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2019년을 장식한 홍콩 민주화운동

그 뜨거웠던 순간들

by 어람

“홍콩 이즈 낫 치나.”

지난 2월, 설날을 맞아 가족이 홍콩으로 여행을 왔었다. 이층버스 앞에 앉아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 바로 옆쪽에 앉은 아저씨가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리셨다. 나이는 40대 정도 되어 보였는데, 알록달록한 바람개비를 들고 있는 아저씨는 어딘가 좀 모자라 보였다.

'홍콩 이즈 낫 치나.'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Hong Kong is not China라고 말하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 일을 그러고는 잊어버렸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아저씨는, 홍콩의 미래를 예견한 듯했다. 이렇게 홍콩 사람들은 중국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하고 있으니. 누군가 내 삶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이 복선에서 소름이 끼쳤을 듯하다.

‘Hundreds of thousands protest in Hong Kong. (홍콩에서 수십만 명이 시위하다.)’

‘Hong Kong protesters take to the streets again after government apology falls flat. (홍콩에서 정부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시위자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Hong Kong protests: Two people in serious condition…. (홍콩 시위대: 두 명이 심각한 상태….)’

방학 동안 홍콩의 상황은 심심치 않았다. 하루가 다르다 하고 외신들은 머리기사에 홍콩 시위에 대한 뉴스를 냈다. 홍콩의 행정 장관인 캐리람의 친중국적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거세진 것이었다.

‘방학이 끝나면 다시 홍콩에 들어갈 수 있을까?’

불안감이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이 와중에 중국인들은 태연했다.

“Do you know there are big protests going on in Hong Kong? (너 홍콩에서 큰 시위 일어나고 있는거 알아?)

난 태국에서 교육 봉사를 같이하는 중국인 멘싸이에게 물었다.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멘싸이는 중국 본토에서 유명한 신문사의 글들을 보여주었다. 홍콩에 관한 이야기는 주요 뉴스로 다루고 있지 않았다. 중국 정부의 검열을 받아서였다. 나는 현재 홍콩 상황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다.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검정 옷을 입고 거리로 나온 모습이었다. 그들은 민주화와 자유를 요구하고 있었다. 경찰들이 화염병을 던지는 모습도 보였다. 멘사이는 놀라는 눈치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생각났다. 광주 안에서는 군인들과 격돌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 주변 도시는 고요하고 그 상황조차 몰랐던. 이 상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내 방학이 끝날 때까지 시위는 잦아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심해졌다. 방학이 끝나고 홍콩에 들어온 날, 나는 일상이 파괴된 홍콩의 곳곳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리에는 쓰레기와 벽돌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창문이나 신호등이 깨진 곳도 있었다. 영상으로만 접하던 시위의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홍콩에서 태어난 중국인들, 아니 홍콩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중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중간에 중국에서 홍콩에 이민 온 자녀들이 아니라, 홍콩에서 오래 산 광둥어를 쓰는 사람들은 홍콩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고, 중국 사람들과 자신들과 다르다고 인식한다. 우리가 이야기할 때 중국에 대해선 본토 사람들(Mainland), 그리고 홍콩 사람들을 현지 사람들(local)이라고 칭한다. 그 정도로 구분이 확실하다.


“I cannot believe they are using violence to fight against it. I do oppose to the government but it should not continue to violence! (어떻게 그 사람들이 폭력을 이용해 반대를 표현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물론 정부에 반대하지만, 그게 폭력으로 이어지면 안 돼!)”

홍콩에는 광둥어를 쓰는 중국계 홍콩인만 있는 게 아니다. 영국 지배 시절에 간부로 들어온 인도인과 파키스탄인들도 이젠 홍콩인으로 같이 살아가고 있다. 파키스탄계 홍콩인인 엠버는 이 시위가 과격해지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엠버의 시각에서 광둥어를 쓰는 홍콩인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시위는 과하다고 이야기했다. 오늘 시위 때문에 지하철 4개 정거장이나 걸어와야 했던 것을 고려하면 엠버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 홍콩 주요 도시에서만 발생하던 시위는 이제 홍콩 대부분 구역으로 번졌다. 우리 학교는 지하철역에서 멀어 조용한 편이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학교 곳곳에 정부를 규탄하는 글을 붙이거나, 도서관 주위를 손을 잡고 둘러서 평화 시위를 했다. 하지만 시위는 점점 일상생활을 침해하고 있었다. 정부가 운영하는 지하철을 부수고 중국이 운영하는 건물들을 훼손했다. 곳곳에 홍콩의 행정 장관인 캐리람을 비방하고, 희화화하는 포스터들로 가득했다. 정해진 시간마다 학생들은 마스크를 쓰고 행진했다.

자유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폭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엠버는 화를 냈다. 홍콩에서 나고 자랐지만, 광둥어를 못하는 한편으로 이방인인 엠버에게는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에 대해 배운 나에게는 조금은 순진한 말이라고 느껴졌다.


홍콩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북경어를 쓰는 중국 사람과 광둥어를 쓰는 홍콩 사람도 살고 있지만 엠버처럼 영국령일 때 경찰이나 정부를 돕기 위한 공무원으로 파키스탄과 인도에서 온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 카자흐스탄 학생들이 큰 커뮤니티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고, 한국인들도 두말할 것 없이 많다.

하지만 시위에 참여하는 가장 큰 사람들은 광둥어를 쓰는 홍콩 사람들이다. 즉 아무리 삼대가 홍콩에서 태어났어도 파키스탄의 피가 흐르는 학생 중 시위를 하는 학생들은 보지 못했다. 아마 이곳에서 쓰는 언어에서 생기는 거리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홍콩은 참 특이한 위치에 있다. 평소에는 광둥어를 쓰고, 학교에서는 중국어와 영어를 필수로 하는 학교가 많다. 그 말인즉슨 어떤 학생들은 영어와 자신의 모국어만 할 줄 안다면, 삼사 개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언어 천재도 있다. 광둥어만 편한 학생들도 있고, 중국어 혹은 북경어가 편한 학생도 있다. 이렇게 다들 언어적 배경이 달라서 대학교 생활 중 인간관계에서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어 시간에도 시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홍콩 사람들이 중국에 대항하여 시위하면서 중국 학생들과 홍콩 학생들은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대적 소수인 중국인 학생들이 홍콩 학생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시위 문화가 없는 중국인에게는 이 상황은 ‘공포’ 그 차제였다.

“We might not attend the class anymore (저희 더는 수업에 못 참여할지도 몰라요.)”

두 중국 본토 친구들은 시위가 더 폭력적으로 변함에 따라 두려워했다. 부모님께서 폭력적인 시위에 휘말릴까 걱정해 잠시 중국으로 갔겠다고 말했다. 시위에 대해 반대하는 말을 했다.

그 말에 프랑스어 교수님, 엘리스가 천천히 이렇게 대답했다.

“Sometimes, violence is inevitable in order to gain the freedom. (자유를 얻기 위해 폭력이 불가피할 때도 있어.)”

프랑스인 다운 생각이었다. 엘리스 교수님은 이 혁명을 프랑스혁명과 비교해 말했다. 민중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한 싸움이라 했다. 두 중국인 친구는 약간은 동의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대신에 했다. 시위를 경험해본 나는 교수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미술 시간, 우리는 최근의 고민을 나누었다. 그중 홍콩에 공부하러 온 중국 본토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It is hard to choose a side. I cannot betray my friends here and I cannot betray my parents. (한쪽을 정하는 건 어려워요. 난 여기에 있는 친구들을 배신할 수 없고, 또 우리 부모님을 배신할 수도 없어요.)”

우리 모두 시위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친구는 시위에 대해 무슨 말도 정확하게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홍콩인도 아니지만, 홍콩에 있는 중국인으로서 어느 한쪽도 선택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어느 날, 큰 쇼핑몰에 장을 보러 나갔다. 이것저것 한주 먹을 것들을 사고 지하철역으로 돌아가는데, 보통 때 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마스크를 쓴 어떤 한 무리가 광둥어로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웅장함과 비장함에 혁명의 노래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지하철과 더 가까이, 쇼핑몰 중앙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더 많아졌고, 다들 하나같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갑자기 환호성 났다. 그 환호성의 가운데, 불타는 중국 국기가 있었다.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박수를 쳤다. 검은색 띠 위에 읽을 수 없는 한자가 적혀있었다. 감으로 뭔지 알아챘다. 시위였다. 이제 신계까지도 시위가 퍼진 것이다.

백화점에선 방송했다. 원래 저녁까지 운영하는 상점인데, 오후 5시가 된 지금 문을 닫으라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계속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지하철역 입구로 가니 영상으로만 보던 경찰들이 있었다. 경찰들은 총까지 메고 무장하고 있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세기 말 같았다.

지하철 입구는 다 닫혀 있었고, 한 통로만 열려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그 통로로 들어갔다. 다행히 지하철역을 내려가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역에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제 이 역에서는 지하철이 서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는 것이었다. 한참이나 지하철 문이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혹시나 경찰들이 탄 것인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위는 내가 사는 홍콩에서 일어나지만 남 이야기였다.




20190922_161145.jpg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잠잠해질 것 같았던 시위는, 누가 기름이라도 뿌린 듯 더 활활 타들어 갔다. 10월 1일 국경절에 베이징에서는 큰 행사를 하고 있을 때, 홍콩에서는 그만한 시위로 이목을 끌었다. 시민들은 검정 옷과 검정 마스크를 하고 나왔다. 46개 지하철역이 문을 닫았다. 시위는 곧 모든 지하철역으로 확산되었고, 한 달 사이에 시위로 인해 163개의 지하철역이 문을 닫았다.

외신 채널에서 내게 익숙한 거리가 수시로 방송되었다. 내가 시장 갈 때 가던 길, 친구들과 같이 밥 먹으러 갔던 장소, 일하러 갈 때 걸어온 길 등 이제는 수많은 시위대가 경찰과 싸움을 하는 전쟁터로 변해갔다.

시위에 대한 걱정에 한국인 친구들끼리 모여 늦게까지 노는 날이 많아졌다.

“경찰들이 우리를 보고 홍콩인인 줄 알고 때리면 어떻게 해?”

상상가능한 상황이다. 홍콩에 사는 한국인이 경찰에 맞는 영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우리가 먼저 자극하지 않으면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은 했지만 나도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는 두려움에 떨었다. 시위는 우리를 바짝 쫓아왔다. 이 시점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계엄령’이었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시위가 계엄령을 내리는 빌미가 될 수 있었다. 벌써 마스크 법안 (의료용, 건강용, 전문용 외에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징역 1년이나 25000hk(한국 돈으로 사천만 원 정도) 벌금)이라는 말도 안 되는 법도 만들었는데, 계엄령이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계엄령’이란 헌법 대신 국가가 군사권을 이용해 치안을 유지 시키는 법으로, 우리나라는 4·19혁명, 10월 유신, 5.18 민주화 운동 때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지하철역 163개가 마비되었다면 정말 사실상 모든 역이 지금 중단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과연 캐리 램은 이후 어떤 수를 보여줄지 걱정이 되는 상황이다. 벌써 시위는 6월부터 18주째 지속하여 가고 있었고, 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캐리 램이 해결할 수 없다면 중국 본토에서 어떤 개입을 할 수도 있었다. 아마 중국다운 억압적인 방법으로 홍콩을 옥죄려 할 것이었다.

우리끼리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있을 때 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까만 마스크를 쓰고 상기된 얼굴을 한 조비가 들어왔다. 벌써 자정이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시위에 참여하고 온 것 같았다. 조비는 마스크를 내리고 인사했다.

“I am so sorry you guys have to face this. (너희가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해)”

홍콩 시위 때문에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못 하는 외국인 유학생과 교환학생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But we have to keep protesting for our freedom.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이렇게 계속 시위를 할 수밖에 없어.)”

조비의 마음도 십분 이해했다.

“I support your decision! (난 너의 선택을 지지해!)”

이렇게 말했지만 우리들의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 갔다. 저렇게 작은 체구의 조비가 어디 가서 사고가 나진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잠들지 못하던 어느 날 밤, 나는 거실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누군가 밖에서 시끄럽게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문이 열렸다. 작은 키에 빨간 머리,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또 조비였다. 근데 여느 때와 조금 달랐다. 조비가 다리를 절고 있었다.

“Are you okay? (너 괜찮아?)”

그때서야 시위가 얼마나 내 바로 곁에 있는지 느꼈다. 내가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홍콩은 혁명 속에 부서져 가고 있었고, 내가 아끼는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싸우고 있었다.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수업에 빠지는 학생들이 생겼다. 소문으로는 시위하다가 경찰이 잡아가 감옥에 있다고 했다.

6개월 넘게 나와 함께했던 땅. 이제는 정도 많이 들었고 이 문화에 대한 애정도 생겼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사랑하는 땅과 사람들에게 닥친 위기는 생각보다 컸다. 역사적 사건 한복판에서 이를 목격하면서, 개인적으로 두려움만큼 안타까움과 슬픔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보기 시작했던 시위 관련 뉴스들을, 언젠가부터는 일부러라도 꼭꼭 보았다. 큰 시위가 있으면 생방송으로 보았다. 다음 날에 꼭 주변 친구들에게 괜찮냐는 문자를 보냈다. 이 시위를 지지하면서도 너무 무모해 보였고, 내 친구들이 이 커다란 소용돌이 앞에 너무 나약하게 느껴졌다.

“Why do you have to do this? (너 이거 왜 해야 해?)

얼굴이 알려지면 안 된다며 까만 마스크를 쓰고 매일 밤 시위장으로 나서는 조비에게 물어보았다.

“We should fight for our own freedom.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해.)”

지하철은 시위 때문에 일찍 문을 닫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학교도 4시 전까지 수업이 마치는 날이 많아졌다. 원래 4시 이후에 있었던 수업들이 줄줄이 취소되었고, 교환학생인 우리는 할 일이 줄어들었다. 곧 괜찮아질 거라는 학교의 말은 틀렸다. 중국 학생들은 두려움에 대거로 본토로 돌아갔고, 수업시간에 학생들은 점점 더 줄어들었다. 학교 주변 상점은 사람들의 사재기에 재고가 텅텅 비어있었다. 세상의 종말을 보는 듯 했다.

경찰은 시위대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내가 평안하게 잠을 자던 사이, 바로 옆 학교에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다가 기숙하에 큰 불이 났다. 그 뉴스가 난 새벽 한국 유학생들은 대규모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내가 아침에 깨어나니 우리 학교에 다니던 두 친구는 한국에 도착한 상태였다.

20191114_155852.jpg


일주일만 쉬기로 했던 학교는 하루하루 더 휴업하다가 결국 아예 수업이 다 취소되고 일찍 방학을 해버렸다. 다른 학교는 불에 타고 경찰에 침입당했는데, 수업이 제기될 수 없는 상태였다.


수업이 취소된 이후, 시위는 매일 밤을 장식했다. 우리 학교를 번화가까지 이어주는 지하철 하늘색 라인은 마비되었다. 중간중간에 대학교와 연결된 역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그 지하철 없이 우리는 학교 밖으로 편하게 나갈 수도 없었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생활은 기형적으로 변해버렸다. 밤에는 혹시나 경찰이 올 수도 있다 불안감과 상황이 더 악화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낮에는 수업이 없으면서도 어디도 갈 수 없는 답답함이 우리를 감쌌다.


교환학생들은 본국에서 돌아오라는 단체 문자가 발송되었다. 안타깝게도 한국 학교와 한국 정부에서는 깜깜무소식이었다. 한편으론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위기는 한편으로 기회라고 했던가? 나는 남은 한국 교환학생 친구와 이 낯선 땅에서 하루라도 더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결론적으로 현재 상황이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 온 시간이 아깝지 않도록 더 즐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낮이면 학교 여기저기를 다니며 추억을 남겼다. 다양한 자세로 사진도 찍고 남는 시간에 요리했다. 밤이면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 배영을 하며 별들을 보았다. 그렇게 나는 홍콩과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쫓겨나듯 한국으로 왔다.

화, 금 연재
이전 27화26 외국 친구들에게 한국선물을 준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