠구나, 365일 지켜야 하는 엄마의 규칙이 답답했겠구나 싶더라고요. 나의 선택이 아이에게서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사랑과 시간을 빼앗은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어요.


어린 시절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어요. 엄마가 저를 혼내면 늘 막아서 주셨죠. 떠올려보니 추억이 많아요. 할머니 등에 업혀 놀던 날들, 명절이면 집안 가득 쌓이는 음식, 할머니가 해주시던 배추 속 찜은 생각만 해도 침이 고여요. 엄마는 왜 그렇게 불량식품을 못 먹게 했던 걸까요. 나는 왜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을까요. 그럴 때 내 맘을 알아주는 할머니가 계셨어요. 문을 빼꼼 열고 현관에 들어와 할머니에게 눈 짓 손 짓으로 말하죠. ‘할머니 떡볶이가 너무 먹고 싶어요. 100원만 주세요’. 그럼 할머니는 얼른 주머니 속 쌈짓돈을 꺼내 작은 손에 쥐어주셨죠. 버르장머리 나빠진다며 걱정했던 엄마의 딸은 아주 예의 바른 어른으로 자랐으니 아이 버릇 나빠질까 하는 걱정은 잠시 미뤄 둡니다. 다른 종류의 사랑인 것 같아요. 그 사랑의 깊이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겠어요. 무조건 적인 사랑. 그때는 왜 몰랐을까요. 몇 번이나 더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1분 1초가 아쉽고, 마음이 조급해요. 이번 여름 한국에 방문해요. 벌써 한껏 신이 난 부모님과 아이의 모습이 선합니다. 저는 좀 쉴게요!


한국의 이야기는... @1ofyoung

이전 08화 7. 미술관, 박물관에 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