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베프는 노란 머리에 파란 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관계에 선을 긋는 걸 좋아했다. 어떤 사람이 더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선을 그어놓고, 그 사람에게 내가 보여주고 싶은 면만 보여주었다. 서로에게 있어서 내가 기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기댈 나무는 되어도, 내가 기대다가 혼자 서는 힘을 잃기 싫었다. 나는 나의 공간에 오롯이 섰고, 남에게 자리를 비워주지 않았다. 이 시간 동안 나는 혼자 오롯이 서는 방법을 배웠다. 혼자 더 단단하고 견고해졌다. 혼자임이 두렵지 않았다.
나무라면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 누가 잠시 왔다 쉴 수는 있겠지만 옆자리를 잘 내어주지 않는 나무였다. 나의 공간 안에서 단점은 숨겼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람처럼 행동했고 지금 와서 되돌아볼 때 그런 행동들이 날 옥죄었던 것 같다.
오리엔테이션 이후로 다른 친구들은 서로 급격히 친해졌다. 특히 같은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라면 더 그랬다. 나는 여기까지 와서 또 한국인과 놀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유럽 친구들 모임에 끼자니 어려웠다. 그래서 며칠은 도망 다녔다. 호주에서 온 엘리사는 그런 나를 눈치챈 듯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
“What are you going to do this afternoon? (너 오후에 뭐 할 거야?)”
엘리사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도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엘리사는 꽤 괜찮은 친구인 것 같았다. 한번 용기를 내 보았다.
“I will be doing assignment at the library, wanna join? (나 도서관에서 과제할 것 같은데, 너도 올래?)”
“I would love to. (좋아.)”
답장을 받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도서관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층에서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엘리사가 도착했다.
“Hey! (왔구나!)”
옆으로 자리를 비켜줬다. 엘리사도 과제할 것을 잔뜩 가지고 왔다.
“What are you doing? (넌 뭐 해?)”
“I was reviewing my Japanese class. (나 일본어 수업 복습하고 있었어.)”
엘리사는 얼굴을 찡그렸다.
“Japanese? You speak Japanese? (일본어? 너 일본어 해?)”
알고 보니 엘리사도 일본어를 배웠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를 고를 때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아 일본어를 골랐다고 했다. 나와 같아서 신기했다. 호주 영어 발음이 가득한 일본어가 너무 웃겼다.
“But I thought exchange students cannot take language class! (근데 교환학생은 언어 수업을 못 듣게 되어있다고 알고 있는데?)”
“Well, I just asked the professor if I could join the class, and he said yes. (음, 그냥 교수님께 청강해도 되냐고 여쭤보니까 된다고 하셨어.)”
난 진짜로 공부를 하고 싶었던 터라 청강 수업도 꽤 많았다.
“I really wanted to learn Korean, maybe I should ask Korean professor too. (나도 한국어 배우고 싶었는데, 나도 한국어 교수님께 여쭤봐야겠다.)”
난 얼굴을 찡그렸다. 그랬다. 이 학교엔 한국어 수업이 있었다. 평범한 한국인 보다 내 얼굴을 까맸지만, 홍콩 친구들은 쉽게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많은 홍콩 학생들은 정말 한국 문화에 미쳐있었다.
“한국인이에요?”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면 저마다 자신이 아는 한국어를 신나게 자랑했다.
“I know, 너무해, 안녕하세요, 사랑해. (나 한국어로 너무해, 안녕하세요, 사랑해 알아.).”
몇몇 문장을 말할 수 있는 수준부터 복잡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수준은 다양했다. 너무 고맙기도 했지만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건 오히려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I can help you with your Korean. Meet me at the library. (내가 너 한국어 도와줄게. 도서관에서 만나자.)”
그렇게 우리는 급격히 친해졌다.
엘리사와 나만 공통점이 많았다. 가장 큰 공통점은 서로의 다른 문화를 나누길 좋아했다.
“What’s that?(그게 뭐야?)”
엘리사는 항상 크래커와 까만색 잼 같은 것을 지퍼백에 넣어 다녔다. 나의 질문에 엘리사는 짓궂게 웃어 보였다.
“Hehe, you want to try it? (헤헤, 너 먹어볼래?)”
엘리사는 잼을 크래커에 발라 나에게 내밀었다. 한 한입 베어 물었다.
“Ewwww!! (으!!)”
바삭한 식감에 굉장한 짠맛이 입안에 돌았다. 엘리사는 재미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집에서 밥을 먹었다. 올 때마다 엘리사는 새로운 식자재를 가지고 왔다. 호주와는 다른 식자재에 항상 그리워하는 외국 식자재를 잘도 사 왔다.
“Do you like it? (맛있어?)”
엘리사는 작은 당근(baby carrot)을 먹고 있었다. 거대한 토끼같이 귀여웠다. 저 당근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도 사람들이 자주 먹은 당근이었다.
“This is not the only baby plant I brought today. (오늘 내가 가져온 작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지~)”
엘리사는 다 죽어가는 듯한 작은 옥수수를 꺼냈다.
“This is baby corn! (이건 베이비콘이야!)”
엘리사는 내가 충격받아서 하는 표정을 좋아했다.
“You eat this? (이걸 먹어?)”
“Yeah, fry it or boil it. Anyway you want. (응! 끓여 먹어도 되고 볶아 먹어도 되고!)”
나는 볶은 베이비콘을 받아들였다. 옥수수와 똑같지만, 더 부드러운 맛, 맛있었다.
“It’s good! (맛있네!)”
“I knew you would love it.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하루는 엘리사가 드디어 페페로니를 구한 기념으로 우리 집에서 피자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I got tomato sauce! (내가 토마토소스 가지고 올게!)”
하지만 토마토소스를 가지고 온다고 한 엘리사가 가지고 온 것은 케첩이었다.
“This is not tomato sauce. It’s ketchup (이건 토마토소스가 아니야, 케첩이라고.)”
그렇게 케첩으로 우리는 식빵 위에 피자를 만들었다.
“Just to be clear, this is ketchup, not tomato sauce. (우리 명확하게 하고 가자고. 기건 케첩이야, 토마토소스가 아니고.)”
그런가 하면 엘리사가 만들어내는 한식은 충격적이었다. 엘리사는 고추장을 매우 좋아했다. 달걀에 고추장을 풀었다. 프라이팬에 씻은 콩나물을 올리고 달걀 고추장 물을 넣었다. 빨간색 오믈렛이 되었다.
“So you really eat this at home? (그래서 이걸 진짜 집에서 먹는다고?)”
엘리사는 당당하게 말했다.
“For sure. (진짜로)”
맛은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이 모험을 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난 주로 자연을 엘리사는 주로 으스스한 곳을 좋아했다.
“I know our next destination. (난 우리가 다음번에 갈 곳을 찾았어)”
엘리사가 보여준 곳은 사람들이 더는 살지 않는 유령 섬이었다.
“So, why you wanna go there again? (그래서 왜 여기에 가고 싶다고?)”
서로 가고 싶어 하는 곳을 보여주면 처음엔 이해할 수 없어한다. 하지만 결국 선뜻 서로를 위해 간다.
우리는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 겨우겨우 도착했다.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폐허가 된 건물들이었다. 건물이 상당히 많은 것을 봐서는 이곳도 한때 번화한 도시라는 것을 증명했다.
엘리사는 한껏 신이 났다. 사람들은 주변에 보이지 않았다. 한때 이곳은 항구로 유명했던 도시였다고 한다. 하지만 주변에 다른 항구들이 발달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수가 줄고 결국 버림받게 된 것이다. 건물들은 하나같이 부식되어 있으며, 안에서 벌써 나무가 자라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엘리사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여행을 하면 보통 가장 유명한 장소를 간다. 이번 여행은 사람들이 살지 않은 역사가 멈춘 곳이었다. 이곳에서도 배울 점들이 많았다. 비록 폐허가 되었지만, 예전에 건물 양식이 그대로 있었고 어떻게 사람들이 살았는지 추측해 볼 수 있었다. 엘리사는 여행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어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다름을 이해하면서 성장했다.
“You are unique. (넌 특별해.)”
엘리사는 나의 괴짜 같은 면을 좋아했다. 물론 엘리사는 K-pop을 좋아하고 한국 문화에 관해 관심이 있었지만 엘리사 눈엔 난 이상한 한국인이었다. 거대 달팽이 사진을 찍는다고 거리 한복판에 엎드리고, 싼 재료를 찾겠다고 으스스한 로컬 상점을 다니고 예쁜 곳이면 일단 다 앉아서 감상하다 벌레에 물려 병원까지 다녀오는 내 괴짜 같은 모습을 좋아했다.
“ I try to get most out of the people I like.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최대한을 함께하려 해) ”
내 눈에 엘리사는 솔직했고, 언제나 도움을 요청하거나 기댈 줄 알았다. 무엇보다도 오래 함께 하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행동들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나 혼자 있기 좋아하는 성향은 누군가에게 익숙해지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생겨났다는 것을. 엘리사는 내가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는 묵은 습관을 깨 주었다. 나도 다른 사람을 옆에 두고 기댈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