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놓은 사다리, 오르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성을 지으니, 주인이 바뀌었다

by 구매가 체질

프롤로그: 장밋빛 약속과 푸근한 노후, 그 달콤한 유혹


'벤처의 꽃은 성장이다.' 이 한 문장은 마치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이 주문은 파도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이곳, 대한민국의 테헤란로까지 번져나갔다. 로켓처럼 솟아오르는 기업 가치,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뜨거운 열정, 그리고 그 성장의 과실을 함께 나눌 것이라는 기대감. 특히 나처럼 십수 년간 한 우물을 파며 전문성을 인정받아온 '경력직'에게 스타트업은 '기회의 땅'이자 '제2의 인생'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정적인 대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스타트업이 제시하는 비전은 매력적이었다. 회사를 함께 키워나가고, 그 보상으로 주어지는 스톡옵션이 팍팍한 현실 속에서 '푸근한 노후'라는 한 줄기 빛을 비춰줄 것이라는 믿음. 그것은 단순한 금전적 보상을 넘어, 내 경력의 정점을 찍고 사회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길 수 있다는 자기실현의 욕구와도 맞닿아 있었다.


나 역시 그 꿈을 안고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었다. 구매팀조차 존재하지 않던,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스타트업에서 나의 자리가 만들어진 계기는 단순했다. "경쟁사에는 구매 전문가가 있다더라." 이 막연한 필요성 하나가 나의 이직을 결정지었다. 시스템을 만들고, 체계를 잡고, 회사의 성장에 보이지 않는 발판을 놓는 역할.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미션이자, 내가 온 마음을 다해 품었던 희망이었다. 나는 이 작은 배의 항해사가 되어, 미지의 바다를 건너 신대륙에 깃발을 꽂는 상상을 하곤 했다.


1장: 나 홀로 쌓아 올린 성, '구매 시스템'을 창조하다


입사 첫날의 풍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자유분방한 옷차림의 젊은 직원들, 곳곳에 놓인 빈백과 다과, 벽에 붙은 거창한 슬로건들. 모든 것이 활기차고 신선했지만, 그 이면의 업무 시스템은 혼돈 그 자체였다. 특히 '구매' 영역은 그야말로 정글이었다. 각 팀의 담당자가 필요할 때마다 제각각 물건을 사고, 비용 처리는 뒤죽박죽이었으며, 공급망 관리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었다. 회사의 소중한 자금이 어디로 어떻게 새어 나가는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의 첫 임무는 이 정글에 길을 내는 것이었다. 주먹구구식으로 흩어져 있던 구매 요청을 하나로 통합하는 시스템을 기획하고, 여러 공급업체와 줄다리기하며 최적의 단가를 찾아내고, 투명한 비용 정산 프로세스를 도입했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던, 하지만 회사에 반드시 필요했던 궂은일들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물건을 싸게 사는 기술적인 업무가 아니었다. 회사의 철학을 이해하고, 각 팀의 필요를 조율하며, 미래의 성장을 예측해 기반을 다지는 고도의 전략적 판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1인 실무자'이자 '1인 팀장'으로서 밤낮없이 달렸다. 때로는 개발팀의 복잡한 부품 사양을 이해하기 위해 밤새워 자료를 공부했고, 때로는 긴급한 요청을 처리하기 위해 주말에도 공급업체와 통화해야 했다. 그렇게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 올리듯, 나 홀로 '구매 시스템'이라는 성을 지어갔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지출이 줄었고, 업무 효율은 눈에 띄게 높아졌다. 나는 이 성장의 온전한 주역 중 한 명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가 흘린 땀방울이 회사의 단단한 주춧돌이 되고 있다고, 그 누구보다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 순진한 믿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장: 어느 날, 내 머리 위로 '낙하산'이 떨어졌다


회사는 예상대로, 아니 예상보다 더 빠르게 성장했다. 투자 유치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고, 사무실은 더 넓은 곳으로 이전했으며, 직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성장의 열매는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그 달콤한 과실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이너서클(Inner Circle)'이 있었다. 대부분 대표와 짧은 사회 경력에도 불구하고 '학연'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임원들이나, 창업 초기부터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는 '개국공신'들이었다. 그들은 실무 능력보다는 관계와 정치로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했다. 회의실에서는 세상을 바꿀 듯한 거창한 담론을 펼쳤지만, 정작 그 담론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궂은일은 묵묵히 일하는 실무자들의 몫이었다.


불안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사 공지 메일 한 통이 날아들었다. '구매 본부 신설 및 본부장 영입.' 내 머리 위로 낯선 이름의 '본부장'이 내려온 것이다. 소위 '글로벌 컨설팅 펌 출신', '유명 스타트업 상장 경험' 같은 번듯한 타이틀과 명문대 학벌로 포장된 어린 친구였다. 그는 내가 수년에 걸쳐 다져놓은 길 위로, 너무나도 우아하고 손쉽게 올라탔다.


나는 며칠에 걸쳐 내가 구축한 모든 것을 그에게 보고하고 설명해야 했다. 내가 밤새워 고민했던 프로세스, 내가 발로 뛰어 뚫었던 공급망, 내가 협상으로 얻어낸 성과들. 나의 모든 노하우는 그의 노트북에 깔끔한 보고서 형태로 저장되었다. 그 후, 그의 주된 역할은 내가 올리는 보고를 받고, 그 보고서를 바탕으로 더 높은 곳에 보고하고, 때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시를 내리는 것이 되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게 뭐지?' 수년간 현장에서 구르며 쌓아온 나의 경력과 전문성은 한순간에 '실무'라는 단어 아래 납작하게 눌려버렸다. 나는 성을 설계하고 벽돌을 쌓아 올린 건축가였지만, 성의 주인이 되어 파티를 여는 사람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저 그들의 화려한 파티를 위해 묵묵히 무대를 설치하는 스태프에 불과했다.


3장: 그들만의 리그, 스타트업은 어떻게 엘리트의 성이 되는가


허탈함과 배신감에 잠 못 이루던 밤, 문득 책에서 나온 무심코 스쳐 지나갔던 한 문장이 뇌리를 강타했다.

"보수적 엘리트들은 가능한 네트워크 위계를 최대한 넓히고, 하급자들을 최대한 착취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오픈엑시트(이철승)


처음 이 문장을 접했을 때는 낡은 시대의 이야기, 혹은 나와는 상관없는 재벌이나 정치판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혁신', '수평 문화', '자유'를 외치는 스타트업이라는 공간에서 '보수적 엘리트'라니. 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가. 하지만 내가 겪은 현실은 이 문장의 본질이 시대를 초월하여, 그리고 조직의 형태를 가리지 않고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여기서의 '엘리트'란 다름 아닌 창업자와 그를 중심으로 한 '이너서클'이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대기업의 엘리트와는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언어를 사용했지만,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욕망의 메커니즘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했다.


첫째, 그들은 '네트워크 위계'를 끊임없이 확장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네트워크, 즉 학연, 지연, 혹은 이전 직장에서의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을 핵심 요직에 앉힌다. 외부 투자자들에게 보여주기 좋은 '번듯한 학벌'과 '화려한 경력' 같은 키워드는 이 위계를 더욱 견고하고 정당하게 만드는 장식품이다. 실질적인 문제 해결 능력보다는, 그들이 속한 리그의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것이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된다. 실무 능력은 검증되지 않았지만, 그럴싸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 'C-Level'이나 '본부장' 타이틀을 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둘째, 그들은 '하급자'를 철저히 착취하고 활용한다. 나 같은 경력직 실무자는 이들에게 양날의 검과 같다. 회사의 기반을 다지고 실질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무능함과 비교될 수 있는 잠재적 위협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들은 실무자들에게 '성장'과 '비전'이라는 당근을 제시하며 궂은일을 맡긴다. 우리는 그 당근을 바라보며 기꺼이 땀 흘리지만, 그 땀의 결실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 된다. 내가 놓은 사다리는 결국 그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발판에 불과했다. 실무자는 철저히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되며, 그들의 공로는 평가절하되거나 교묘하게 가로채진다. 혁신을 외치던 스타트업은 어느새 그들만의 견고한 성이 되어가고 있었다.


성의 건축가는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성의 주인 행세를 하는 이들은 따로 있는 이상한 나라. 나는 그 나라의 성실한 국민이었지만, 시민권은 얻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에필로그: 나의 '경력'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 '실무'를 하고 있다. 내가 만든 시스템 위에서, 나에게 지시를 내리는 젊은 상사를 보며, 나는 매일같이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난 십수 년간 내가 차곡차곡 쌓아온 이 경험과 전문성은 정말 가치 있는 것일까? 이 견고한 성 안에서 나는 계속 이름 없는 투명인간으로 머물러야 하는 걸까?


어쩌면 많은 경력직들이 스타트업의 화려한 조명 뒤, 어두운 무대 뒤편에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꿈꿨던 '기회의 땅'이 사실은 누군가의 화려한 등장을 위해 사다리를 놓아주는 '공사 현장'은 아니었는지. "함께 성장하자"는 달콤한 말은, 결국 "나의 성장을 위해 너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말의 세련된 포장은 아니었는지.


오늘도 나는 묵묵히 나의 일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성은 내가 주인이 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나의 '경력'은 이제 갈 길을 잃고 새로운 지도를 그려야 할 때가 왔음을. 이 글이 또 다른 공사 현장에서 묵묵히 사다리를 놓고 있을지 모를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와 함께, 자신의 길을 돌아볼 용기를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벤처의 아킬레스건, 상환전환우선주(RCPS)의 두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