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해외에서 알바하기

홍콩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면?

by 어람

홍콩에 오기 전, 나의 대학 생활은 일과 공부의 연속이었다. 뼛속까지 완벽주의자여서 공부도 일도 완벽해야 했다. 그래서 내 혼자만의 시간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홍콩에 오고 난 이후 24시간을 다시 짜야 했다. 교환학생 신분으로 일할 수 없었고, 돈도 벌 수 없었다. 하루에 수익으로 날마다 판단하던 나에게 그만한 낙이 사라졌다. 일하지 않고 돈만 쓰면 행복할 거로 생각했지만, 24시간의 시간은 부담감으로 이어졌다. 한국에 있는 동기들은 이 일 년이란 시간 동안 임용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도 그만큼의 성과는 내고 싶었지만,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돈과 성취에 대한 압박감이 커지던 어느 날이었다.

‘언니, 나 대타 뛰어줄래?’

교회에서 만나게 된 친한 동생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아기 때 홍콩에 와 쭉 홍콩에 살았다. 그래서 홍콩을 자신의 손바닥 안처럼 훤히 꿰뚫고 있어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이 친구는 일 년 동안 재수 겸 갭이어를 하는 중이었다. 꿈에 그리던 영국 여행을 잠시 하게 되어 원래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의 대타를 부탁했다. 돈이 부족했고 무엇보다 뭔가 보이는 성과가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차에 너무나 좋은 제안이었다.

‘당연하지!’

한국국제학교에서 토요일마다 있는 한국어 수업에 인턴 교사 일이었다. 한국 국제 학교는 우리 학교에서 3시간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무조건 가고 싶었다.

새벽 6시. 아직 깜깜하고 세상은 고요했다. 나는 어둠을 뚫고 버스를 탄다. 미니버스 기사 아저씨는 서서히 떠오르는 해를 보며 경건하게 기도드린다. 오늘의 안전을 비는 듯했다. 고요와 어둠에서 서서히 밝아지고 동그란 해가 하늘에 떴다. 깜짝할 사이에 도시가 밝아졌다. 시원한 새벽공기가 나를 감쌌다. 아침부터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평소에 보던 홍콩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 도착한 곳은 한국 국제 학교였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간단했다. 선생님들께서 부탁한 용지를 복사하고, 숙제 검사를 하면 되었다. 그 간단한 일을 4시간 동안 하고 받는 돈은 400불, 한국 돈으로 6만 원 정도의 돈이었다. 오랜만에 하게 된 아르바이트에 나는 힘든지 몰랐다. 오히려 오랜만에 보는 아이들이 너무 예뻤고 간단한 일들도 더 정성을 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고개를 저을 정도로 맛이 없는 김밥이었지만, 오랜만에 먹는 나에게 김밥은 꿀맛이었다.

내가 아르바이트하게 된 이야기를 가장 처음으로 꺼낸 건 엘리사였다. 하지만 교환학생 비자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는 불가능했다. 엘리사가 나를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You shouldn’t tell this to anyone. (너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혹시나 누군가에게 말해서 내가 불이익을 당할까 봐 엘리사는 나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호주에서는 외국인들이 학생 비자로 들어와 돈을 벌어 문제가 자주 일어난다. 그런 호주에서 왔으니, 당연한 걱정이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새벽 5시에 일어나, 홍콩이 서서히 일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아르바이트에 가면 간식으로 김밥을 먹을 수도 있었고, 오랜만에 학생들도 볼 수 있었다. 홍콩에 사는 다른 한국인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아르바이트가 끝난 후였다.

아르바이트가 끝이 나면 밀크티를 하나 사서 트램을 탔다. 트램 이 층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천천히 빌딩 숲을 구경할 수 있다. 가장 천천히 홍콩을 즐기는 방법이다. 관광객들이 올라왔다 내려간다. 나는 같은 자리를 지키며 바깥을 구경한다. 트램이 종착역에 도착하면 내린다. 조금만 걸으면 바다가 보인다. 바다에서는 서서히 해가 진다. 내 하루도 서서히 저문다.

대타 마지막 날, 나 자신에게 준 선물로 초밥을 사서 일몰이 잘 보이는 곳으로 갔다. 바다 바로 옆 벤치에 앉아 잔잔한 바다를 보았다.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가족과 산책을 나온 사람들도 보였다. 뒤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트램 소리도 들렸다. 돈을 벌어보니, 이제 더는 홍콩이 타지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땅이 나를 받아주는 듯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잠시 핸드폰을 보는데 문자가 와있었다.

‘오늘 일 해보니 어땠어요?’

토요학교를 담당하는 선생님이었다.

‘오랜만에 학생들 보니까 좋았어요. 일도 어렵지 않았고요.’

더 좋은 기운을 많이 받아가서 이 말로는 부족했지만, 일단 이렇게 보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전화가 왔다.

“그럼 계속 일할래요?”

해는 잔잔하게 바다 안으로 졌다. 하늘은 수줍은 듯 붉게 물들었다. 정답은 하나였다.

“네. 감사합니다.”

내가 느낀 감정은 단순히 일을 가지게 된 행복 그 이상이었다. 난 너무 지쳐있었다. 그리고 온전히 방황 중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나에게 주어진 일 중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자꾸 홍콩이란 땅은 나를 밀어내는 듯했고, 나는 자꾸 겉돌기만 했다. 하지만 이 기회는 내가 홍콩에 정착할 수 있도록 물을 가득 주는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일을 소개해준 친구에게 감사했고, 나를 좋게 봐준 선생님께, 그리고 신과 만물에 감사하다고 느꼈다. 홍콩이란 땅 위에 버려진 씨앗이 드디어 뿌리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곳에는 나 말고 홍콩에서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몇몇 더 있었다. 대부분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인생 내내 외국에서 산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굳이 한국어를 가르쳐야 해?”

인도에서 오래 살다가 홍콩으로 대학을 온 도연이의 질문이었다. 받아쓰기 검사를 하다가 그 친구를 바라보았다. 한국에서 계속 산 나에게 한국어는 필수적이었겠지만 외국에 있는 한국인 친구들에게는 다른 문제였다. 특히 토요학교에 다니는 많은 학생은 영어가 모국어인 경우가 많았다. 부모님이 두 분 다 한국인일 때도 있지만, 두 분 중 한 분만 한국인인 학생들도 있었다. 부잣집 학생들이어서 거의 필리핀 가정부 손에 크다 보니 한국어 노출이 거의 없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있었다.

“한국어가 이 애들한테 필요할까?”

복사하던 민성이가 대답했다. 민성이도 상하이에 오랫동안 살다가 도현이와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중요하지 않을까?”

홍콩에서 어릴 때부터 자란 민지가 말했다. 나도 재빨리 덧붙였다.

“이 아이들의 정체성에 관한 일이잖아. 배워야지. 부모님을 이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고민은 나에게 처음이 아니었다. 캐나다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때 장애물이 있을 때마다 고민했다. 캐나다에서 한국 2, 3세, 1/2세 등등,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 한국어를 가르쳤다. 그중 반 정도는 타의에 의해 참여했다. 그래서 왜 한국어를 배워야 하냐는 질문에 나도 정확하게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가 많았다. 일주일간의 짧은 수업 끝에서야 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았다. 지금은 4학년 정도 되는 나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할 때가 온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몇 퍼센트든,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알면 덜 흔들린다는 것을, 그리고 한국인인 부모님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해도 현실은 다른 법이다. 나는 받아쓰기 검사를 다 마치고 복사한 용지를 들고 반으로 올라갔다. 내가 맡은 3학년 반은 10명 정도로 된 작은 반이었다. 반에 들어가자마자 소란스럽게 영어로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집에서 한국어를 거의 접하지 않는 혼혈아거나 부모님이 재외국민 2, 3세인 친구들이었다. 하나같이 개성도 강했다. 수업을 시작해도 제대로 앉아있지 않는 경우도 많았고, 쉴 새 없이 영어로 대화했다.

“애들아, 다 적었니?”

나의 질문을 일부러 못 들은 척한다. 아직 한국어를 쓰는 게 불편해서였다. 몇몇 아이들은 한국어를 좀 더 유창하게 한다. 나에게 와서 이것저것 물어 본다.

“이거 뭐야?”

“다시 말해봐요. 이거 뭐에요?”

“이거 뭐에요?”

그럼 내가 대답해준다. 겉으론 영락없는 한국 아이이지만, 영어를 하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얼마나 어려울까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난 더 천천히 한국어를 가르쳐준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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