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본 글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고
줄거리 및 개인적 감상을 정리한 글입니다.
(작품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콧수염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한 남자의 말이다. 아 물론, 그는 특정 인종을 혐오하거나, ‘싹 쓸어내자.‘고 말하진 않았다. 대신 자신의 시대에 만연했던 비극을 희극의 모습으로 녹여내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 존재와 실존에 대한 문제는 비단 철학자만이 다룰 수 있는 주제는 아니다. 어쩌면 이런 것은 철학의 껍데기를 벗고 시장의 옷을 입었을 때 대중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올지 모른다. 지금 예로든 찰리 채플린에 앞서 이런 작업을 한 사람이 바로 체코 출신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이다. 이 글을 통하여 나는 그의 작품 ‘변신’ 속 이야기와 그가 분명히 꿰뚫고 지적했던 ‘인간소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1912년 11월에 탈고한 이 오래된 작품은 왜 아직도 끈덕지게 살아남은 것일까? 혹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시대를 넘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겉모습이 기괴한 모습으로 바뀐 것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아아, 이 무슨 고된 직업을 나는 택했단 말인가! 날이면 날마다 여행 중이라니.” 하며 고단한 현실에 대해 푸념할 뿐이다. 만약이라도 당신이 그레고르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보라, 출근은 고사하고 바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가 늘어놓는 것은 바뀌어버린 외형이 아니라 회사에 대한 평소의 불만들이었다. 그저 알람을 듣지 못해 회사에 지각할 것만 염려할 뿐이다. 시간이 꽤나 지나간 모양이다. 출근하지 않은 그를 염려하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레고르는 출근 준비를 위해 몸부림친다. 그때 회사에서 ‘지배인’이 찾아온다. 자신이 하루 사이에 못 알아볼 모습으로 변해버렸건만, 그는 그저 부양해야 할 가족 걱정뿐이다. 그레고르는 몇 번의 시도 후 결국 밖으로 나오는 것에 성공하지만, 변해버린 그를 본 가족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출근하지 않은 그를 문책하기 위해 왔던 ‘지배인’은 혼비백산 해 달아나 버린다. 그레고르는 출근은커녕, 아버지의 세찬 발길질에 차여 다시 방 안으로 몰린다. ‘이런 취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레고르는 자신이 가족을 부양하지 못할 것에 대해 불안해한다. 가령 ‘지금 모든 고요, 모든 유복함, 모든 만족이 졸지에 충격으로 끝나버린다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그런 걱정이 자신을 침잠할까 두려워 그는 차라리 몸을 움직여 방 안을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한편 가족들은 ‘식구‘로서의 최소한의 행동을 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누이동생은 매번 그레고르의 방문 앞에 음식을 갖고 놓고, 시간이 지나면 그릇을 다시 치워놓았으며, 변신한 잠자가 불편하지 않도록 가구의 배치를 바꾸어 놓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한번 변신한 겉모습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가족들 역시 ‘변신’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가장 큰 원인은 잠자의 실직으로 인해 점점 부족해져 가는 생활비였을 터다. 아버지는 은행에서, 어머니는 양장점으로부터 바느질을 위탁받아서, 그리고 누이동생은 점원으로 일함으로서 돈을 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가족들은 조금씩 ‘아들’을 ‘벌레’로 여기기 시작한다. ‘변신’한 그레고르와 가족들의 갈등은 잠자 씨가 그레고르의 등 너머로 사과들을 집어던졌을 때, 어머니가 그 아들의 방을 가리키며 “‘저기’ 문 닫아라 그레테야.”하고 차갑게 이야기했을 때 극대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때 쑤시듯 아파왔던 것은 그레고르의 등허리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절정’의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그레고르는 그가 변신한 첫날 아침 그랬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쓰라리게 내동댕이쳐진다. 누이동생이 연주하기 시작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기 그 편에서 누이의 손을 좇고 있었다. 그레고르는 연주에 매료되어 약간 앞으로 나아갈 엄두를 내어 어느새 머리를 거실에 들이밀고 있었다. “잠자 씨!” 가운데 신사가 아버지에게 소리치며, 다음 말을 못 잇고 둘째 손가락으로,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고 있는 그레고르를 가리켰다. 바이올린 소리가 그쳤고, 가운데 하숙인은 처음에는 한 번 머리를 흔들며 자기 친구들을 보고 웃더니 다시 그레고르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그레고르를 몰아내는 대신 하숙인들을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긴 것 같았다. (67, 69페이지) 겉모습은 변했어도, 그레고르는 여전히 누이동생과 그녀의 연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오빠였다. 다만 그 마음이 생계를 위해 들인 하숙인들 앞에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이로 인해 그레고르는 또 한번 방으로 내몰린다. 가족들은 이제 완전히 지쳤다. 그가 끔찍하게 아꼈던 누이동생은 오빠를 ‘괴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월 모시, 한 가정의 든든한 장남으로서 끝까지 가족만을 생각했던 그레고르 잠자는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오래전부터 이미 죽었던 것은 아닐까? 적어도, 잠자 씨와 잠자 부인의 아들, 그리고 그레테 잠자의 오빠였던 그레고르 잠자는 말이다. ‘이게 영 뒈저버린 일‘ 이후, 그들이 바라고 있었던 일들은 마치 뻥 뚫린 하수구로 물이 빠져나가듯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이야기의 끝은 시작만큼이나 기묘하다. 세 사람은 그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 그렇게 ‘벌레’가 되어버린 ‘장남’은 가족들에게서 철저히 잊혔다. 지금까지의 살펴본 ‘변신’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남자가 어느 아침 벌레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게 되었다.
가족들은 처음엔 그를 도우며 마음을 썼지만,
결국 남자는 골칫거리가 된다.
‘벌레가 된 남자’는 어느 아침 죽은 채로 발견되고,
나머지 세 사람은 다른 곳으로 떠난다. 사실 ‘변신‘에서 중요한 것은 ‘벌레가 된 이유‘나 ‘어떤 벌레가 되었느냐’에 있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적어도 이런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이라도 제공했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오히려 한 남자의 죽음에 초점을 두고 다음과 같이 질문해본다. 누가 그레고르 잠자를 죽였나? 혹시 당신은 누군가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가? 만약 그 사람이 장애를 입거나, 혹은 나이가 들어 볼품이 없어진다고 가정해보자. 비록 카프카의 ‘변신’에서처럼 벌레의 형상으로 그 사람이 변하진 않았더라도, 그레고르의 가족들처럼 그를 자연스레 하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지 모를 일이다. 장 폴 사르트트의 말로서 표현하자면, 이것은 ‘본질이 실존을 앞서는 일’이다. 사르트르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고 말했다. 무슨 뜻일까? 마이크가 먼저 존재하고, 이것을 누군가가 소리를 증폭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아니다. 소리를 증폭시키고자 하는 필요에 따라 마이크가 제작된 것이다. 이렇듯 모든 사물은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문제는 본질의 의미가 상실되었을 때 일어난다. 만약 마이크가 고장 나면, 이것은 그 가격과 이전의 성능과는 무관하게 본질적 기능을 잃는다. 존재 가치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동등한 기준을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없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가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여기 한 어머니와 아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머니는 아이가 아무 이유 없이 울거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미워하지 않는다. 어머니에게 이 아이는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다. 그런데, 이런 순서가 산업 혁명을 거치며 전복되었다. 인간이 존재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본질로서 평가받게 되면서 ‘인간소외‘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업무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어제까지 성실히 일했던 누군가가 대체되는 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카프카의 ‘변신’ 속 그레고르 잠자는 이러한 ‘인간소외‘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평생을 가족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벌레’로 변했다는 것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 가족들에게 버림 당하고, 대체된다. 심지어 그가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사실 그레고르를 소외시키고, 죽인 것은 가족들뿐이 아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생각과 말을 다시 한번 살펴보길 바란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가족을 부양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었으며, 갑자기 원인도 모르고 변해버린 자신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 조차 자신을 ‘본질로서’ 대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레고르는 가족들에 의해, 자신에 의해, 그리고 결국 거대한 사회 구조로부터 살해당한 것이다. 카프카는 그의 작품을 통해 그 당시 만연했던 ‘인간소외’에 대해 지적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더욱 심화되어 사회뿐 아니라 가족 안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오늘도 카프카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지 모른다. ‘누가 그레고르 잠자를 죽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