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여름 낭만집
가희는 여름 같았다.
물비린내 섞인 오후 햇살 아래에서도
주춤거리지 않았고,
땀이 등을 적셔도
오히려 그 젖은 셔츠를 흔들며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는 그 움직임 하나로,
세상의 답답함을 밀어내듯.
나는 그런 가희를 오래 바라봤다.
곁에 있는 시간보다
그 애를 멀찍이서 관찰한 시간이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가희는 늘 앞장서 있었고
나는 그 그림자를 따라 걷고 있었다.
-
그 여름,
가희는 누군가를 만났다.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그녀의 말이 조금씩 줄었고
웃음은 가끔 늦게 도착했다.
말을 꺼내기 전 입을 한 번 더 다물고
무언가를 말할 듯하다가 삼키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나는 처음엔 그 변화가
단순한 피로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희는 스스로의 여름을 덮으려 애쓰는 듯했다.
셔츠 색이 옅어졌고,
헤어끈을 두 번 감아 묶던 손길이
이젠 한 번만 툭—
느슨했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그 애가 바람을 기다리지 않게 된다는 점이었다.
예전엔 그랬다.
창가에 앉아 있을 때
가희는 문득 고개를 들어 바람의 방향을 찾았다.
오늘은 어디로 불어오는지,
그 작은 움직임이
그 애를 여름답게 만들었다.
그런데 요즘,
가희는 바람을 찾지 않았다.
그늘 쪽으로 앉고,
햇빛이 닿지 않는 쪽으로 말을 돌렸다.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지만,
그 웃음은 마치
누가 그려놓은 듯 고정된 윤곽선을 닮아 있었다.
-
우리는 그날, 편의점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일몰이 아직 닿지 않은 시간,
하늘은 탁했고
얼음은 딸각거리며 부서졌다.
가희는 컵을 들고 있다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뚜껑을 닫았다.
“나 요즘 좀 그래.”
그녀가 말했다.
그 말은 구체적이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가희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플라스틱 뚜껑 위 물방울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조금 전에 바른 립스틱 자국이
컵 가장자리에서 벗겨지고 있었다.
“왜?”
나는 묻고 싶었다.
왜 네가 여름을 미뤄둔 채
그늘로 향하고 있는지.
하지만 내 입에서는
짧은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가희가 말했다.
“근데 그 사람은 내가 좀 조용했으면 했고,
말수 적고,
사려 깊고,
조금 차가웠으면 좋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나랑 좀 다르게.”
그녀는 컵을 내려두었다.
얼음은 거의 다 녹아 있었다.
빛이 컵 안 물 위에 맺혔다.
“그래서 조용해지려 했어.
말도 줄이고,
머리도 묶고,
좀 덜 웃고.”
그녀가 말했다.
“근데,
내가 자꾸 겨울 같아졌어.”
그 말에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 여름, 가장 여름 같던 사람이
자신을 겨울로 이식하려 애썼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때,
나는 컵을 들어 손에 쥐었다.
차가운 물이 손등을 흘렀다.
그대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희야.”
나는 말했다.
“여름은…
굳이 겨울을 흉내 내지 않아도
그 계절로써 충분해.”
그 말은
조금 오래 걸려 가희에게 닿은 것 같았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는 어딘가 엷게 젖어 있었다.
빛이 들어가기 직전의 새벽같이,
고요하고
조금 아팠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가희가 다시 여름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느꼈다.
태양이 아니라
햇빛이 천천히 벽을 타고 흐르듯
조용히,
서서히.
-
며칠 뒤,
그녀는 다시 웃었다.
예전처럼,
입꼬리의 방향이 정직했다.
햇빛 아래서 웃는 그 애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 이건
그 여름을 닮은 사람이다.
땀이 마르기 전에,
그 웃음은 진짜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