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가이드는 이제 그만
구매 담당자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최적의 파트너'를 '합리적인 비용'으로 계약하는 것.
하지만 실무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계약 이후의 분쟁과 추가 비용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프로젝트의 성공은 단순히 결과물의 완성에 있지 않습니다. 정해진 예산과 기간 내에서, 최소한의 마찰로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 전체가 성공의 척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의 성패는 RFQ(견적 요청서)의 완성도에 달려있으며, RFQ의 완성도는 RFI(정보 요청서)를 통해 얼마나 유의미하고 검증된 정보를 확보했는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 글은 저의 주된 경력인 EPC(설계·조달·시공) 산업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특히 형체가 없는 용역이나 복잡한 시스템 개발, 맞춤형 장비 제작 등 '비규격품'을 조달하는 경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만약 명확한 규격이 있는 기성품이나 단순 소모품을 구매하는 경우라면, 본문에서 제시하는 RFI의 형식이나 깊이는 다소 과할 수 있으며, 각 산업과 품목의 특성에 맞는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과거, 불명확한 RFQ 하나 때문에 프로젝트 막바지에 '과업 범위'를 두고 업체와 몇 주간 소모적인 논쟁을 벌였던 뼈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저희가 생각한 '당연한 기능'을 업체는 '계약 외 추가 과업'이라 주장했고, 계약서의 모호한 문구는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현업 부서의 원성과 경영진의 압박 속에서, 계획에 없던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서야 간신히 프로젝트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모된 시간과 감정, 그리고 팀의 신뢰 하락은 예산 초과보다 더 큰 손실이었습니다.
이글은 그런 값비싼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가이드라고 봐주시면 될거 같습니다. RFI를 단순한 업체 탐색 도구가 아닌, 분쟁의 소지가 없는 '방탄 RFQ' 초안을 만들기 위한 '정보 수집 및 검증 도구'로 활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RFI의 각 질문이 RFQ 초안의 어느 부분으로 연결되는지 명확히 이해하고, 실패 없는 계약의 첫 단추를 꿰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RFI를 발송하기 전, 최종 결과물인 RFQ 문서의 구조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RFQ는 단순한 가격 비교표가 아니라, 향후 계약의 근거가 되는 법적 효력을 지닌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분쟁 발생 시, 계약서는 우리를 보호하는 유일한 방패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RFQ는 다음의 핵심 항목으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1. 과업 개요 및 예산: 프로젝트의 목표와 예산 범위를 명확히 하여, 참여 자격이 없는 업체를 1차적으로 필터링합니다.
2. 과업 상세 내용 (SOW):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수행해야 할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정의합니다.
2-1. 수행 범위 및 요구사항: 기능적/비기능적 요구사항을 상세히 기술하여, '어디까지가 계약 범위인가'에 대한 해석의 여지를 없애야 합니다.
2-2. 요구 인력 및 산출물: 어떤 수준의 인력이, 어떤 결과물을, 언제까지 제출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규정합니다.
3. 계약 일반 및 특수 조건: 추가 비용 발생 기준, 지적 재산권, 검수 기준 등 민감한 사안을 사전에 정의하여 분쟁을 예방합니다.
전략적인 RFI란, 바로 이 RFQ의 뼈대를 채울 정보를 시장의 잠재적 파트너사들로부터 '추출'하고 '검증'해내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막연한 계획을 업체의 전문성을 통해 구체적인 '요구사항'으로 전환하는 첫 단계인 셈입니다.
아래 4가지 RFI 질문은 RFQ 초안의 각 섹션을 작성하는 데 필요한 핵심 정보를 제공합니다. 각 질문은 업체의 역량을 평가하는 동시에, RFQ의 완성도를 높이는 이중의 목적을 가집니다.
1. RFI 질문: "최근 3년 내 수행한 유사 과업의 최종 산출물 목록, 투입 공수(M/M), 그리고 총 계약 금액을 기술하시오. 당시 고객사의 문제(As-Is)를 어떻게 정의했고, 어떤 해결책(To-Be)을 통해 어떤 정량적 성과(KPI)를 달성했는지 구체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술하시오."
2. RFQ 초안 활용법:
총 계약 금액, 투입 공수(M/M) → [1. 과업 개요 및 예산] 수립: 이 정보를 통해 우리는 시장의 현실적인 단가 구조를 파악하고, RFQ에 명시할 예산 범위의 타당성을 확보합니다. 예를 들어, 다수 업체가 유사 과업에 평균 10 M/M, 2억 원을 제시했다면, 우리 예산이 1억 원에 불과할 경우 프로젝트 범위 축소나 예산 증액을 사전에 검토할 수 있습니다. 이는 터무니없는 예산 책정으로 인한 유찰이나 부실 제안을 사전에 방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최종 산출물 목록 → [2-2. 요구 인력 및 산출물] 정의: A급 업체가 통상적으로 어떤 산출물을 제공하는지 파악하고, 이를 우리 RFQ의 필수 제출 산출물 목록에 포함시킵니다. 단순히 '완료 보고서'가 아닌, '요구사항 정의서', '화면 설계서', '테스트 시나리오 및 결과서', '사용자 매뉴얼' 등 구체적인 산출물을 명시함으로써, 프로젝트의 가시성과 품질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1. RFI 질문: "귀사의 표준 방법론을 단계별로 설명하고, 요구사항 변경, 일정 지연, 핵심인력 이탈 등 주요 리스크 발생 시 대응 시나리오와 그에 따른 비용 처리 기준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시오."
2. RFQ 초안 활용법:
비용 처리 기준 → [3. 계약 특수 조건] 명시: 프로젝트 중 가장 큰 분쟁 요소인 추가 비용(Hidden Cost) 발생 기준을 명확히 합니다. RFI 회신 내용 중 가장 합리적이고 구체적인 기준을 채택하여, RFQ 계약 특수 조건에 "과업 변경 시 비용 처리는 본 RFQ의 OOO 기준을 따르며, 월 2회까지의 경미한 수정은 유지보수 범위에 포함되나, 기능 변경을 수반하는 요구사항은 별도 CR(Change Request) 절차를 따른다"와 같이 계약의 특수 조건으로 명시합니다. 이로써 모든 업체가 동일한 리스크 조건 하에 견적을 제출하게 되며, 계약 후 "이건 몰랐다"는 식의 분쟁을 원천 차단할 수 있습니다.
2. RFQ 초안 활용법:
인력 등급, 경력 → [2-2. 요구 인력] 기준 설정: 우수 업체의 인력 구성과 등급을 참고하여, 우리 RFQ에 "PM: 동종 업계 10년차 이상, 유사 프로젝트 PM 경험 3회 이상", "개발리더: 7년차 이상"과 같이 최소 요구 스펙을 명시합니다. 이는 업체가 계약을 위해 영업사원은 에이스를 내세우고, 실제 수행은 주니어 인력으로 채우는 'Bait-and-Switch' 전략을 방지합니다. 또한, "제안서에 명시된 핵심인력은 발주사의 사전 서면 동의 없이 변경할 수 없다"는 조항을 RFQ에 포함시켜, 제안받을 서비스의 품질을 계약적으로 보장해야 합니다.
1. RFI 질문: "당사가 제시한 과업 개요서(RFI) 내에서, 귀사의 전문가적 관점에서 볼 때 누락된 과업, 불명확한 요구사항, 혹은 더 효율적인 대안이 있다면 선제적으로 의견을 제시하시오. 이 제안은 향후 RFQ 과업 내용서에 반영될 수 있습니다."
2. RFQ 초안 활용법:
누락 과업, 대안 → [2-1. 과업 상세 내용(SOW)] 보완: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기술적, 절차적 허점을 A급 업체의 제안을 통해 발견하고 보완합니다. 과거 한 업체는 저희가 요구한 상용 솔루션 대신, 특정 오픈소스 기술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라이선스 비용 절감과 안정성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이 제안을 RFQ의 SOW에 선택적 과업으로 포함시켜 모든 업체가 이 대안에 대해서도 견적을 제출하도록 유도했고, 결과적으로 수천만 원의 비용을 절감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처럼 업체의 전문성을 활용해 SOW를 고도화하면, 모호함을 줄여 업체 간 견적 편차를 최소화하고 프로젝트의 실패 가능성 자체를 낮출 수 있습니다.
RFI는 더 이상 막연한 시장 조사가 아닙니다. RFQ라는 최종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시장의 전문가 집단(잠재 파트너사)을 활용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리스크를 검증하며, 과업 범위를 완성해나가는 고도로 계산된 구매 실무 프로세스입니다.
이 가이드에 따라 RFI를 실행하고 RFQ 초안을 작성한다면, '비교 불가' 견적서 앞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일 없이, 명확한 기준에 따라 최적의 파트너를 선정하고, 계약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분쟁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더 나은 RFQ를 만들기 위한, 체계적인 '정보 수집 활동'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잘 만든 RFI 하나가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우하고, 담당자의 밤잠을 지켜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