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하니, 그 시간까지 버텨야 한다.

by shadow 모과

일기를 자주 쓰진 않지만, 한 달에 한 번은 기록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다이어리에 짧게 기록하다가 약 5년 전부터는 구글 파일에 일기 폴더를 만들고 연도와 날짜를 제목으로 문서를 만들어 기록했다. 단 한 달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데, 22년 2월 폴더다. 그 당시의 유일한 기록은 연습장에 적힌 날짜와 영화, 드라마 제목들이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OTT로 봤던 작품들이다. 앞으로 내 이야기를 어떻게 써나가야 해야 할지 몰라서, 더 이상 내 이야기가 궁금하지도, 기대도 되지 않아서 수많은 이야기를 봤다. 한동안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난 후에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렸다. 그전에는 인문 사회책만 읽었는데, 이때는 소설책만 읽었다.


바쁠 때는 여유가 없어 못 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시간이 생기면 해야지 했던 것들이 있었다. 관련된 책 읽기, 운전면허 따고 연수받기, 뉴스와 신문 보기, 어학 공부 등. 왜 진작 준비하지 않았을까? 스스로를 한심해하던 일들이었다. 시간이 많이 생겼지만, 전혀 하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자전거를 배우고 수영을 배웠다. 대다수의 사람이 어릴 때 배우는 것들을 아직까지 배우지 못했기에 평생 배우지 않을 줄 알았던 일들이었다. ‘지금까지 못 해도 잘 살았으니까, 앞으로도 할 일 없게 하면 되지.’라는 생각이었는데, 뜬금없이 자전거와 수영을 배우러 갔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나아가는 감각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같이 ‘젊은 사람’들은 빨리 배운다는데, 물을 무서워하는 나는 머리를 물에 담그는 게 두려워 물에 뜨는 것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딱히 조급해하지 않았다. 예상하던 일이었다. 내 몸에 대한 데이터가 있기 때문이다. 조급함은 강사들의 몫이었다. 젊은 사람이 왜 그래?라고 하기도 하고 한 강사는 “이럴 거면 수영을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예전이라면 의기소침해질 만한 발언이었지만 더는 기죽지 않는다. 그저 어이가 없었다. 네가 뭔데. 내가 선수 한다는 것도 아니고. 못하는 게 답답하면 당신이 초급반 가르치지 말고, 선수 코치를 하시던가. 천천히 배우면 되지. 남들 3달 걸리면 나는 8개월쯤 걸려도 상관없는데. 나는 이제 시간이 많아요.

“그냥 물장구치러 간다고 생각하면 돼. 시간 지나면 다 익숙해지게 되어있어.” 수영을 시작할 때 한 아주머니가 해주신 말이다. 시간이 지나자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 공포가 어느새 흐려졌다. 시간이 쌓여야 한다. 내가 할 일은 그 시간을 버텨내는 것이다.


해야 할 것은 많았지만, 하기가 싫었고, 아무것도 안 하기엔 불안해서 할만한 일을 찾아 기웃거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내 삶의 우선순위가 박살이 났으니, 무엇을 하든 상관없었다. 구글 캘린더의 비어 있는 시간에 네모 박스를 채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다른 지역에서 지역살이했다. 1주, 2주, 1달.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낯선 곳에서 살았다. 무기력한 일상에서 탈출해 끝이 정해진 신선한 일상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다른 지역으로 다른 삶을 견학하러 갔다. 세상은 넓지만 동시에 좁았다. 몰랐던 삶들을 알게 되었지만, 살던 대로 살다 보면 결국은 과거와 마주치게 되어있고, 사람들이 모이면 비슷한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뭘 했다고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대로인 것 같다가도 시간이 나의 감정을 쓸어 가버렸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감당이 되지 않아 외면하려 했던 감정들이 어느새 흐려져 아쉬운 마음마저 든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그러나 그 시간까지 버티는 것은 내 몫이다. 끝이 보이지 않아 영원할 것 같아도 시간은 흐른다. 마냥 기다리기는 힘드니 적극적으로 시간을 채워가고, 시간을 죽이기도 하고 마구 흘려보내다가 아쉬워서 붙잡아 보기도 하고 힘들어서 놓아버리는 행동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있다. 버둥거리며 그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 스스로에게 물었다. 언제 내 삶이 시작될까? 이제는 안다. 그 모든 순간이 삶이라는 것을.

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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