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을 위한 나라는 많다. 흑인을 위한 나라도 가끔은 있다. 하지만 동양인을 위한 나라만 없다.
'차별을 혐오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땅. '인권을 존중한다는' 자들의 땅이다.
지난 5월 25일 미국에서 비무장 상태인 흑인 남성이 백인 경찰의 가혹행위로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미국 시민들은 물론 세계 전역의 모든 흑인들과 평화주의자들이 들고일어났다. 그들의 구호는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였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동안 흑인들이 당한 차별을 생각하면 그들의 분노는 정당하였다. 그러나 무언가 이상하다. 정작 자신들 생명이 소중하다는 흑인들은 폭동을 일으키며 더 힘없는 아시아인들 상점을 약탈하고 방화한다. 모두가 ‘흑인 목숨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지금, 정작 가장 소외되고 방치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아시아인들이다.
6월 9일 미국에 사는 한 60대 한인 남성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피해자의 손녀가 사진과 사건 경위를 트윗에 올려 알려지게 됐다. 가해자는 흑인이었고, 미국 경찰은 ‘증오 범죄인지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보다 앞선 4월 27일 독일에서는 한국인 부부가 지하철에서 ‘인종차별적 집단 린치’를 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 부부는 무려 5명에게 언어폭력과 성희롱을 당했고 뱉어대는 침을 맞았으며 물리적 폭력까지 당했다. 그 후 한국인 부인은 공황장애까지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경찰은 ‘코로나라고 비웃은 건 인종차별이 아니다’며 사건 접수를 거부했었다.
코로나로 촉발된 아시아인을 향한 차별은 직장 내 혐오 발언이나 길거리 모욕, 진료 거부 등의 다양한 형태로 끝을 모르고 일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동양인들은 ‘증오의 대상’으로써 무차별적 표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6월 6일 프랑스 트램 안에서 20대 한국 여성이 한 남성에게 폭언과 위협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중국인이라며 다짜고짜 욕을 퍼붓던 남성은 창녀라는 말을 여러 차례 뱉었고 면전에서 폭력을 가할 수 있다는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의 일행은 당하는 여성을 보며 웃고 있었다. 피해 여성은 촬영한 영상을 가져가 경찰에 신고했지만 프랑스 경찰은 ‘폭언자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소극적으로 일관했다.
피해자분이 직접 올린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았다. 중간에 한 중년 남성이 나서서 중재했지만 그를 제외한 주변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고 있었다. 프랑스 거리에서 늘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 봉변을 당하고 있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말이다. 댓글들을 읽어보았다. 영어 자막을 함께 올렸기에 많은 외국인들의 댓글이 있었다. 대부분이 가해 남성을 비난했지만 그중에는 이런 댓글도 보였다. ‘그런 사람들이 프랑스를 부끄럽게 한다’ ‘그는 진짜 프랑스인이 아닌 아프리카 출신 흑인이다’. 인종차별 문제가 터질 때마다 나오는 이 말 ‘그 사람이 무식해서’. 우리는 이것에 대해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 그러한 사람들은 소수이고, 인종차별은 개인의 문제일 뿐인 걸까. 프랑스 사회는 정말 그러한 인종차별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걸까.
프랑스에 정착하던 초기 나는 인종차별 경험을 종합세트로 겪어봤다. 유모차를 끌고 가는 내 머리 위로 초등학생들의 물세례가 떨어졌고, 길거리에서 중학생 아이들에게 중국년이라고 놀림받은 후 밀침을 당했으며, 동네 백인 빵가게 아줌마와 채소가게 아저씨에게는 매번 싸늘한 시선을 받았다. 심지어 아이 학교에 봉사하러 갔던 날은, 내 아이와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중국년이라며 손가락질도 받아봤다. 불쾌지수가 높았던 여름날은, 종합병원 접수대에 앉아있던 여성이 많은 사람 앞에서 다짜고짜 내게 소리를 지르는 공개적인 모욕도 당해봤다. 그때마다 프랑스인 남편은 말했다. ‘운이 없어서’라고.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프랑스를 알아갈수록 그것은 매우 단편적인 조각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아직도 동양인을 비하하는 ‘눈 찢는’ 포즈를 하며 TV 방송을 하고, 프랑스 아이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눈 찢는 놀이’를 하며 논다. 눈이 찢어진 동양인들끼리 만나 눈이 찢어진 못난이가 태어난다는 놀이. 아이가 어렸을 때 ‘재밌는 놀이’라며 그것을 얘기해 주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던지. 학교의 모든 친구들이 그렇게 논다고 했다. 나는 곧바로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얘기해주었지만, 정작 학교 선생님도 그 누구도 그런 아이들 모습을 보며 그것이 잘못된 거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프랑스에서 다운증후군을 부르는 칭호가 여전히 ‘몽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것을 처음 발견한 영국 의사가 ‘환자 용모가 몽골계를 닮았으며’ '퇴보한 격세유전 결과 우수한 백인종이 열등한 동양 인종으로 퇴화 변이를 일으킨 상태'라는 가설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으로 인종차별에에 대한 것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었다.
이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인종차별, 특히 동양인을 향한 인종차별은 ‘제국주의 시대의 의도적 산물’이며, 이들은 그것을 고의적으로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프랑스 엘리트들이 널리 퍼져 있는 이 사실들을 모를까. 알고 있다. 아이들의 그러한 관념은 아이들이 만든 것일까. 그렇지 않다.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위해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증거’를 끊임없이 생산해야 했고 힘이 없던 아시아인들은 그 희생자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악의적 합리화는 그들이 약소국들을 짓밟을 때마다 맨 앞에 걸려있던 구호였다. 꾸준한 선전의 결과, 국민들 무의식에 굳게 뿌리내린 그것은 아이들 놀이문화에까지 스며들 수 있었다. 문화는 그 사회의 오랜 관념이 켜켜이 쌓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독일 학계에서 한인 인종차별 사건을 공론화시켰을 때 지적한 부분도 같았다.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된 아시아에 대한 편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열등한 인종’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던 유럽인들. 그 타깃이 아시아였다는 사실을, 그들은 그것을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모른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의 역사가 그들의 현재가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종차별에 대해 진정성이 있다면, 보여주기식 법으로 명시하여 견제하는 척할 것이 아니라, 자국민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해야 한다. 차별 교육이 아닌 ‘제대로 된 역사 교육’ 말이다.
그것은 자신들이 만든 ‘거짓 신화’였고, 잘못된 거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차별 금지 구호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인권의 나라' 국민들은 오늘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흑인이 아시아인을 차별한다’는 포인트가 아니다. 핵심은 그러한 발상이 가능하도록 한 사회적 풍토에 있다. 사회적 약자들을 그렇게 부추긴 배경. 프랑스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분노가 아시아인들을 향하게 만든 배경. 그리하여 최종 약자인 동양인이 샌드백이 되게 만든 고리.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다시, 프랑스에서 치욕을 당한 한인 여학생의 영상으로 돌아와 보자. 영상에 달린 한 외국인의 이 댓글에, 프랑스에서 아시아인으로 사는 현실의 보편적 진실이 담겨있다.
‘프랑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무도 당신을 돕기 위해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 프랑스 인종차별 피해자 한국 유학생분이 직접 올린 영상 : http://bitly.kr/Uo5gLL4u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