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Dec 16. 2019

생명력을 상실한 땅 프랑스,
그들이 눈을 뜬다.

잃어버린 생명력에 닿고 싶은, '늙은 문명인들'


 일요일 아침, 이웃집 할머니를 마주쳤다. 지난 가을 한국으로 여행을 다녀왔다던 그분을.
 
"한국 여행 잘 다녀오셨어요?"
"오! 너무 좋았어. 우리 친구들도 너무 행복해했고 말이야. 완벽했어!"
"설악산 단풍은 최고였어. 내가 지금껏 본 어떤 가을산 보다 아름다웠지. 경주를 거쳐서 부산에도 갔고. 우리는 목포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에도 갔어. 너무 아름다운 섬이었어. 아! 우리는 낙산사에서 템플스테이도 했어. 환상적인 여행이었어. 너희들의 땅은 살아 움직이는 거 같았어!"
 
 살아 움직이는 땅. 그 분의 그 말에 가슴이 벅차왔다. 그것을 단번에 알아봤다니.

말하는 중간에도 아이들 자랑하듯 한껏 들떠 계시던 그분을 보며 어느새 '엄마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기뻤다. 지난봄 나를 찾아와, 한국 여행을 갈 거라며 조언을 구하러 오셨을 때,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을 말씀드리고 루트를 짜드렸었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알차게 여행을 다녀오신 게 분명했다. 더구나 가을은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아니었던가.
 
 노인이 가장 부자인 나라. 유럽의 노년층이 대부분 그렇듯, 프랑스의 노인들은 어떤 세대보다도 '가장 안정되고 풍족한' 사람들이다. 식민지 개척 시대의 모든 혜택을 누리고 산 사람들. 그때 수탈한 자본을 금고에 쌓아놓은 국가 덕에,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풍요를 누리는 사람들. 한국의 노인들에게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상처를 모르는 사람의 눈빛과 얼굴' 내가 처음 프랑스에 와서 가장 크게 이질감을 느꼈던 것 중 하나가, 이런 '노인들의 밝은 얼굴'이었다.
 
온갖 트라우마와 한으로 점철된 근현대 역사를 지나는 동안, 썩어 문드러진 속내가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있는, 한국 노인들의 그 '황량함'이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 그것은 내게 부러움을 넘어 질투심을 유발하기까지 한 어떤 것이었었다. 
남는 게 돈이고 시간이다 보니, 사회 복지가 잘 되어 있다 보니, 그 돈을 쓸 데라고는 '여행 다니며 즐기는 것' 밖에 없는 사람들. 


 모든 곳을 다녀봤기에 이제는, 더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 낙인 사람들. 중국, 일본, 티벳...같은 곳은 이미 젊은 날 진작에 몇 번씩 다 가본 사람들. 그래서 이제 그들은 '숨겨진 곳'을 찾는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곳. 그러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곳. 역동적인 기운이 꿈틀대는 곳. 한국이다. 한국을 다녀와 본 프랑스 친구들 중에, 한국과 사랑에 빠지지 않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것은 한국이든 북한이든 마찬가지다. 북한만을 다녀온 프랑스인들도, 한국(북한)과 사랑에 빠져서 온다. 그리고 한국(북한)을 잊지 못한다. 그들이 품게 된 것은, 한국과 한국인만의 어떤 '혼'이었기에. 
그것은, 우리가 '역동성'이라 부르는 것이고 '다이나믹 코리아'로 명명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면'에서 오는 것이기에 정지되어 있는 듯한 북한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 정착하기를 거부하고 아프리카로 이란으로 떠돌아다니는 프랑스 친구 알렉스. 지금은 9살 4살 두 딸과 아내와 함께 레바논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언젠가 내가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네가, 왜 자꾸 프랑스를 떠나는지 알아. 이곳은 이미 '죽어있는 땅'이기 때문이지. 여기 이 땅이 너에게, 그 어떤 생명의 숨결도 건네주지 못하기 때문이지.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오래전, 생명력을 상실했거든.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어. 레바논에서 너는 참 행복해 보여" 알렉스는 말했다. "맞아. 나는 프랑스에서 언제나... 우리가 매우 가난하다는 것을 느꼈어" 
 

아프리카 남자와 재혼한 이유로, 가족들로부터 '단교당한 채' 살아가는, 대지의 눈빛을 가진 친구 크리스틴과의 대화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말했다. "나는, 너희의 이 땅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희들의 땅은, 이미 '죽어있는 땅'이야. 어떤 새로운 것도 피어날 수 없지"

크리스틴이 말했다. "나도 알아. 나도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우리는 모든 역동성을 잃었어. 어떤 새로운 것도 남아있지 않지. 오히려 미래는 저 아프리카, 아니 너희들 땅인 아시아에 있지"
 

 
 최근에 한국인들은, 프랑스인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급격히 변하였음을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그것은 두 나라의 수장이 휴전선을 정답게 넘나든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유럽인들의 뒤늦은, 한국 음식에 대한 '대대적인 발견' 그리고 BTS는 거기에 가장 결정적으로 완벽한 공헌을 했다. 프랑스 도시들에 한국 식당과 한국 카페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한글학교들이 문전 성시를 이루고 있다. 정체되어 있던 프랑스인들의 '갈망'을 반영한 결과물이다. 

 요즘 
한국인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저마다 놀란다. 주변의 프랑스인들이한국에 대해 갑자기 관심을 보이고, 한국을 알고 싶어하고, 한국인인 우리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경험을 '너도나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프랑스인들이 '한국 사람'이라고 하면 호감을 보이고 만나고 싶어 하고, 함께 K팝을 BTS를 얘기하고 싶어 하고, 한국 음식을 한국의 전통문화를, 한글을 얘기하고 싶어 한다. 


동양이라면 일본 밖에 모르던 프랑스인들에게, 한국이라면 김정은 밖에 모르던 프랑스인들에게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지금 프랑스 뿐만 아닌 유럽 전체에서 'BTS 효과'는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언가 이 거대한 흐름을 설명할 수 없다. 이 흐름은 바로, 미래로 연결되어 있는 어떤 것. '늙은 문명인들'인 유럽인이 상실했고 오래도록 갈망하여왔던 어떤 것과 닿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안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 누구도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지금 '한국 밖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국이라는 브랜드' 가치가 폭발하고 있다. 여기, 이 늙어버린 땅, 죽어있는 땅에서. 그것은, 생명력을 상실한 이 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고 있는 어떤 것이며, 종국엔 그들의 생명력을 깨우는 역할을 하게 될 무엇이다.


역동성, '끊임없이 움직이는 힘' 그것은 늘 기운이 차 있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생명력 그 자체이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한국은, 그것을 가지고 있다. 밟아도 밟아도 일어나는 힘.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기운. 

 

 문명의 이름으로 지나온 프랑스의 자기중심적 역사. 팽창 욕구를 미화한 식민지 침략과 수탈.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 여전히 뼛속까지 제국주의 국가인 프랑스가 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에 놓으며 잃어버린 것은 생명력이었다. 이성과 합리 뒤로 사라져간 직관과 심장의 목소리. 그것이 동양에서 온 내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백인들의 몸짓을 이상해 했던 것처럼.


생명력을 상실한 땅과 그 땅의 사람들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숨겨져 있던 생명력의 이름. 기운이 넘실대는 그 작은 땅을 향해. 나도 함께 긴 잠에서 깨어난다. '이상하고 낯선 땅'에서 보낸 생경한 시간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생명의 숨결이 다른, 내가 발 딛고 서있는 이 땅을 어루만지며 새 아침을 맞는다. 



* 메인 그림 : Henri Matisse 
  

저물어가는, 늙어버린 대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