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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Mar 12. 2016

소명召命과 자명自鳴

새벽에 심장소리 때문에 눈이 떠진다.

2001년에 새벽 거인이라는 책을 썼다. 
16년이 지났지만(지금은 절판), 가끔 이 책을 읽었던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렇게 만난 옛 독자는 나에게 꼭 물어보는 질문은 항상 같다. 
최근에 만난 그분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시나요?" 
책의 진정성을 묻는 질문이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한다'고 말했다. 새벽에 혼자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은 침묵 속에서 즐기는 휴식이다. TV 없는 휴식, 사람과 같이 하지 않는 휴식, 음악이 없는 휴식, 처음에는 공포만이 느껴졌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시절에는 TV, 라디오, 잡지 같은 여가 소비 상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자 있는 한가로운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다'라고 말했다. 고독의 휴식은 현대인에게는 고문이지만 소크라테스에게는 현대인이 가져보지 못한 재산이었던 것이다.

새벽에 완벽한 휴식을 즐기는 것도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나는 휴식을 통해 에너지를 만드는 것을 배웠고 그 에너지들이 일상으로 흘러나갈 수 있는 교류 회로를 만들었다. 휴식과 소비의 기준은 바로 이것이다. 휴식이 소크라테스처럼 재산이 되는가? 아니면 소비가 되는가? 나는 상상하는 훈련을 휴식과 연결시켰다. 상상의 훈련. 그것은 가치와 비전을 향한 열정이다. 상상하면서 나는 새로운 흥분 속에서 명상이라는 도구를 얻게 되었다. 비록 나에게는 휴식의 공간은 없지만 휴식의 시간인 새벽은 항상 온다.


모든 직원의 회사 출근 시간은 10시다. 
나는 용인에서 아침 6시에 출근한다. 
삼성역에 6시 40분 정도에 도착한다.


출근해서 자리에서 앉아 어제와 오늘 일을 생각하는 시간은 마치 합주 연주회를 하기 위해서 나의 음악 악기의 튜닝 시간과 같다. 다른 사람이 출근하기 전에 여러 프로젝트의 으뜸음과 나 자신의 절대음을 점검한다. 
튜닝, 절대음 그리고 으뜸음을 잡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제와 오늘의 감사 제목을 찾고, 내 안에 있는 생각과 감정을 가장 쉬운 단어로 적어본다. 아침 일기다. [어제 결정한 의사결정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결정인가?]라는 것을 자문하면서 마음의 대답을 듣는다. 이것은 나에게 쓰는 편지다.


"물론이죠, 지금도 새벽에 일어납니다."
조심스럽게 묻는 독자는 나의 대답을 듣고 환하게^^ 웃는다. 
(속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의 웃음이다)



음악가들이 무대에 올라오기 전에 무대 뒤편에서 음을 맞추면서 자신이 연주할 모든 음악을 연습하는 것처럼, 나도 (조기 출근과 선행 업무가 아니라)오늘의 연주를 연습한다. 아침에 해야 할 프로젝트, 오후에 만날 사람에 대한 예상 질문, 오늘 마지막 업무에 대한 화려한 클로징... 이 모든 것을 나의 자기다움과 기업의 우리다움을 의식하면서 나의 악보를 읽고 내가 나의 하루의 대본을 직접 쓴다.

내 몸에 100조의 세포가 있다고 하지만 그중에서 자신을 의식하는 세포는 무엇일까? 기업에는 수천 명의 사람이 있지만 기업을 인격체로 의식하는 사람은 몇 명이 있을까? 나는 조직에서 단세포(나중에는 암세포가 되는ㅠㅠ)가 되고 싶지 않다. 전체를 이루는 단세포가 아니라 전체를 의식한 고등 인간이고 싶다. 내가 새벽에 와서 하는 작업은 기업, 프로젝트 그리고 비전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의식하는 튜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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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3년. 만약에 새벽거인을 읽었던 독자가 이런 질문을 한다면 ...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세요?" 

국민연금을 받는 65세에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슨 대답을 나는 할까?

아마, 그때도 나는 새벽에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자명종이 나를 깨우기 전에 내 심장이 뛰어서 일어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더 좋게 하는 일]

누구의 관점으로 더 좋게 될까?
누구에게 좋은 세상이라고 한다면 누구에게는 지옥인 세상은 무엇일까?
내가 죽는다면 세상은 나를 대체할 사람은 누구일까?

1996년부터 새벽에 일어났다.
20년이 지났다.
나는 20년의 새벽을 보았다.
그 새벽에서 나는 내가 되는 것을 보았다.
.
.
자명종이 아니라 소명이 나를 새벽에 깨운다.
나는 60억 중에 한 명이 아니라 소명을 따르는 1명으로 살고 싶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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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계속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소명召命으로 인해서 나는 자명自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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