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13. 여름 낭만집

by 영영

비가 내리면, 세상이 숨을 멈춘다.

잠시 멎은 숨결 사이로 색이 스며든다.

평범하던 회색 건물들은 잉크를 머금은 듯 묵직해지고,

젖은 초록은 마치 처음 태어난 것처럼 선명해진다.

물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착각.

풍경은 모두, 맑고 깊어져 있다.


마치 누군가 손으로 문질러 그린 수채화처럼,

비는 도시의 경계를 흐리면서도

그 본래의 색을, 오히려 또렷하게 드러낸다.

빛이 물기를 머금으면, 색은 더 이상 평면이 아니다.

촉촉한 표면 위에서 감정처럼 번져간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여름비는 색을 짙게 만든다.

그건 젖은 마음처럼 묵직하고,

그리움처럼 또렷하다.

초록은 더 초록이고, 검정은 더 검정이며,

그 사이에 끼인 나의 감정들 역시

어디론가 빠지지 못하고 고여 있다.


그리고 너를 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눈에도 비가 오는 걸까.

흐릿했던 내 세계에

너는 선명하게 들어왔다.

마치 이 모든 짙어진 풍경이,

너 하나를 위해 준비된 무대처럼.


나는 네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내려앉고,

방울 하나가 턱선을 타고 천천히 흘렀다.

그 한 방울에 시선이 붙잡혔고,

그걸 따라가다 보니 너의 입술이 있었고,

그 옆에, 말하지 못한 표정이 숨어 있었다.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두 눈 사이에 잠깐의 망설임이 스쳤다.

입꼬리는 말없이 떨렸고,

네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나는 그 호흡의 속도를 따라 내 감정의 리듬을 조절했다.

조금 빠르게, 그리고 다시 천천히.


나는 너를, 끝까지 바라보았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이

너를 기억할 수 있는 마지막 장면일 것처럼.

빗물에 스며든 너의 선명함은

내 마음 어딘가에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닿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감정이 있다면

그건 아마, 이렇게 끝까지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나는 언제나 너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너는 언제나 비 속에 있었다.

그 장마는 여전히 이어졌고,

어쩌면, 영영 끝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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