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조용히 물들 때

01. 여름 낭만집

by 영영

고1 내내, 우리는 네 명이 함께 다녔다.

수희와 나는, 지혜와 정미는.

굳이 나누진 않았지만, 어느새 옆에 서는 사람이 정해졌고

말은 돌고 돌았지만 결국

그 여름까지, 우리는 큰 변동 없는 ‘친구’였다.


나는 수희 옆에,

지혜는 정미 옆에.

창가와 복도 쪽, 뒷자리와 뒷자리.

자리의 질서는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도 별 말 없이 유지됐다.


그러다 그해 여름,

햇빛이 벽을 미끄러지듯 흐르던 무렵부터

나는 이상한 열에 시달렸다.


책상 위로 쏟아진 햇살이 손등에 달라붙는 것 같았고,

옷깃을 벌려도 끈적한 열기는 잘 빠져나가지 않았다.

그 열기 속에서

나는 자꾸만

지혜를 보았다.


그 애가 웃을 때마다 뺨이 붉어지고,

햇빛에 이마가 번들거릴 때마다

나는 그 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보는 건 바라보는 게 되고,

바라보는 건 어느새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그때까진 몰랐다.

사랑이란 게 그렇게 조용히,

습기처럼 달라붙는 거라는 걸.


-


지혜가 내 팔에 손을 댄 건 체육시간이 끝난 복도였다.

말없이 내 팔꿈치를 톡 건드리며 말했다.

“여기, 땀났어.”


그녀의 손끝이 내 피부에 닿은 순간,

나는 그 온도를 잊지 못했다.

부드러웠고, 뜨거웠다.

그 열이 내가 가진 열과 다르지 않다는 게

그때는 이상하게 겁이 났다.


나는 그 후로 지혜를 피했다.

눈이 마주치면 먼저 고개를 돌렸고

그녀가 들어오기 전에 체육복을 갈아입었고

그녀가 웃을 때, 나는 웃는 척을 했다.

감정을 자꾸만

몸으로 숨기려 했다.

그게 숨는다고

정말 사라지는 줄 알았다.


-


편의점 앞, 수희가 조용히 말했다.

“너 요즘 좀 이상해.”

나는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여름이라서 그래. 더운 거지 뭐.”


수희는 더 묻지 않았다.

그 여름, 수희의 말없음은

내가 숨을 수 있게 해주는 그늘 같았다.


-


그날 오후, 교실엔 우리 둘만 남았다.

지혜는 창문 옆에서 가방을 정리하고 있었고

나는 공책 끝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덜컥, 가방 지퍼가 열리는 소리.

그 사이로 느린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빛에 물든 목덜미,

내 시선이 멈춘 건,

그 애의 옆얼굴이었다.


지혜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능소화, 알아?”


질문은 가벼웠지만,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혜는 다시 말했다.

“나는 그 꽃 좋아해.

아래로 피잖아. 주황색에, 좀 길쭉하고…

되게 조용하게 피는 거.”


그녀의 시선이 능소화를 가리킨 것도 아닌데

나는 순간, 창밖을 바라보았다.

벽을 타고 피어 있는 주황빛.

햇빛에 고개를 숙인 채 흔들리고 있는 능소화.


그제야 그녀가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너, 능소화 닮았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 안쪽이 바싹 말라 있었고

심장은 내가 알던 자리에 없었다.

그 말이 장난인지, 진심인지 묻고 싶었지만

입안에 맴돌던 그 질문은

결국 목 뒤까지 밀려오다 멈췄다.

그걸 말로 꺼내는 순간,

이 감정도 이름을 가지게 될까 봐.


나는 그냥,

그 말 앞에 멈췄다.

그녀는 아무 표정 없이,

그 말 한 마디만 남기고 걸어나갔다.

-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정미는 먼저 돌아가고

수희는 반대편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거리,

그 아래에 지혜와 나만 남았다.


나는 셔츠 소매를 걷었다.

지혜는 햇빛이 기울기 시작한 쪽에 서 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눈썹을 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흘러내렸다.


나는 망설였다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천천히,

그 애의 이마에 닿기까지

몇 번이나 속으로 손을 거뒀다.


손끝이 닿자,

지혜의 피부는 조금 차가웠고

그 아래로

느릿하게 뛰는 맥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땀방울을 따라

손끝을 움직이며

눈 아래를 닦았고,

그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의 코로,

입술로 흘러내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그 입술을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들킨 기분이었다.

아니, 이미 들킨 사람처럼 조용해졌다.


입술에서 멀어지려던 시선은

머리카락 끝에 닿았다.

젖은 듯 흐른 가닥이

어깨를 따라 흔들렸고,

그 곡선을 따라

내 감정도 천천히

벗겨지고 있었다.


그건 땀을 닦아주는 일이 아니라

사랑을 건드리는 일이었고,

나는 그걸 알면서도

손을 내리지 못했다.


지혜가 고개를 돌렸다.

벽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여전히 능소화가

빛을 먹으며 피어 있었다.


잠시 후,

지혜가 말했다.

목소리는 햇빛에 반사되어

맑게 들렸다.


“능소화는… 진짜 예쁘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그 순간,

여름이 조용히

내 안 어딘가에 접히는 소리를

나는 들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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