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 없는 계약을 위한 '방탄 RFQ' 작성법

"그건 계약 범위가 아닌데요?" 라는 말을 원천 차단하는 기술

by 구매가 체질

방탄소년단이랑은 상관없는 글입니다. 죄송합니다.


자, 우리 구매人의 책상 위에 여러 업체의 견적서가 놓여있다. 그런데 A업체는 10억, B업체는 15억, C업체는 8억을 제시했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단순히 비싼 업체가 폭리를 취하는 걸까, 아니면 싼 업체가 무언가 빠뜨린 걸까?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 없다면, 문제는 업체가 아니라 우리의 RFQ(견적 요청서)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RFQ의 본질은 명확하다. '동일한 기준과 양식'을 제공하여, '비교 가능한 견적'을 받는 것. 이것이 RFQ의 존재 이유이자 모든 것의 시작이다. 하지만 많은 담당자들이 이 기본을 간과한 채, 모호한 요구사항만 던져두고 업체들이 알아서 해석해주길 기대한다.


과거, 지식산업센터에 GMP 공장을 처음부터 셋업하던 프로젝트를 잊을 수 없다. 당시 나는 꽤 상세하다고 믿었던 RFQ를 배포했다. 하지만 A업체는 기본 공조 시스템만 견적에 넣었고, B업체는 까다로운 GMP 규정에 맞춘 헤파 필터와 차압 시스템까지 모두 포함해 제안했다. 당연히 두 업체의 견적 금액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결국 우리는 제안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보며 업체들과 별도의 Q&A를 몇 주간 진행하고 나서야, 비로소 동일한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소모된 시간과 행정력은 고스란히 프로젝트의 비용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잘 만든 RFQ는 비교의 시간을 줄여주고, 잘못 만든 RFQ는 혼란의 시간을 늘린다.


이 글은 업체마다 제각각인 견적서 앞에서 한숨 쉬는 대신, 명확한 기준으로 최적의 파트너를 가려내는 '방탄 RFQ' 작성의 모든 것을 담았다.


1. 비교의 출발점: '과업 범위(SOW)'를 하나로 통일하라

모든 업체가 같은 문제지를 풀게 해야 공정한 평가가 가능하다. SOW는 바로 그 '문제지'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고 상세하게 기술해야, 업체들도 동일한 범위에 대해 견적을 낼 수 있다.


1) 요구사항은 ‘성능’과 ‘수치’로 말하라 추상적인 표현은 각기 다른 해석을 낳는다. ‘GMP 규격 준수’ 같은 말은 아무런 기준이 되지 못한다. RFI를 통해 얻은 시장의 평균적인 기술 수준을 참고하여,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의 성능과 기준을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해야 한다.

모호한 RFQ: GMP 규격에 맞는 클린룸 시공

명확한 RFQ (클린룸 공조 시스템 SOW 예시):

1.1. 클린룸 공조(HVAC) 시스템 요구사항

적용 규격: ISO 14644, KGMP 기준 준수

구역별 환경 기준:

충전실(Grade A): ISO Class 5, 온도 22±2℃, 습도 50±5%

전실(Grade B): ISO Class 7, 온도 23±2℃, 습도 50±10%

차압 시스템: 각 Grade 간 최소 10 Pa 차압 유지, 디지털 차압계 설치 및 중앙 모니터링 시스템 연동

환기 횟수: Grade A 구역 시간당 60회 이상, Grade B 구역 시간당 20회 이상


2) 산출물 목록을 명확히 제시하라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눈에 보이는 설비뿐만이 아니다. 각종 문서와 데이터 역시 중요한 산출물이다. 업체가 ‘당연히’ 챙겨주겠지 라고 기대해선 안 된다. RFQ에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산출물 목록을 명시해야, 업체들도 이를 제작하는 공수를 견적에 반영할 수 있다.

요구 산출물 예시: 설계 단계: 공조 계통도(P&ID), 장비 사양서, 자동제어 로직 설명서 시공 후: 설치 적격성 평가(IQ), 운전 적격성 평가(OQ) 프로토콜 및 결과 보고서, 각종 시험성적서(필터, 풍량 등), 사용자 매뉴얼, 최종 도면(As-built Drawing)


2. 진짜 비용을 보는 눈: '가격 제출 양식'을 표준화하라

총액(Lump-sum)만 덜렁 제출된 견적서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A업체의 10억과 B업체의 10억은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을 수 있다. 업체들이 동일한 양식에 따라 가격을 세분화하여 제출하도록 만들어야, 우리는 각 항목을 비교하며 진짜 비용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우선 견적을 재료비, 노무비, 외주비, 일반경비, 이윤 및 일반관리비 등의 대분류로 나누어 요청하는 것이 첫걸음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허점이 생긴다. 예를 들어 '재료비'를 통째로 받으면, 업체가 핵심 설비는 저가품을 쓰고 눈에 띄지 않는 부자재에서 폭리를 취하는 것을 걸러내기 어렵다. '노무비' 역시 마찬가지다. 실제로는 중급 기술자 여러 명이 할 일을 고급 기술자 한 명이 하는 것처럼 부풀려 견적을 내는 경우를 막을 수 없다.


따라서 프로젝트의 규모와 중요도에 따라, 이 대분류를 한 단계 더 깊이 파고들어 세분화하여 요구해야 한다.

재료비는 공정별/설비별로 쪼개라: '총 재료비'가 아닌, '공조설비 재료비', '전기설비 재료비', '클린룸 판넬 재료비' 등으로 나누어 요구해야 한다. 더 나아가 각 항목에 포함되는 주요 자재의 품명, 규격, 수량까지 명시하도록 해야 한다.


노무비는 역할별/공정별로 쪼개라: '총 노무비'가 아닌, '프로젝트 관리(PM)', '설계 인력', '시공 인력(기계/전기)', '품질관리(QA/QC) 인력' 등으로 나누고, 각 역할에 투입되는 인력의 등급(고급/중급/초급)과 투입 기간(M/M)을 명시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외주비와 경비도 마찬가지다: 어떤 공정을 외주 처리하는지, 인허가 비용이나 검증(Validation) 비용 등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분리하여 제출받아야 한다.


이렇게까지 세분화된 견적서를 요구하는 것은 업체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다. 가격 뒤에 숨겨진 업체의 실력과 전략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모든 잠재적 파트너를 동일한 저울 위에 올려놓기 위한 구매 담당자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다.


3. 보이지 않는 리스크까지 비교하기: '평가 기준'을 알려줘라

최저가 업체가 항상 최적의 파트너는 아니다. 프로젝트 수행 능력, 리스크 관리 능력 등 보이지 않는 역량도 평가해야 한다. RFQ에 이러한 비가격적인 요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명시하면, 업체들은 제안서에 관련 내용을 충실히 담아낼 것이고 우리는 이를 비교 평가할 수 있다.

RFQ에 포함할 평가 관련 질문 예시:

프로젝트 관리 방안: 본 과업을 어떤 방법론으로 관리할 것이며, 주간/월간 보고 등 발주사와의 소통은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시오.

투입 인력 계획: 본 과업에 투입될 PM 및 핵심인력의 상세 이력과 프로젝트 수행 경험을 기술하시오. (제안된 인력은 발주사 동의 없이 변경 불가함을 명시)

리스크 관리 방안: 요구사항 변경, 일정 지연, 핵심 자재 수급 불안 등 예상되는 리스크와 그에 대한 대응 시나리오를 제시하시오.

품질 보증 계획: 과업 완료 후 하자 보증 기간은 얼마이며, 하자 발생 시 처리 절차와 대응 시간은 어떻게 되는지 기준을 제시하시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업체의 전문성과 책임감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결론: 비교 가능한 RFQ가 분쟁을 막는다


복잡하고 까다로워 보일 수 있으며, 문서라는게 완벽할수는 없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은 결국 ‘동일한 출발선’을 만들어 주기 위한 과정이다. 모든 업체가 같은 문제지를 풀고, 같은 양식의 답안지를 제출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비교 가능한 RFQ의 핵심이다.


명확한 기준으로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가격 뒤에 숨겨진 진짜 가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파트너와는 프로젝트가 끝나는 날까지 “그건 몰랐는데요”라는 말 대신, “함께 문제를 해결해 봅시다”라는 말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실력 있는 구매 담당자가 만들어내는 프로젝트의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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