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y little cabinet Mar 29. 2023

10. 너와 내가 자라는 시간

배움

아이의 발전은 너무 큰 기쁨입니다. 아이가 뒤집을 때, 기고 서고 걷기 시작할 때의 기쁨은 인생에서 얻은 어떤 성취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죠. 아이가 건강하고 행복하기 만을 바라지만, 아이와 내 삶을 동일시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아이의 기쁨은 곧 내 기쁨이고, 아이의 슬픔은 곧 내 좌절이 되는 부모의 마음은 다 비슷한 것 같아요.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엄마는 더는 바랄 게 없다’라는 초심을 오래도록 변치 않고 유지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듯해요.

한국에서 30여 년을 배우고 자랐으니 영국에서 체감한 육아와 교육방식은 너무나 달랐어요. 부모의 성향마다 아이의 성향마다 모든 게 천차만별이겠지만요. 영국은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운다 생각했어요. 이제 막 기기 시작한 아기들이 더러운 카펫 위를 기어 다니며 놀아요.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신발을 벗고 뛰어놀아요. 잔디와 모래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죠. 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잔디에서 뒹굴뒹굴해요.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사실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노는지 유심히 지켜보질 않았어요. 내가 그 상황에 닥치다 보니 유심히 보게 되었죠. 모든 상황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지켜봤지만 사실은 조금 충격이었어요. 마치 무균실 마냥 아기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삶고 소독하고, 보이지 않는 균이 하나라도 입에 들어갈까 노심초사하며 집에 있는 장난감을 닦고 또 닦던 저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체념하게 되더라고요. 적응하게 된 걸까요? 모래밭에 파묻혀 모래 샤워를 해도 눈을 질끈 감아요. 마음을 고쳐먹고 나니 세상은 아이가 물고 빨고 탐험할 것투성이 더라고요. 땅을 파고, 낙엽을 줍고, 나무를 타고, 벌레를 잡고 손을 툭툭 털고 간식을 먹어요. 사실 어릴 적 나의 놀이와 닮아있었어요.

누워서 울고 웃던 시기를 지나 아이는 자기 몸을 사용할 줄 알게 되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어요. 점차 성향이 드러나고 교육과 훈육을 고민하는 시기가 왔죠. 아이를 어떻게 키우겠다는 거창한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기도 전에 저는 무너졌습니다. 매일 크고 작은 전쟁이 머릿속에서 일어났어요. 런던에는 동네마다 칠드런 센터가 하나씩 있어요.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이면서 육아교육을 담당하는 지역 기관이지요. 이유식 강의나 아이 언어발달에 대한 무료 강의를 해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놀이 공간이 되기도 해요. 매주 같은 시간 열리는 소프트 플레이 타임 시간에는 다 같이 모여서 책도 읽고 동요도 부르며 율동도 배워요. 사실 지수는 겁도 많고 예민한 아이였어요. 매주 가는 곳인데도 놀이로 빠져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어요. 일단은 엄마 옆에 딱 붙어있었죠. 낯가림 하나 없이 제 집처럼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웠는데. 사실 아이는 관찰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죠. 낯가리는 엄마 밑에 낯가리는 아들이 태어난 것뿐이었어요.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을 즐기는 나인데 왜 아들이 그렇게 놀고 있으면 속상했던지요.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더 많은 곳을 다녔던 것 같아요. 더 많은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서요. 혹자는 그런 아이일수록 자극을 줄여줄 필요가 있다고도 하지만 제가 선택한 배움의 방식은 경험이었기에 참 많이도 다녔어요. 뭐 정답은 없죠. 이런 노력이 통했던 건지, 아니면 아빠의 유전인자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느새부턴가 아이는 동네에 청소부 아주머니, 경비 아저씨, 지나가는 강아지까지 누구 하나 지나치지 않고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는 수다쟁이 꼬마로 성장해 있었어요.


아이를 기관에 보내는 일은 많은 부모들의 고민이죠? 저마다의 사정이 있겠지만 저의 경우는 아이보다 저를 위해 선택했어요. 휴식이, 나의 시간이 너무 필요했거든요. 가족의 도움 없이 2년간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와 잠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어요. 아이를 위해 온전히 내 시간을 쓰겠노라 결심했지만 숨 쉴 시간이 필요했어요. 저도 살아야 했으니까요. 지수는 만 2살이 되던 해부터 일주일에 2번씩 널서리 생활을 시작했어요. ‘아이가 다치지 않고 안전한 상황에서 놀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집에서 제일 가까운 널서리를 선택했습니다. 대신 그 외에 나머지 것들에 대해선 눈을 질끈 감았어요. 먹는 거 노는 거 선생님과 친구들 모든 걸 고민하기엔 집에서 문 열고 10 발자국이라는 조건이 너무 매력적이었거든요.

널서리 첫 날. 엄마아빠 사진에 인형까지 야무지게 챙겨갔지만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돌아옴...

난생처음 엄마와 떨어져 널서리를 가는 날, 아이는 정말 세상이 끝나는 것처럼 울어댔어요. 아이 입장에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겠죠.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내 욕심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복도에 숨어서 눈물을 뚝뚝 흘렸죠. 초보 엄마를 보며 지나가는 선배 엄마들과 선생님들은 괜찮을 거라 토닥여 주었어요. 낯선 상황과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을까요? 널서리 적응 기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요. 아이는 널서리에 있는 5시간 동안 물 한 모금을 먹지 않고 돌아왔죠.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울음이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의 위로처럼 모든 게 괜찮아지기 시작했어요. 눈물을 꾹 참고는 ‘엄마는 1 O’clock에 와요.’라고 중얼거리며 교실로 걸어 들어가곤 했어요. 또 어떤 날은 ‘오늘은 엄마가 하나도 생각 안 날 만큼 재미있었어요’.라고 말했죠. 아이는 천천히 엄마 없는 자신만의 사회생활을 즐기기 시작했어요. 한동안은 아이를 데려다주고 집에 와서 멍하게 앉아 있었어요. 아이는 잘 있을까? 울지는 않을까? ‘Water’를 가르쳐 보냈는데 물은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Wee Wee라고 말을 못 해 바지에 실수를 하진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으로 머릿속을 채웠죠. 차츰 마음 졸이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어요. 아이를 보내고 마시는 꿀맛 같은 커피의 맛을 알아버렸죠.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가지고 다시 만나는 방법을 배웠어요. 우리 모두 성장한 순간이었어요.


널서리에 보내면서 한숨 돌리나 했더니 더 큰 산이 닥칩니다. 주변의 엄마들에게서 아이의 학교가 어떻고 저렇고 하는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하죠. 아직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영국 엄마들은 아이를 임신하면서부터 아이 학교를 등록하러 다닌다고 해요. 어디든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고, 부모의 마음도 다 비슷한가 봐요. 한국 엄마인 제가 뒤처질 순 없죠. 거짓말 조금 보태 동내에 웬만한 학교들은 모두 둘러봤어요. 좋은 학교는 학교 입구부터, 아이들의 표정부터 다르더라고요.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 선생님과 아이들의 표정, 쾌적한 환경, 커리큘럼도 살펴봐야 했죠. 여러 학교를 방문하며 몇 가지 기준을 찾았어요. 너무 학습을 위한 학습에 집중하지 않았으면,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배웠으면 했죠. 그리고 따뜻한 선생님들과 친구들을 만나길 바랐어요. 이렇게 적어 놓고 보니 꽤나 까다로웠네요. 학교를 알아보며 재미있었던 점은 영국 정부는 교육과정의 가이드라인만을 제공할 뿐 많은 부분은 학교의 재량에 맡긴다는 것이에요. 정부에서 제시하는 커리큘럼의 큰 틀은 있지만 교과과정도 교과서도 없었죠. 그 말인즉 학교마다 분위기도 편차도 심하다는 거죠. 그래서 다들 그렇게 좋은 학교에 아이를 입학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거더라고요. 강남 8 학군처럼, 좋은 학교 주변의 집값이 비싼 건 영국도 마찬가지예요. 아이가 7년 동안 지내게 될 학교를 정하는 일이니 모든 부모들은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죠. 그럴 수밖에요.

학교생활을 시작하고 방과 후 시간이 너무 기다려졌어요. 하루 종일 떨어져 있다 교문 앞에서 만나면 너무 반가웠죠. 아이도 뛰어와 와락 안겼어요. 무엇을 먹었나, 무엇을 배웠나, 누구랑 놀았나, 엄마는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아이도 새로 배운 노래며, 새로 사귄 친구, 함께 읽은 동화책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바빴어요. 무엇이 즐거웠는지 무엇이 속상했는지 매일매일 에피소드가 끊이지 않았죠. 넓은 세상 다양한 문화와 종교,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를 배우고 있었어요.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나름의 사회생활을 열심히 헤쳐나가는 아이의 하루를 듣는 재미가 있었어요. 등하굣길, 학교 엄마들과의 교류, 학교의 행사들, 모든 게 처음이라 생소하고 어려웠어요. 매번 허들을 넘는 기분으로 하나하나 경험해 갔죠. 아무래도 이중언어 상황에 놓인 아이가 혹여라도 뒤처지지는 않을까, 내가 부족해 놓치는 게 있지는 않을까 고민하고 마음 졸이며 1년을 보냈어요. 한 학년을 마무리하며 그동안 공부한 책을 집으로 가져왔어요. 아이들이 하루하루 배운 내용을 순서대로 모아 놓았는데 일종의 교과서이지요. 암호 해독 같던 글씨가 점점 읽히기 시작하고, 머리에 팔다리가 달렸던 그림이 점점 사람의 형태를 닮아가요. 아이의 한 학년을 평가하는 성적표에는 아이의 발전에 대한 자세하고 따뜻한 설명이 적혀있어요. 왠지, 그동안 엄마도 고생하셨어요! 하는 칭찬을 받은 것 같아 기분 좋더라고요! 한 학년의 마지막 날 졸업식을 했어요. 한 명 한 명 앞으로 나가 선생님들께 감사를 표하고 제일 재미있었던 순간에 대해 발표했죠. 자신의 생각을 바르게 표현할 줄 아는 아이가 멋져 보이기도, 부럽기도 했어요.


해외 살이의 상황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 쉽지 않아요. 울기도 많이 울고 방황도 했죠. 시행착오를 겪으며 방향을 찾았던 것 같아요. 손이 부족한 단점도 있지만 온전히 나의 육아를 실행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어요.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오히려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덜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알게 되었죠.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해야 하는 건 아이 옆에 단단히 서 있는 거란 걸요. 나의 세상을 매일 넓히려 노력 중이에요. 나를 통해 보는 아이의 세상이 함께 넓어지기를 바라면서요.


한국의 이야기는... @1ofyoung

이전 10화 9. 치열한 지분싸움, 닮아서 좋아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