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유령

14. 여름 낭만집

by 영영

여름 유령은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지 않았다.

햇살에 젖은 셔츠 자락이었고,

지하철 환승 구간의 텁텁한 공기였고,

그해 여름, 나는 끝내 꺼내지 못한 말 한 줄이었다.


나는 그 말을 잊은 줄 알았고,

그 계절을 무사히 넘긴 줄 알았고,

그 사람을 완전히 보낸 줄도 알았다.

하지만 여름이라는 계절엔,

항상 어디쯤 눅눅하게 남는 것들이 있었다.

잊은 줄 알았던 냄새,

끝난 줄 알았던 마음,

말하지 않아도 아는 기척 같은 것들.


누군가는 그것을 미련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후회라고 했지만

나는 그냥 여름의 공기라고 불렀다.

귓가에 바람이 닿는 그 짧은 순간처럼,

갑자기 익은 복숭아처럼 달고 무른 감정.

도망치기엔 너무 향기로웠고,

붙잡기엔 너무 금방 사라지는 것.


그렇게 여름은 또 왔고,

나는 다시 그 유령을 만났다.

자전거 바퀴에 물방울 튀던 골목 어귀에서,

편의점 셔터가 절반쯤 열린 새벽,

그리고 수박 껍질 같은 하늘 아래,

괜히 천천히 걷게 되는 오후의 길목에서.


유령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었고,

나 역시 이번에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우린 서로를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머문 채,

오래전 여름의 체온을 떠올렸다.


숨결은 닿지 않았고, 손끝도 머뭇거렸지만

마음만은 조금씩, 젖은 쪽으로 기울었다.


눅눅했지만, 나는 그 유령을 안았다.

말보다 감정이 먼저 닿았고,

기억보다 온기가 먼저 스며들었다.


젖은 바람 사이로

우리 둘은 조용히 무너졌다.

마치 오래 쓰다 만 엽서처럼,

펼쳐지지도, 완전히 지워지지도 않은 채,

그저 그렇게 서로에게 닿은 채.


그리고 이상하게,

조금은 괜찮아졌다.

완전히 마르지 않아도,

조금쯤 눅눅해도,

여름은 그렇게, 낭만처럼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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