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여름 낭만집
빙수 위에 떨어진 햇빛이 참 견고하다 싶었다.
그릇의 금속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따금씩 눈을 흩뜨리듯 튕겨냈고,
나는 그 흩어지는 빛 사이로 숟가락을 밀어 넣었다.
얼음은 생각보다 잘 깎였고,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물컹, 부서지듯 사라졌다.
이렇게나 쉽게 녹는 것인데
사람들은 왜 빙수를 ‘시작’이라 부르지 않는 걸까.
달콤한 시럽에 젖은 얼음이 목젖을 스치면
나는 자주 한 계절을 통째로 삼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목 안에서 여름이 미끄러져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밖은 여전히 덥고
하늘은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푸르고
그 사이에서 나는 지금
빙수를 먹고 있었다.
빙수라는 것이 꼭 여름을 닮았다.
금세 녹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녹는 걸 기다리는 음식.
처음엔 입천장을 얼게 만들 정도로 차갑다가
조금씩 자신의 온도를 잃어가며
투명한 물로 변해가는 음식.
얼음이 시럽을 머금고
팥이 우유 속에 스며들고
그 모든 것이 입 안에서 모여 하나의 감촉이 되는 순간,
나는 어쩌면 이 계절도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너무 천천히 사라진 것들이겠다.
금방 녹고
금방 사라지고
그래서 아무 말도 남기지 않는 것들은
기억이라 부를 수 없다는 듯이.
빙수를 다 먹을 무렵이면
접시 바닥엔 반쯤 녹은 여름이 고여 있었다.
그건 처음의 얼음이 아니었고,
처음의 단맛도 아니었지만,
가장 오래 남는 감촉이었다.
나는 그것을
혓바닥으로,
입술 안쪽으로,
목구멍의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옮겨가며 삼켰다.
여름이란,
대개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내 안 어딘가엔
차가움의 껍질 아래
말 못 할 이야기 하나쯤
조용히 녹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