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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 May 08. 2022

썸 타는 관계(2)

우리는 어떤 사이인가요?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는 그의 말에 입꼬리가 올라가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열기를 식히려 열어둔 창문은 오히려 바람을 몰고 들어와 내 마음을 더 부풀게 했다. 살짝 잠긴 저음의 목소리는 대화 사이의 잠깐의 침묵도 포근히 안아주는 듯 다정했다.

통화가 길어지자 핸드폰을 잡은 손에 고통이 찾아왔다.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핸드폰을 들어도 손은 저렸고 팔뚝이 뻐근했다. 핸드폰을 쥔 손가락은 뜨거워 델 듯했고, 핸드폰을 지탱하는 목도 한쪽으로 기울어져 통증을 가져왔다.

나는 누가 방에 들어올까, 누가 몰래 들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문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말아 올려 그의 목소리에만 집중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통화에 눈꺼풀에 졸음이 내려앉아도 전화를 끊기는 아쉬워서 핸드폰을 붙들고 잠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 당시 '뷰티 인사이드'라는 영화가 개봉해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었는데 연애 초반의 설렘과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주말에 같이 보러 갔다. 우리는 상영관 오른쪽 가장 안쪽에 나란히 앉았다. 좌석 팔걸이를 위로 올리고 그가 날 보고 싱긋 웃었다. 암전이 되고 광고가 스크린에 띠워졌다.

그는 잠깐씩 내 어깨에 기대 영화의 호흡에 따라 웃기도 하고 가만히 머물기도 했다. 나는 미동도 없이 숨을 참고 그에게 어깨를 내주었다. 그가 멀어지면 숨을 후하고 내쉬었다가 가까워지면 편하게 숨을 삼켰다.

매일 얼굴이 달라지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연기하는 한효주, 성별과 나이, 국적까지 달라지는 삶을 매일 살고 견디고 이겨내는 남자는 여러 명의 배우가 연기했는데, 관객들의 환호성이 천차만별이어서 느끼는 재미도 있었다.

나는 옆자리의 남자를 의식해서 유연석, 박서준, 서강준까지 좋은 티를 내지 않고 잘 참았으나 이진욱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 버려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내 코앞에 와서 장난스럽게 내 시선을 좇았고 나는 입을 가리고 표정을 숨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출구로 나가는 길에 아는 지인을 만났다. 그를 보고 누구냐고 묻는 눈빛을 읽었으나 나는 그를 한번 보고 그냥 '지인'이라고 말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5초의 시간이 영겁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연인이라고 하기엔 이르고, 아는 사이라고 하기엔 서운한 사이. 그때의 우리 관계의 정의였다. 
       

그와 나의 거리는 딱 한 정거장 차이가 났는데 늘 내가 먼저 내렸다. 아쉬운 마음에 오늘은 한 정거장만 걸어서 집으로 가라고 말을 하자 그가 웃으며 그러겠다고 했고 우리는 함께 걸었다. 

집은 도착한 지 오랜데 헤어지긴 아쉬워서 언덕만 다섯 번은 오르고 내려갔다. 손으로는 사탕 껍질을 쥐고 자르고 비틀고 가루를 내면서 모든 신경은 그에게로 가있었다. 남자는 내 손에 쓰레기를 자신이 가져가더니 내 손을 슬쩍 잡았다.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은 아닌데 싫진 않은 느낌으로 손을 잡다가 내가 그의 손을 먼저 놓았다. 작은 실랑이를 하다가 남자와 헤어졌다. 
  

좋긴 한데 다음에 했으면 하는 마음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인데 그날부터 우리의 거리가 멀어진 것 같다. 연락은 조금 뜸해졌고, 가끔 오는 전화도 다정하게 받지 못했다. 인적성 검사와 면접 준비로 예민해진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에게 드러냈다. 그는 조금 버거웠는지, 어느 날은 이런 얘기 하지 말까. 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내가 지금 너에게 짜증 내는 건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내 상황이 힘들어서라고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면, 나는 너에게 좀 더 특별한 사람,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더 표현해주었더라면 우리는 사랑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었을까? 왜 좀 더 용기 내지 못했을까 후회가 된다.

나와 데이트하러 나와서 미팅하러 나왔던 다른 여자애에게 자꾸 연락이 온다며 핸드폰을 보여주는 너에게 네가 알아서 하라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연락 안 했으면 좋겠다고 분명히 내 의사를 전달해볼걸. 이런 너의 행동이 나에게 상처가 되고 내게 확신을 주지 못한다고 속상하다고 정확히 말을 했어야 했다. 흐지부지 끝나버린 그 대화 속에서 우리의 다음이 없어져버린 거라면 말이다.

연인이 되지 못한 책임을 누구에게 따져 물을 순 없다. 내 잘못이 하나 있으면 네 잘못도 하나 있는 거고, 서로가 연결이 되어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니 말이다. 


단지 연애를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게임을 하듯 이기고 지고 비기는 것이 생겨버릴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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