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를 뚫고 아기를 안은 채 걸어 가는 내게 지나가던 프랑스 할머니가 물었다. "아기 덮고 있는 담요 어디서 구했어요?" "이거 한국에서 사온 건데요" "그렇군요. 딸 아이 사나 사주려고 했는데 아깝네요"
십여 년 전,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아이를 안고 외출할 때마다 ‘아기띠용 담요’를 늘 씌우고 다녔었다. 한국에서 사온 극세사로 된 날개형태의 외출용 아기 덮개였다. 프랑스인들은 그것을 볼 때마다 탐내 했다. 아기가 찬바람으로부터 잘 보호되겠다는 말부터, 부드럽고 따뜻한데 모자까지 달려 있으니 얼마나 좋냐는 말까지. 신기한 물건이 다 있다는 눈길이었다. 한국에서는 ‘흔한 제품’이었던 그 담요는 ‘프랑스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유사한 제품조차 없었다. 같이 아기를 키우던 이웃집의 한 프랑스 친구는 말하였었다. "왜 프랑스에는 이런 게 없는 거지? 이거 프랑스에서 팔면 히트칠텐데"
실제로 프랑스에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한국에서라면 손쉽게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물건들이 프랑스에서는 아예 찾을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거의 모든 집이 차가운 타일 바닥에 바닥 난방이 안 되어 있음에도 수면양말 하나 찾을 수 없고, 따뜻하고 보드라운 극세사 이불이나 누비 이불, 인견 이불 같은 것은 없다. 한국에는 그토록 다양한 얼굴 마스크팩 하나가 없고 겨울에 사용할 손난로 파는 곳이 하나 없다. 알록달록 머리핀이나 악세사리 소품들도 시내에 몇 안되는 정식 매장에 가야만 살 수 있는데, 제품의 디자인이나 질이 매우 조잡해서 한국의 싸고 예쁜 시장 물건들이 눈에 밟힌다. 이처럼 프랑스는
작은 생활 용품부터 인테리어 소품들까지, 심지어 옷이나 신발 같은 온갖 ‘생활재’들이 한국에 비해 현저하게 다양성이 떨어지고 선택의 폭이 좁다.
몇 안되는 고가의 브랜드들 아니면 저가의 공장식 매장이 다이기에 그렇다. 제조업이 쇠퇴한 산업구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프랑스에는 ‘중간 시장’이 없다. 한국처럼 '보세 옷집'이나 '저렴하고 다양한 시장 물건'이 없는 것이다. '메이드 인 프랑스' 제품들은 값비싼 것들이 주를 이루니 서민들은 주로 개발도상국에서 건너온 물건들을 소비한다. 그러하니 질도 디자인도 뒤쳐진 것들일 수밖에 없다. 쇼핑을 하고 싶어도 살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다.
아이템들이 넘쳐나는 한국에 살다 오니 이 나라의 소비재들이 이토록 초라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한국에는 인터넷만 뒤져도 온갖 신기한 물건들이 소비자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곳에는 그런 물건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자본과 결탁된 소수의 인테리어 소품 브랜드들이 아니면 '아이디어 상품'은 구경할 수 없는 나라. 반면에 천재적일만큼 독창적인 한국의 ‘생활템’들은 세계 어디서도 구경 할 수 없는 고유한 아이템들이었다. 작지만 알차고 실용적인, 놀랍고 신박한 아이템들이 왜 프랑스에는 없는 걸까. 그것이 궁금했다. 분명한 건 한국인들은 ‘불편함을 편리하게’ 개선하는 데 있어 누구보다 빠르고 창의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불편해도 개선하지 않고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이들이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언제나 ‘전통’이 먼저였다. 옛 것을 보존하는 것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생활 속 흔적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평범한 동네 빵집들 풍경에서도 나타난다. 모든 빵집들의 빵이 거의 다 같다는 사실 말이다. 바게트, 크로와상, 빵오쇼콜라, 브리오쉬. 모두 오래된 ‘전통 빵들’이다. 그 빵들이 가장 잘 팔리기 때문이다. 우리로 치면 식빵, 단팥빵, 소보루빵, 크림빵 정도 될까. 중요한 건 거의 모든 곳이 그 빵집만의 색다르고 독창적인 빵이 아닌 '기존의 전통 빵'을 만든다는 것이다. 어디든 ‘똑같은 빵’들이 매일매일 단조롭게 놓여 있을 뿐이다. 당연히 '신제품' 같은 것은 없다.
카페도 마찬가지다. 흔히들 ‘프랑스 카페’ 하면 낭만적이고 멋진 곳일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카페는 관광책자에 소개된 카페거나 유명한 작가와 예술가들이 들락거렸다는 파리의 특정한 카페들일 경우다. 프랑스 카페 대부분은 여전히 칙칙하고 어둡고 촌스러운 옛날 펍 스타일이며 메뉴 또한 에스프레소 두 종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1세기에도 그 흔한 아메리카노 하나 찾을 수 없는 곳이 프랑스 카페다. 한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온 ‘모던하고 세련된 카페’는 프랑스에 존재하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아메리칸 스타일 카페’라 하여 현대식 카페들이 하나씩 생겨나기 시작했을 뿐이다. 음료 종류도 다양한데다 밝고 쾌적하니 당연히 젊은이들이 몰린다. 그게 불과 최근 몇 년 사이다. 중요한 건 프랑스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카페는 언제나 ‘스타벅스’라는 거다. 프랑스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햄버거집이 맥도날드인 것과 같다. 규제로 인해 한정적으로만 입점해 있는 그것들이 시사해주는 바는 매우 크다. 그만큼 프랑스는 ‘현대의 소비자들’과 크게 동떨어진 시대정신을 고집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이한 게 프랑스는 아직도 ‘서커스 유랑단’이 존재한다. 우리 옛날 동춘 서커스 같은 개념이다. 물론 규모가 좀 더 크고 시스템화 되어 있지만 스타일은 옛날 그대로다. 알록달록 천막을 치고 코끼리와 곡예단이 나오는 묘기. 프랑스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크고 작은 서커스 공연 관람을 장려하고 심지어 아이들이 사설 학원에서 서커스 동작들을 배우기도 한다. 신체의 균형 감각을 길러준다는 것이다. 해마다 여기저기 붙어있는 서커스 포스터들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은 이들이 지킨다는 전통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다.
우리에 갇혀 사는, 자유를 박탈당한 동물들의 재롱을 21세기에도 여전히 ‘오락’으로 즐기는 사람들. 파리의 쥐떼 출몰에도 쥐를 학살하지 말자던, 전투적인 프랑스의 ‘동물보호단체’들은 왜 이러한 전통에는 침묵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혹시 이들은 말그대로 그저 ‘서커스’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이처럼 ‘세련되고 앞서가는 나라’라는 프랑스에 살면서 체감하는 건 그와 반대로, 이 사회는 '혁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전통을 지킨다는 이들의 모습이 실은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체된 마음’ 상태로 느껴지는 건 나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에 어떤 떡집이든 빵집이든 창의적이고 독특한 빵과 떡들이 넘쳐나는 한국. 그 모습을 두고 ‘경쟁 구도가 심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다. 어떤 것이든 불편을 없애려는 마인드를 가진 한국인들이다. 그렇기에 ‘유행에 민감한’ ‘냄비 근성’이라는 말을 듣지만 사실, 그런 우리 모습은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두려움이 없고,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며, 고여 있지 않고 흐르는 유기물. 그것을 우리는 ‘기민함’이라 하며 ‘역동성’이라 한다. 이것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 한국의 코로나 대응이었다. 고여 있지 않기에 유연하고 열려 있기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우리는 실은 ‘빨리빨리’ 끓고 식는 냄비가 아니라, 어디로든 흐를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물 같은 사람들인 것은 아닐까. 프랑스인들의 ‘고여있음’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
한국의 생명력, 죽어있는 땅 프랑스
* 참고 자료 : 21년간 한국에 살며 느낀 한국인에 대한 단상 인터뷰 영상, 미국 상공회의소 아시아 담당 부회장 '테미오버비' - "한국인은 매우 기민하게 움직이며,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http://bitly.kr/rYKmShTO7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