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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문 Nov 27. 2021

아내 생일 선물 뭐하지?

결혼 15년 차 남편의 아내 생일에 대한 고찰

오랜만에 출장길에 올랐다.

쭉 뻗은 고속도로 위, 이른 아침 햇살이 정면에서 눈을 부시게 한다.


사실 집을 떠나는 나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집안일과 아이들 교육, 회사가 있는 도시를 잠시 탈출하는 '야호' 이런 느낌?



아침 요가를 통해 가까스로 공백을 만든 내 머릿속에 초대하지 않은 생각들이 하나둘씩 들어와 자리를 차지한다.

'이 생각들만이라도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


문득 아내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올해는 어떤 선물을 줘야 하지?'라고 생각과 동시에 이제껏 내가 무슨 선물을 해줬었는지를 떠올렸다.


결혼 10주년 때는 신혼여행지 하와이에 다시 데리고 가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하지만 여러 형편상 그러지 못했다.


몇 해전에는 해외 출장이 잡혀서 생일 당일을 함께 하지 못했었다.

생각해보니 해외 파견을 갔던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 기획재정부 장관은 아내라는 핑계로,

회사 일이 바쁘다 핑계로,

운전하며 당장 떠오르는 기억에 남는 생일 선물은.. 딱히 없었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빈번한 출장과 항상 우선이었던 회사일

나는 그렇게 아내에게 많은 실망감을 안겨주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새록새록 나의 기억에 남는 선물은 있었다.

그나마 작년에 했던 선물이 기발했던 것 같다.


"구글 주식"

Google 주식은 1년 만에 64%(1,100불) 상승이라는 엄청난 신기루를 발휘했다.


그러나 아내의 기억을 사로잡았던 선물을 따로 있었다.

얼마 전 집안 정리를 하던 아내가 책꽂이에서 뭔가를 꺼내와 펼쳤다.

"이거 봐봐"


내 집 마련/자녀교육/내조 3개 부분 최우수
"위 사람은 투철한 절약정신을 바탕으로 이사 및 내 집 마련에 기여한 공이 크고
초등학생 자녀교육에 열과 성의를 다했으며,
남편의 진급까지 내조가 충실하여 타의 모범이 되므로 이에 표창합니다."

그리고 생일 선물은 아니지만,

부부의 날 선물한 마켓*리 튤립 5송이도 꽤 반응이 좋았던 것 같다.

아내가 온갖 SNS 대문에 도배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와서 말인데, 그때도 먹지도 못하는 걸 샀다고 아내에게 혼날까 봐

수박 1통을 살까 꽃을 주문할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이런저런 아내 생일 선물 생각에 내가 기분이 좋아졌다.

선물을 받는 순간 좋아할 사람은 아내였지만, 선물을 고민하며 행복해하는 사람은 나였다.


산을 좋아하면 산이 좋나요 내가 좋나요?
그럼 어떠 사람을 싫어하면 그 사람이 안 좋은가요 내 마음이 불편한가요?  『법륜 스님』


괜스레 나에게 행복감을 주는 아내에게 더욱 고마웠다.


올해는 아내가 좋아하는 스타벅스 텀블러에 용돈을 담아볼까?
아니면,
아이들과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줄까?


물론 아내가 따발총 같은 잔소리를 난사하면 다시금 정신이 들겠지?




결혼 후 십 년이 훌쩍 지난 아내의 생일들, 그리고 가족들의 생일 사진을 되돌아보았다.


엄마 생일 선물을 준비한다면서 아이들과 생전 처음 만들어보는 마카롱을 만들었을 때도

캘리그래피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다 같이 엄마에게 줄 캘리그래피를 그렸을 때도 있었다.


다 지나서 되돌아보니, 물질적인 선물보다는 그 순간 가족을 생각하며 준비했던 추억이 소중했다.


우리 가족도 늘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족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화남 등의 감정이 있었다.


내가 힘들어하던 시절도 있었고, 아내가 힘들어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짐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순간 함께 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같이 살 수 없는 수만 가지 이유를 찾지 않고, 마찬가지로 같이 살고 싶은 단 한 가지 이유도 찾지 않았다.


문득 책장을 넘기다가 발견한 톨스토이 형님의 말씀을 곱씹어 보게 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사정이 다르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늘 그렇듯 우리 부부는 우리 가족은 드라마를 찍어 나간다. 그 드라마는 때로는 막장 드라마가 될 때도, 코믹이 될 때도 있다.


주인공이자 공동감독으로 내가 바라는 그 드라마는 개성 있는 출연진들이 저마다 건강하게 자기 역할을 소화해내기를 바랄 뿐이다.


중요한 사실은 아내의 생일은 아직 지나지 않았고 나는 아직도 선물을 고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른한 토요일 오후 아내가 미용실에 간 사이 선물에 대한 고찰을 긴 장문의 글로 남겨본다.


감사합니다. 그대가 있어서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무조건 사랑하고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쁜 길을 가지 않는데요.
무한 사랑과 신뢰 먼저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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