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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나 Sep 21. 2018

프리랜서의 휴가

두 프리랜서의 생존 실험 에세이 <둘이 같이 프리랜서>

https://tumblbug.com/freelancertogether

이 글은 헤이메이트의 첫 번째 단행본 <둘이 같이 프리랜서>에 실릴 예정입니다.



대부분 그러하듯이 나도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새로운 맛, 새로운 공기, 새로운 풍경, 새로운 사람. 돈과 시간의 여유가 허락된다면야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그런데 있었다. 내가 그랬다.


전국민 여행 예찬의 시대에 그걸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아서, 국내외 어디로 떠나든 여행마다 고난과 역경을 거치면서도 나는 내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여행의 형태를 아직 잘 알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여행자인 나에 대해서는 조금씩 더 알아갈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만족스러운 여행을 위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사전 준비를 상당히 귀찮아 한다거나, 모든 짐을 짊어지고 길에 머무는 시간을 부담스러워해서 이동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이다. 그럴거면 짐을 간소하게 싸면 될텐데, 그건 또 못하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덜 이동하고, 사전 준비를 덜 해도 되는 여행을 하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그런 여행을 떠났다가, 나는 시트콤 인생의 또 다른 하이라이트 클립을 만들게 되고 말았다. 2016년 가을, 제주 출장을 앞두고 2박 정도를 혼자 여행을 하기로 했을 때의 일이다. 


물과 바람과 내 불운의 섬, 제주


물론 체계적인 여행 루트라든가 가봐야 하는 맛집 등을 미리 찾아보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잘못이다. 글 쓰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사 외에 그 비슷한 것은 전혀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말은 통하지만 전혀 모르는 동네에 덩그러니 떨어진 나는 오직 스마트폰 데이터에만 의지한 채로 헤매이게 됐다. 여행이라면, 즉흥적인 선택도 좋잖아? 하지만 나란 인간에게는 언제나 조금의 오류가 있어서 최선의 선택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얼떨결에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을 하고야 만다. 두 군데의 맛집은 1시간 넘게 줄을 서야 하고, 한 군데에서는 1인 손님을 받아주지 않았을 때 나의 선택은, 서울에서도 잘 가지 않는 파리바게뜨에서 빵과 차를 먹는 것이었다. 아니, 차를 마실 거였다면 그래도 제주까지 내려왔는데 오설록이라도 갔다면 좋았잖아? 그런 생각은 당연히 차를 시키고 싸구려 인조가죽 소파에 자리를 잡은 뒤에야 떠오른다. 그 순간 나를 위로해주는 것은 그래도 해피포인트가 쌓였다는 것 정도다. 그리고 다음 날 우도에서는, 노을 지는 장면을 보겠다고 낭만적인 척을 혼자 다 하다가 마지막 배 시간 이후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나가버리는 동시에 모든 식당이 닫아버려 컵라면을 먹어야 했다. 우도에서 1박을 하기로 한 것은 어디선가 관광객들이 나간 뒤 조용한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묘사한 글을 보았기 때문이었는데, 조용하고 불 꺼진 섬이란 누군가와 함께일 때나 아름답지 1인 여행객에게는 섬에서 변사체로 발견될 지 모를 자신의 미래를 지나치게 생생하게 떠올리기 좋은 장소인 걸 나는 몰랐다.

 

뭘 굳이 또 혼자가 되어야 하는지


일단 제주를 버스로 여행한다는 것부터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달은 오후, 겨우 찾은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찬찬히 관찰해보았다. 보통의 사람들은 여행의 어떤 점에 즐거움을 느끼는가. 다들 커피와 제주산 당근이 들어갔다는 당근 케이크를 사진으로 간직하며, 모두가 일하고 있을 평일 한낮에 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았다. 평화롭고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왜냐하면 그건 바로 내가 일하는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카페의 창가, 커피, 유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듯한 오후. 평화롭고 심심하지만 하얀 빈 창이 기다리는 한 무엇이라도 써야만 하는 그런 시간. 일단 겉으로 보이는 혼자만의 여유 같은 것을 왜, 여기까지 와서 즐겨야한단 말인가? 그건 프리랜서인 내가 원한다면 정말 언제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여행, 특히 혼자만의 여행을 좋아할 이유가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프리랜서라면, 정말이지 프리랜서의 휴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을 해봐야한다. 평일 한낮의 여유를 만끽해야 하는 순간에 마감을 떠올리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언제 어느때나 일하는 프리랜서의 뇌가 온에어 되어있다면, 당신이 칸쿤의 해변에 있다 해도 거긴 일터일 뿐이다. 따라서 휴가를 어디로 어떻게 떠나는가보다, 적어도 휴가일정 동안은 마감일과 마감을 위한 사전준비 등에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물론 그러다보면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까지 마감을 해야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라도 끝내는 게 무조건 낫다. 아니면 숙소에서 울면서 마감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다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그리고 쉬는 동안에는 일과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분리된 상태를 유지하고, 여행지에서 새로운 영감 따위를 받기를 기대하지 않으며, 아주 잘 쉬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


불쌍해보일 수 있지만 기억하자. 숙소에서 하는 것보다는 덜 불쌍하다는 것을.


나에게 방전된 체력을 충분히 충전하고 덜컹거림 없이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휴가를 꼽으라면, 지어진지 오래되지 않은 제주의 호텔에서 보낸 휴가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성수기가 아닌 6월이었고, 안락한 침대와 수영장이 있었다. 그리고 친구가 있었다. 나는 혼자 조용히 충전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나는 대화가 통하는 친구와 오늘의 새로운 경험과 세상에 대해서 지치지도 않고 떠드는 일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또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 휴가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일이다. 나는 드디어 프리랜서로서, 또 개인의 성향에 맞추어 나의 휴가를 적절히 세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년 여름, 휴가로 다시 한 번 제주도를 선택했다. 시행착오를 거쳐 성공해 본 경험이 나를 자신만만하게 만들었다. 완벽했다. 숙소는 호텔, 제주를 잘 알고 일정짜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함께일 예정이었다. 날씨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내게 최고의 휴가를 선물했던 바로 그 호텔 로비의 아늑한 쇼파에 앉아 웰컴드링크로 나온 한라봉 주스를 마시고 있을 때만 해도,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여행에 동행할 친구는 퇴근 후 비행기를 탈 참이었다. 나는 친구가 도착하기 전에 루프탑 수영장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배영을 할 꿈에 부풀어있었다. 호텔 직원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네기 직전까지는 그랬다.


손님, 예약에 착오가 생기신 것 같아요. 동명의 리조트로 예약이 되어있습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예약문자를 확인했다. 리조트, 2인. ‘이런 예약 실수는 자주 있...’ 정도까지만 들은 채 도망치듯 호텔을 나와 허둥지둥 택시를 타고보니 어느새 리조트 앞이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이 절로 떠오르는 건물 앞에서야 정신이 들었다. 고급스럽고 쾌적한 여행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당연히 있었다. 의외로 방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제주도인데 창밖 경치는 아름답겠지. 아직 모든 걸 망치진 않았으리라는 자그마한 기대를 안고 들어선 객실에서는 노란 장판과 20년은 된 듯한 쇼파가 나를 반겨주었다. 20년 전이고 수학여행이었다고 해도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을 풍경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단 말인가.


[차액 내가 다 낼테니까 다른 게스트하우스로 당장 가자.]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제주 공항에 내린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을 때는 이미 아이용 풀장 가득한 가족 손님들을 확인하고 좌절한 뒤였다. 겨우 이런 숙소의 이런 풀장에 심지어 입장료를 내면서 오려고 마감을 미리하고 겨우 시간을 낸 게 아니었다. 거의 울기 직전인 내 귀에 빅뱅의 ‘에라 모르겠다’가 때려 박힐 때의 기분이란. 온 세상이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여행이 싫었다. 도착할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망쳐버린 휴가 때문에 말할 수 없이 울적해진 나를 위로한 건 친구의 짧은 답장 하나였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간다!]


친구는 도착하자마자 객실의 노란 장판과 5인 이상 투숙을 위해 꼭대기까지 쌓아올려진 옷장 속 침구들을 보고 배를 잡고 웃었다. 웃는 친구를 보며 나도 처음으로 웃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웃겼다. 친구가 말했다. 


“숙소가 별로면 나가서 놀면 되지, 뭐.”


그러니까 나의 휴가에는, 이런 친구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 모든 사연을 담은 SNS에 [너는 그 정도면 제주도 가지 마라]라고 무심하게 댓글을 다는 이상한 방식으로 다정한 친구들이. 언제나 예상치 않은 시트콤 같은 일상에 직면할 때마다 ‘뭐 어떻게 해, 일단 놀아야지’라고 말해주는 친구들. 좋은 호텔과 맛있는 커피만큼이나 내게 중요한 것이다.


나는 이제 내가 그다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휴양으로서의 휴가라면, 친구들과 함께 떠나는게 좋고, 이왕이면 루트는 내가 짜지 않는 걸 선호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내가 나에 대해 좀 더 안다고 해서 세상이 내게 관대한 것은 아니니 나는 아마도 앞으로도 계속 이상한 여행을, 휴가를, 시행착오를 반복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휴가는 계속 떠날 것이다. 어떤 직업을 가진 어떤 상태의 사람이든, 휴가는 필요한 법이니까. 그리고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대체로 추억이 되니까. 아니면 에세이 소재가 되거나. 뭐든 되면 됐다. 


에라, 모르겠다


*메인이미지 출처는 Unsplash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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