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용증을 써주고 음악을 시작하다

1996년. 19세. 음악 언저리에서 지분대다.

by tearliner

내 음악 경력은 친구들에게 ‘삥 뜯으면서’, 순화해서 표현하자면 갈취하면서 시작됐다. 녀석들의 코 묻은 돈이 아니었다면, 내 음악인생은 훨씬 늦게야 수영 배우듯 허우적허우적 시작했거나, 아예 뮤지션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치부를 풀어낸다.


1996년에 나는 미래가 흐릿하고 아득했던 열아홉, 언제 폭발할지 모를 고 3이었다. 그해 초에 가수 서지원과 김광석이 유명을 달리했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했으며, 전두환이 반란·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굵직한 사건사고가 부잣집 친구놈 도시락 단골 메뉴였던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이어졌다. IMF가 있기 1년 전이라 호황이 극에 달했던 경제는 세상의 시간을 현기증 날 만큼 빠르고 다채롭게 돌려대고 있었다. 사회는 역동적이었지만, 세상이야 어떻든 열아홉 고 3 학생들에게는 역대 최악의 난이도 조절 실패로 악명 높은 '97학년도 수능의 늪에 숨 막혔던 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내게 1996년은 사건사고나 수능을 망친 악몽보다는 처음 음악을 시작한 해로 각인된다. 어느 정도는 뮤지션이 되고 나서야 부여되고 찬란하게 치장된 의미긴 하지만, 어차피 모든 역사는 후세에 의해 취사되어 경중이 매겨지는 법이니까.


음악을 듣기만 하던 록키드가 DIY(Do It Yourself)로 록밴드를 한답시고 악기를 구매한 계기는 함께 농구를 하다 알게 된 동네 형과의 수다였다. 한 게임을 마치고 쉬던 중에 공통적으로 록밴드 너바나Nirvana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형은 너바나 카피밴드에서 리더를 맡고 있다고 했다. 농구도 나보다 못하면서 머리밴드를 해서 긴 머리를 고정하고, 흰색 나이키 농구화를 신고 있던 형이 그 순간 갑자기 멋져 보였던 기억이 하도 강렬하게 남아서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 언제 연주하는 거 함 보여주세요, 형. 살믄서 공연 함도 못 봤그등요.(살면서 공연 한 번도 못 봤거든요.)

- 그래? 그라믄 은제 겜 뛰고 내캉 합주실 함 가자, 보여주꼬마.(그러면 언제 농구 끝나고 나와 합주실 한 번 가자, 보여줄게.)

- 진짜요? 넘 좋죠. 내도 진짜 밴드 하고 싶었그등요.

- 마 하고 싶으믄 하믄 되지, 그기 뭐라꼬. 우리 팀 들으온나.(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그게 뭐라고. 우리 밴드 들어와라.)


심장 멎는 줄 알았다.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없다고 하자, 괜찮으니까 뭐라도 악기를 구해서 빨리 배우라고 했다. 베이스가 배우기 쉽고 마침 멤버를 구하는 중이니 베이스 배우는 게 어떻겠냐고 포지션까지 조언해 줬다. 어릴 적 피아노 배울 기회를 놓친 게 한숨이 날 정도로 후회됐다. 화성학은커녕 악보도 읽을 줄 몰랐지만, 그 순간에는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베이스가 뭔지, 어떤 소리가 나는지도 몰랐으면서 너바나 곡의 베이스 연주 정도는 연습하면 어떻게든 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커트 코베인 옆에서 맨발로 연주하던 그 키다리 베이시스트도 그다지 똑똑해 보이지 않던 걸, 나처럼.


- 예예, 후딱 베이스 배울게예. 새로 구하지 마고 내 꼭 껴주세요, 형.(예, 베이스 금방 배울게요. 새로 구하지 말고 나를 멤버로 꼭 받아주세요, 형.)


‘유주얼 서스펙트'급 반전을 미리 터뜨리자니 아쉽지만, 사실 호기롭게 베이시스트로 받아줬던 동네 형은 보컬 경험도 없었고, 결성된 밴드도 없었다. 동갑내기 친구와 농담 삼아 ‘니 드럼 치라, 내 노래할꼬마.’ 비슷한 뜬구름 잡는 록그룹 결성 얘기는 나눴던 모양이지만, 둘 다 연주할 수 있는 악기도, 밴드 경험도, 음악 활동에 대한 어떤 계획도 없었다.


계약서

이름 ㅇㅇㅇ

금액 ㅇㅇㅇ원

본인 박성훈은 가수로 성공하면 친구 ㅇㅇㅇ에게 투자금의 열 배 비용을 지불할 것을 약속합니다.

- 1996년 ㅇ월ㅇ일


밴드에 들어가려면 어떻게든 서둘러 베이스가 있어야 했다. 통기타가 있는 친구에게 베이스는 얼마나 하는지 물어보고 ‘내 우째 아노, 씨바라. 일렉 베이스믄 10만 원은 넘긌지, 인마.’라는 답을 들은 나는 가격에 절망하는 대신 자금을 급조할 아이디어를 짜냈다. 내가 삥을 뜯는, 아니 투자를 받는 방식은 나름 자본주의 시스템의 신뢰성을 모방한 것이었다. 내게 얼마든 투자금을 건네면 빌려준 이의 이름과 액수를 명기하고, 추후 가수로 성공하면 투자금의 열 배를 보상한다는 차용증을 작성해서 손도장까지 찍어 줬다. 당시에는 차용증이라는 단어를 몰랐는지 큰 글씨로 ‘계약서'라고 적고, 누구도 도장이나 그럴듯한 싸인이 없어서 손도장을 찍긴 했지만, 이 종이쪼가리는 의외로 효과가 있어서 하루에 다섯 장을 써준 적도 있을 정도였다. 친분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매점에서 빵 사 먹을 동전을 건넨 친구도 있었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친구도 재미나 호기심에, 혹은 내기한다는 생각으로 푼돈을 내고 차용증을 받아갔다.


니 인마, 내 못 믿나?(너, 나 못 믿니?)

수학여행에서는커녕 교실에서 앞에 나서거나 콧노래 한 번 흥얼거린 적 없는 나 같은 범생이를 믿을 수 있을 리 없다. 서둘러 베이스를 구해 연습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친분을 가리지 않고 투자를 권유했다. 삥이니 갈취니 하는 자극적 표현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긴 했지만 (부모의 니즈needs에 맞춰 적당히 착한 척 존재감 없던)범생이라 차라리 ‘구걸’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심부름을 해주기도 했고, 심지어 무릎을 꿇기도 했다. 눈물 나도록 고맙던 자비로운 한 친구는 2,000원을 건네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100-500원 정도를 적선, 아니 투자했다. 그러고도 차용증을 받아갔다.


학생 이거 거저 가져가는 거야.

이렇게 모은 돈에 더해 문제집이나 미술도구를 사야 한다는 거짓말로 엄마에게 받았던 비자금, 미팅하면 술값에 보태려고 숨겨뒀던 비상금까지 탈탈 털어 모아서 베이스를 사러 나섰다. 특별히 가지고 싶어 눈여겨보았던 베이스 메이커나 모델 따위는 없었다. 20대까지는 사전에 자세히 알아보고 매사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편이었지만, 당시 음악의 불모지였던 경상도 창원의 고등학생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전무했기에 베이스 가격대도, 무슨 종류가 있고 어떻게 다른지도 알지 못했다. 가져간 비용에 맞추다 보니 베이스 소리를 비교해 들어보거나 딱히 선택을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전재산 13만 원을 내고 가게에서 가장 저렴한 베이스와 소리를 낼 조그만 베이스 앰프, 케이블을 받았다. 베이스 헤드에 은장으로 새겨져 빛나던 VESTER라는 메이커를 나는 아직 기억한다. 악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 안아본 유광의 상아색(이라기보다는 누리끼리한) 국산 베이스는 거대하고 무겁고, 하여튼 존재감이 엄청났다. 들고 있던 시간에 비례해 한없이 무거워지는 베이스와 앰프를 끙끙대며 버스를 타고 들어오는 내내 이상하게 몸은 30센티 정도 둥둥 공중에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벌써 뮤지션이라도 된 듯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다. 조만간 엄청난 뮤지션이 될 것만 같은 꿈에 부풀었다. 비록 이후 얼마 지나지도 않아 중고로 팔아 버렸지만.


얘가 우리 아지트다, 승지, 승지.(여기가 우리 아지트다, 성지, 성지.)

삥 뜯은, 아니 어렵게 모은 돈으로 베이스를 손에 넣었지만 고 3 아들을 둔 부모님의 서슬이 시퍼렇다 못해 검푸른 기운이 피어오르던 집에 가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첫날부터 동네 형이 ‘합주실'이라고 칭하던 지하 창고에 뒀다. 창고에는 합주 장비나 악기, 스피커 대신 먼지가 잔뜩 앉은 종이 박스들이 두서없이 쌓여있었고, 한가운데 값싼 플라스틱 의자가 서너 개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랬다, 그 창고에 음악과 관련이 있다고 할 만한 건 술에 취해 다 같이 부르던 들어주기 힘든 술주정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악기는 내 베이스뿐이었고, 앰프나 믹서는커녕 마이크도 하나 없었다. 그 흔한 카세트 플레이어나 라디오도 없었다니까. 하지만 우리나라를 뒤흔들 록의 전설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동네 형의 건배사는 꿀처럼 달았고 청산유수였다. 나는 속은 줄도 모르고 거의 매일 수업을 마치자마자 창고로 달려갔다. 서울대 많이 보내기에 혈안이었던 비평준화 고등학교였던 터라 야자(야간 자율학습)가 밤 11시까지였지만 학원에 다니는 경우 시간에 맞춰 먼저 나갈 수 있었기에 학원을 핑계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창고에서 베이스를 꺼내 연습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드럼 세트를 구해 온다면서 연애하는 데 다 써버리느라 끝내 드럼 스틱 한 번 들어보지 않은 동네 형의 친구를 포함(그래도 함께 노래를 부를 때면 발과 손뼉으로 박자는 잘 맞췄다...) 서넛이 모여 술을 마시며 시답잖은 연애 얘기를 주고받거나 만화책을 돌려 읽거나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의 낮은 농구대에서 야간 농구를 했다.

베이스에 먼지가 쌓였고, 수능일은 코앞까지 닥쳤다. 다시 언급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최악의 수능성적을 앞둔 고 3이었다. 동네 형과 두 달 남짓 어울렸지만 점점 창고로 향하는 날이 줄어들다가, 결국 가지 않게 되었다. 밴드명도, 만든 창작곡도 없고, 관객 앞에서의 공연은커녕 제대로 된 합주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수능 시험을 치른 후 경기도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위해 창원을 떠났다. 연습에만 사용했던 베이스는 떠나면서 미련 없이 팔아버렸다. 고향을 떠난 이후 다시는 동네 형과 연락하지 못했다. 연락처도 모른 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게 이상해 보이겠지만, 학생이라 삐삐도 없던 시절이었다. 2004년부터 대구, 홍대에서 인디밴드로 활동하며 경상도 출신 밴드나 뮤지션을 만나면 혹시나 싶어 그를 아는지 묻거나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기도 했지만 도통 찾을 수 없었다. 창고 앞 층계를 다 내려가기도 전에 큰 소리로 반갑게 맞아주고, 내가 먼저 창고에 있으면 곧 손을 흔들며 언제나 웃는 표정으로 내게 구수한 쌍욕을 퍼부으며 들어오던 형.


차용증 없으면 보상금 못 받는다, 곰탱.

글을 쓰다 문득 궁금해져서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닌(녀석이 서울대를 가는 바람에 대학은 달랐다, 배신자 녀석.) 불알친구에게 연락해 당시 내가 줬던 차용증 종이를 혹시 아직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중학생 때부터 썼던 ‘곰탱’이라는 별명으로 부르며, 여전히 격 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다. 만약 차용증을 가지고 있다면, 내 음악의 시작을 증명할 추억거리로 이보다 좋은 보물이 없기에 번거롭더라도 꼭 찾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차용증 있어도 내가 성공 못 해서 돈은 못 준다, 곰탱.

이렇든 저렇든 주지 않겠다는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지만, 성공할 때까지 차용증을 주지 않은 채 품고 있을 수도 있으니 이 농담은 하지 말 걸 그랬다. 돌아온 답은 아쉽게도 ‘찾아봤지만 없다!’였다.

이 친구가 변덕이 죽 끓는 듯해도 내가 곰탱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무렵 미션 임파서블인 내 '성공한 뮤지션' 도전에 이 녀석만 무려 2만 원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학년이 올라 반이 나뉘었어도 점심, 저녁을 함께 먹을 정도로 친하긴 했지만, 90년대 고등학생에게 2만 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으며, 녀석의 집안 사정도 여유롭지 않았기에 내게는 고마움을 넘어 적잖은 충격이었다. 곰탱은 어쩌면 어리바리한 척하는 내 어딘가에서 천재적 음악 재능을 알아챘던 것일까.(아님)

차용증을 보여주고 열 배 보상금을 받아간 친구는 아직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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