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학이 다녀간지 얼마 되지 않아 희수가 집에 들렀다. 마침 감자 수확도 전부 끝나서 보냈고 장마 준비도 얼추 마무리가 된 상태라 농가는 집 천장 보수 따위의 잡다한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따름이었다.복순은 희수의 방문이 못내 불편하고 껄끄러웠다. 마지막으로 본 막내아들 얼굴이 자려고 눕기만 하면 아른거리니 편할리 없었다. 그렇다고 똑똑한 아들보다 더 어려운 서울 손님에게 본인 복장을 열어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어머니 잘 지내셨죠? 제가 한동안 바빴어서… 제사도 못 찾아봬서 죄송해요”“일 없다. 안 와도 된다고 내가 했는데 뭘. 학교는 다닐 만하냐?”“네 어머니 너무 좋아요 이럴 거면 처음부터 선생님 했으면 싶더라고요. 아하하 아 재학씨 얘기도 들으셨어요? 재학씨가 학교에서 완전 인기 많아요 애들한테. 재학씨가 애들 눈엔 그렇게 멋있어 보이나봐요 재학씨도 상정초 졸업생이라니까 아무도 안 믿는거 있죠. 서울사람 같다고.”“재학이 놈은 거진 서울 사람이지 뭘… 그 놈이 시골사람인가…”“아하하 그것도 그러네요 서울에서 산 기간이 시골에서 산 기간이랑 거의 비슷하니까”“그래… 오늘은 쉬는 날이야?”“네 오늘은 수업이 없어요 저야 합창반만 맡아서 하는 거라 애들 연습 없는 날은 굳이 학교 갈 필요 없더라구요. 처음에 한동안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가서 적응한다고 바빴고 이제는 좀 괜찮아졌어요”“그래… 나가봐라 곧 있으면 순이 올 거다. 시간되면 이따가 밥이나 먹고 가고.”“네 어머니”희수가 복순과 대화를 마치고 집 밖으로 나왔다. 해가 지려면 한참 남은 이른 오후였다. 장마가 오긴 하려나 보다. 덥고 습하기가 이리 온탕 한가운데 서 있는 거 같으니. 오늘 복순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집에 있다고 했고 재무와 순이는 밭에 나간 상태다. 이런 날 밭일이라… 본인도 와서 어색하게 나마 밭일에 손을 보태봤지만 도저히 엄두가 안난다.“헥헥헥…”“아이고… 니가 제일 고생이다 덥지?”어느새 부엌 처마 밑으로 자리를 옮긴 먹보 앞에 쪼그려 앉아 먹보를 쓰다듬어준다. 목줄 매고 있는 부분이 답답할까 싶어 긁어주다 이내 목줄을 살짝 풀어 줘보니 어디 가지 않고 그저 발로 한번 박박 긁고는 시원한 바닥을 찾아 엎드려 앉는다. 안본 사이 좀 큰 것도 같다.먹보 옆에 가만히 앉아 등을 쓸어주며 마당을 둘러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순이가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빈 소쿠리를 한 손에 든 채.“언니!”“…희수야”먹보와 희수 둘 다 질세라 순이에게 뛰어간다.“언니 잘 지내셨죠?”순이는 쪼그려앉아 먹보의 턱을 긁어주며 희수를 올려다봤다. 약간의 염려를 담아“응… 잘 지냈지 이제 바쁜 건 좀 나아졌어?”“네! 처음에 적응한다고 좀 정신없었는데 이제 다 괜찮아졌어요 그날 말도 없이 못 와서 죄송해요...”“…괜찮아”말을 하며 순이도 일어나 희수와 눈을 맞춘다. 순이도 희수와 재학부부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닌지 싸우기라도 한건지 궁금은 했지만 본인이 물어볼만한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순이와 희수는 같이 마당을 가로질러 마루까지 갔다. 순이가 잠깐 방에 들어가 복순에게 인사하고 나왔고 순이와 희수는 그늘진 평상에 나란히 앉았다.“형부는요?”“마을 회관에… 곧 장마라 이곳저곳 할 게 많아서… 이번 장마가 워낙…”“준비 다 하신거 아니었어요? 재학씨가 그러던데.”“힘쓸 사람이 없는 집이 많아 여기.”“아…”괜히 마을 청년회장이라고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싶은 희수였다.오랜만에 만난 희수와 순이는 할말이 많았다. 주로 희수가 얘기했지만 순이도 아는 사람이 보면 순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을 많이 했다. 방에서 나오려던 복순이 그 짝에 놀래 다시 방에 들어갔으니. 희수는 그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전부 얘기해줄 기세로 순이에게 말을 풀어냈고 순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희수의 얘기를 경청했다. 희수가 그동안 일에 대해 물어 전기밥솥을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순이의 그런 표정이 귀여워 희수는 한번 더 웃었고.“근데 그럼 어머님이랑 언니는 장마 때 집에서 쉬세요?”“특별히 어디 나가지는 않아. 위험하기도 하고… 가끔 밭에 나가보기는 하는데…”“아… 그럼 저희 집에서 여기 오는 것도 그럴려나요?”“응… 되도록이면 오지 않는 게… 위험해”“그럼 비 많이 내리기 전에 자주 올게요.”“응…”희수는 순이를 보며 웃었고 순이도 마주 웃었다. 둘이 만난 건 고작 반년이 안되는 시간이나, 희수는 순이를 보면 없던 언니가 생긴 거 같아 기뻤다. 언제든지 칮아와 마음 편히 재잘거려도 가만히 들어줄것만 같은. 일말의 핀잔이나 지적 없이 그저 웃어 주며 고생했노라 등을 두드려주는 언니. 순이에겐 서울에서의 일도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순이에게 희수는 코스모스만큼 향기롭고, 시장바닥에서 잠든 본인을 따스하게 데펴줬던 햇살만큼이나 따뜻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 자체만으로 빛이 나고 향기로운 사람. 그저 곁에 있음으로 비루하고 무식한 본인조차 조금은 밝게 만들어주는 사람.희수와 순이는 동서지간으로 만났으나 어느새 그들은 그 누구보다 가족(家族)같았다.***쏴아아아아아아- 쏴아아아아아아 꽈릉-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의 소음은 어느새 옆을 때리는 다른 빗소리에 잠겨 안 들리고 그저 바람과 빗소리가 한데 어우려져 언덕에 위치한 복순네 집을 외딴 섬으로 만들어버린다. 올해 장마가 무서울거라더니 몇 년전 기억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복순이다.날은 여름이지만 복순의 몸이 그리 좋지 않아 웃풍이 들까 싶어 불을 약하게나마 폈다. 눅눅하지만 은은한 열기가 느껴지는 방안이다.“첫째는? 아침에 나가더니 안 들어 온겨?”“예… 회관에…”“뭔 놈에… 이 비면 그칠 때까지 집 들어오는 건 글렀겠구만… 그냥 집구석에 있지…”“…식사 내올게요”“아서라! 됐다. 한끼 늦게 먹는다고 안 죽어. 뭐 이 비 오는데 부엌까지 걸어가서 밥을 내온다 그래. 너 비 맞으며 밥상 내온다고 내가 그거 맘 편히 먹겠냐?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순이가 일어나려다 복순의 말에 도로 앉았다. 비가 적당히 오면 밭에라도 한번 가보고 창고정리라도 할 텐데 이리도 많이 오면 그 마저도 힘들어 그저 방안에서 복순은 화투점을 보고 순이는 구멍 난 옷들을 기우거나 식구들이 먹을 나물 따위를 손질하곤 했다.꽈릉. 번쩍쏴아아아아아시끄럽게 천둥이 내려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렸고. 복순과 순이는 오늘은 그마저도 손에 안 잡히는지 어느새 열린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문 바깥으로 마당에 비가 들이치고 세상이 비에 때려맞고 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따뜻한 내부에 조금은 시원한 공기가 방안을 휘감았다.비가 들이치지 않는 자리를 차지 하고 앉은 먹보의 집에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장마가 들려주는 시끄러운 음악을 자장가 삼아 단잠에 빠졌거나 아니면 문산리 길거리에서 이 집에 자리를 잡기까지의 시간들을 반추하고 있을 수도 있을 듯 했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어쨋거나 시끄럽게 비가 내리고 천둥이 쳐 당장 옆사람이 소리쳐 부르는 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소음으로 세상이 가득 차버렸지만 언덕 위 식구들은 그저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각자 조용히 생각에 빠져들 따름이었다.***“아… 아니 그게…”바깥은 하늘이 무너진 듯 비가 내리고 있었고.전화를 받고 있는 희수. 평소에도 하얀 피부인 희수의 얼굴이 더 창백하게 질렸다. 전화 받은 손은 사시나무떨듯 떨리고 반대 손으로는 하염없이 머리를 쓸어 넘긴다. 눈을 어디다 둘지 모르는 채로.“그게 무슨 말이에요 엄마…? 아빠가 왜… 감옥에 가요…?”세상이 바뀌었다. 뙤약볕을 내리쬐던 하늘에서 갑자기 이리 구멍이 난듯 비가 쏟아지는거처럼. 문제 없이 잘 돌아가던 공장이 하루아침에 주인이 바뀌는거처럼. 바뀐 공장 주인 마음에 들지 않는 다면 아무리 멀쩡히 움직이던 것이라도 나사 하나쯤 갈아 끼우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다만 나사 입장에선 든든하게 본인을 붙들어주던 기반이나 의지하던 모든 것들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다는 점에서 가혹할 뿐이다.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겠지만.“……알겠어요 엄마…”희수는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눈물을 참으려 애썼으나 계속해서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끝까지 말릴 수는 없었다.혹시라도 본인 부부의 일이 아버지에게 안 좋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엄마는 그런 건 전혀 없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문제없을 거다. 아빠의 지난 행적들을 얘기하며 본인 몸 하나 보신 못할 사람은 아니니 금방 별 일 없이 나오실 거라 본인을 안심시켰으나 희수에겐 단 한치만큼의 위안도 되지 않았다.한참을 쪼그려 앉아 무릎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울던 희수는 이내 자리에 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더 이상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집으로 돌아온 재학이 마주한 것은 몇 개의 짐 가방이었다. 일찍 오라는 희수의 전화로 무어가 할말이 있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다짜고짜 맞닥뜨린 광경은 재학을 당황시키기 충분했다.“아 여보…”“이게 무슨 일이야?”“서울에서 전화가 왔어요… 아버지가…”소파에 나란히 앉아 희수에게 전후사정을 전해 들은 재학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짐가방들을 보곤 결국엔 희수가 본인을 떠나나 했지만 그건 아니라 다행이었고 이후 든 마음은 당혹감이었다.‘그 장인어른이…’재학에게 경철은 단단하기가 마치 태산만한 바위 같아 절대 흔들리지 않을 위인이라 생각했건만…이어선 본인 처지에 대한 당혹이다. 지금 본인은 서울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서울에서 영월로 전근을 한지도 얼마되지 않았을뿐더러 지금 본인이 서울에서 교편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이걸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우리가 간다고 무언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장모의 말처럼 가만히 있으면 그저 해결될 상황이지 않을까? 하필 이런 때에…말로 늘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각들이 더 많은 가지를 치며 재학의 머리속에서 뻗어 나갔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나은 행동인지, 과거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 재학의 머리는 바쁘게 굴러갔다.“희수야 근데 그렇다고 지금 당장 서울에 간다고 해도…”“…”희수는 말을 끝마치고 줄곧 재학을 바라보지 않고 그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지금 급하게 서울에 가봤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니 천천히 상황을 보자는 말이 고심 끝에 나오려던 재학은 희수의 표정을 살피곤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오빠”참으로 오랜만에 ‘여보’,’당신’아닌 오빠다.“…응”“난 서울 가야 해 지금.”“희수야…”“당장 내가 가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해도 상관없어. 아빠가…”“…”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 희수가 말을 잇는다.“아빠가 별일 없이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지. 그런 세상이니까. 그래도 난 아빠가 후회할 거란 생각은 안 해 본인 선택이었고 본인 선택에 후회하실 분이 아니니까. 근데… 어떤 일이 생기든… 그 일을 엄마가 혼자 견디게 될 거란 생각을 하면…. 그 옆에 내가 없을 생각을 하면… 난 못 견디게 후회할 거 같아… 그러니까 난 가야 해 오빠”“…”“같이 가잔 말은 아니야. 나만 가면 돼.”재학은 희수의 눈을 보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전부 제쳐두고 따라가겠다는 말도, 본인 걱정에 당신도 가지 말라는 말도, 잘 다녀오라는 말도쏴아아아“…내일 아침에 가 희수야. 내가 차 빌려와서 내일 눈 뜨자마자 터미널까지 태워다 줄 테니까 내일 가… 오늘 이 비 오는데 어딜 간다고 그래. 내 말 들어.”“…”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두 주먹이 떨려왔다. 당장 서울까지 달려 가고 싶은 마음이 재학에게까지 느껴졌다.재학의 손이 희수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포갰다.“내일 아침에 가자 오늘은 좀 자고 응?”“…알았어”재학이 희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제 품 안에서 희미하게 떠는 희수를 느끼며 재학은 오랜만에 기도했다. 정말 별 일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