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의 나라.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을 때부터 들어왔던 말. 어떤 나라에도 없는 이 고상한 수식어는 단 한 나라, 프랑스 앞에서만 허용되는 특별한 단어였다.
모두를 관용으로 대한다는 이 자비 넘치는 개념은, 독재 정권 아래 신음하던 청춘들 가슴을 뜨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유로운 자기주장과 자기표현 그리고 정의가 바로 선 땅. 진보 지식인들에게 프랑스가 동경의 땅으로 여겨졌음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프랑스로 떠났고 그곳의 사상들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자유와 인권 그리고 똘레랑스의 나라!
모두의 선망처럼 '앞서가는 나라' 프랑스는, 똘레랑스의 참 의미를 실천하고 있을까.
똘레랑스란 나와 다른 모든 다름을 존중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문화를 인정하고 차별과 편견에 반대하는 정신이 포함된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실제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사람의 결정적인 행동은 축적된 무의식적 감정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이성적인 합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프랑스에서 인종차별 모욕을 당한 한국 여학생 사건은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직접 촬영한 영상을 경찰에 제출했지만 ‘폭언자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던 프랑스 경찰의 미온적인 태도가 끝이었다. 예견된 일이었다. 프랑스 현지 매체에 기사로 나지 않은 이상, 프랑스 경찰에게는 그저 ‘귀찮은 해프닝’으로 치부될 문제일 뿐이란 걸 말이다. 여학생이 직접 올린 당시 영상에는 몇몇 한국인들의 목소리가 추가되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같았다. (피해자 여학생이 올린 영상: http://bitly.kr/Uo5gLL4uPS)
누군가가 옆에서 저런 모욕을 당하고 있을 동안, 아무도 말리지 않고 나서지 않는 ‘방관하는 프랑스인들의 태도’ 어떻게 그것이 똘레랑스의 나라 시민들일 수 있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편견과 차별에 개입하지 않는 침묵은 똘레랑스와는 거리가 먼 비겁함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말한다. 저들은 다 아프리카나 아랍 출신의 ‘무식한 이민자들’이라고. 그러면서 이런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그들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그들의 증오 행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혐오 범죄는 축적된 감정에서 온다. 프랑스 사회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답이 나와있다. 프랑스에서 그들 위치는 아예 사회 안에 편입되는 것 자체가 거부되는 ‘잉여 존재들’이라는 현실이다. 정작 사회에 진입하는 장벽을 막아놓으면서, 놀면서 세금 축내는 골칫거리로 취급한다. 거기에 우월한 자신들이 문명화시켜준 열등한 식민지 출신이라는 무시가 함께 깔려 있다.
법으로는 차별과 혐오를 금지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사회는 그렇게 작동하고 있지 않다.
미국 흑인 플로이드 사망사건과 똑같은 사건이 2016년 프랑스에서도 있었다. 경찰의 신분증 제시 요구를 거부하고 달아나던 흑인 청년이 체포 뒤 바로 숨진 사건이었다. 그의 양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경찰은 책임 없음으로 결론 났지만 유족들이 진행한 사인 조사에서는 경찰의 과잉진압이 사망 원인으로 나왔다. 최근 프랑스 집회들은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도 함께 외치고 있다. 여기 프랑스인들, 수많은 아랍 이민자들과 아프리카 이민자들 절대 끼워주지 않는다. 겉으론 친절해도 실제 바운더리에 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말로만 다문화 존중이지 사실상 완벽하게 무시하며 서로가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 이처럼
똘레랑스를 말하는 프랑스 사회는 사실 ‘선명한 계급이 존재하는 신분 사회’이다. 겉으로 사회복지 혜택과 수당을 평등하게 지급한다 하여, 그들의 오만한 생각까지 가려질 수는 없다.
이러한 사회 전반에 드리워진 ‘암묵적인 무시’ 그 근본적인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서 ‘빵을 해결해주었으니 입 다물라’고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만이다. 이렇듯 차별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프랑스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없다는 데 있다. 그러면서 고고하게 똘레랑스를 외친다. 하지만 그 똘레랑스는 그들 말처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고 있지 않다.
1년 전 프랑스에 정착한 한국 친구네가 있다. 프랑스 회사는 친구를 고액 연봉으로 모셔왔다. 그러나 이삿짐 컨테이너가 오기로 한 날이 다되도록 집은 구해지지 않았고 불어를 못하는 친구는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회사에서 적극적으로 집을 알아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를 위해 내가 직접 부동산에 전화만 백 통은 해준 것 같다. 결국 친구네는 프랑스에 온 지 4개월 만에 겨우 아파트 한 채를 구할 수 있었다. 그것도 회사 사장이 보증을 서주어서. 최악의 폭염이었던 작년 여름, 4개월간 친구네는 다섯 살, 세 살 아이들을 데리고 난민처럼 총 여섯 개의 에어비앤비를 옮겨 다녔다. 그것을 보며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왜 그 친구네가 번번이 집주인들에게 퇴짜를 맞았는지는 뻔하였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 딸린 동양인 이어서다. 다른 이유는 없다. 프랑스 집주인들이 선호하는 세입자 중에서도 가장 최하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 순위는 당연히 백인 프랑스인, 그다음은 백인 외국인, 그다음이 나머지 프랑스인, 맨 마지막이 동양인이다. 이 순위는 당연히 취업에도 해당된다. 이처럼 프랑스에 사는 이민자들의 생활 속에서 무수히 일어나고 있는 차별과 혐오는 보편적 일상이 되어있다. 물론 친구 사례는 방치한 회사가 잘못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인들은 그렇게 될 때까지 놔두지도 않을뿐더러 먼저 나서서 살피고 도와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똘레랑스라고’ 밖으로 크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함께 사는 세상의 도리를 다할 뿐 우리 행동이 고결하다고 하지 않는다. 진짜 우월한 자는, 자신이 우월하다고 떠들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비교적 ‘안전한 동양인’들이 있기는 하다. 철저하게 ‘프랑스인 화’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백인 프랑스인 가족과 함께 있는 사람. 완벽한 불어를 구사하며 프랑스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 헤어스타일부터 옷 입는 스타일, 사고방식까지 모든 게 프랑스와 '동화되어 있는' 사람. 그래서 거부감이 들지 않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배척당하기 쉽다. 프랑스인들이 왜 외국인을 싫어하는 줄 아는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은 게 싫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이처럼 실은 굉장히 배타적인 사회다.
프랑스나 독일에서 인종차별에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에서다. 그리고 양국 국민들 간에 사건이 생겼을 때 지도자들은 발빠르게 직접 나선다. 그러나 정작 가장 많은 혐오 사건이 발생하는 동양인 차별에 대해서는 모두가 함구한다. 이에 대해 정범구 주 독일 대사는 말하였다. "베를린에서는 누구도 피부색이나 신분증, 은행계좌, 교육 정도를 묻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학생 부부) 사건이 발생하고 나니 과연 이렇게 관용적이고 다문화적인 베를린의 모습이 여전히 현실에 부합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언제나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팩트다. 프랑스의 똘레랑스에 대한 진실은 겉으로 보여주는 형식에 있지 않다. 그들이 이민자들을 대하는 마음에 있다. 그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차별로 인한 증오 범죄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증오의 감정'이 일으키는 파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멈춰야, 거기서도 멈춘다. 프랑스인들이 성찰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선택된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관용은, 똘레랑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권의 나라' 프랑스의 실태
프랑스는 선명한 인종차별 국가
* 프랑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망한 흑인 청년 기사: http://bitly.kr/cuZVmW15B6 * 프랑스에서 '동양인은 가장 낮은 레벨'이라는 기사: http://bitly.kr/VYPeRldTe2 * 김금숙 만화가님 프랑스 인종차별 기사: http://bitly.kr/Do43YT5QM7 * 독일에서 인종차별 당한 한인 부부 기사: http://bitly.kr/jnm85mX4Fq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