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 구매 규정, 언제 '레벨업' 해야 할까?

성장통을 겪는 스타트업을 위한 단계별 구매 통제 가이드

by 구매가 체질

"이 소프트웨어 구독해야 하는데, 그냥 제 카드로 먼저 결제할게요!"

"대표님, 급한 거라 일단 주문했어요. 확인만 해주세요!"


스타트업 사무실에서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입니다. 우리는 '속도'와 '신뢰'라는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우리끼리' 알아서 처리합니다. 구매 요청, 검토, 승인, 발주... 이런 단어들은 거추장스러운 '대기업의 유산'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회사가 10명이 되고, 30명을 넘어 50명, 100명을 향해 달려갈 때도 이 '만능 키'는 유효할까요? 어느 순간부터 "이 돈은 왜 나갔지?", "누가 승인한 구매 건이지?"라는 질문이 오가고, 엑셀 시트에는 출처 불명의 지출 내역이 쌓여갑니다. 성장의 기쁨 뒤에 찾아오는 이 성장통은 생각보다 훨씬 아픕니다.


내부통제는 한 번에 완성하는 거대한 성벽이 아닙니다. 게임 캐릭터가 레벨에 맞는 장비를 갖추듯, 우리 회사의 성장 단계에 맞춰 통제 시스템도 함께 '레벨업'해야 합니다. 특히 회사의 자원이 직접적으로 흘러나가는 '구매'는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파이프라인입니다.


우리 회사는 지금 몇 레벨에 와 있을까요? 그리고 다음 레벨을 위해 어떤 장비를 갖춰야 할까요?


LV 1. 창업 초기 (1~10명): "기록의 씨앗을 심는 단계"


배경: 대표 포함 10명 내외의 팀원. 생존이 최우선 목표. 모두가 일인다역을 소화하며, 대표의 개인 카드와 법인카드가 혼용되기도 한다.


시한폭탄: 회삿돈과 내 돈의 경계가 무너지고, 1년 뒤 세무 조사를 받을 때 "이 돈은 왜 썼더라?"라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지출이 발생한다.


획득 아이템: 공유 문서와 영수증 폴더

이 단계에서 '승인'과 '견제'는 사치입니다. 목표는 단 하나, "모든 돈의 흐름에 꼬리표를 남기는 것"입니다.법인카드 사용을 원칙으로 하고, 모든 구매 내역을 구글 시트 같은 공유 문서에 즉시 기록하세요. (구매일, 품목, 금액, 구매자, 사용 목적)


모든 영수증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클라우드의 '날짜별 영수증 폴더'에 저장하는 규칙만으로도 충분합니다.


LV 2. 성장 초기 (10~50명, Series A 전후): "간단한 '승인'을 배우는 단계"


배경: 첫 투자 유치에 성공하고 팀이 빠르게 늘어난다. 대표가 모든 일을 알 수 없고, 팀별로 필요한 구매가 생긴다.


시한폭탄: 특정 팀에서 비슷한 서비스를 중복으로 구독하거나, 꼭 필요하지 않은 고가의 장비를 덜컥 구매한다.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믿음이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획득 아이템: 지출결의서와 전결 규정

이제는 "일단 사고 보자"가 아닌, "사기 전에 물어보는"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합니다복잡한 양식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슬랙이나 노션에 간단한 구매요청서(지출결의서) 양식을 만드세요.


"10만 원 이하는 팀장 승인, 그 이상은 대표 승인"처럼 간단한 전결 규정을 정하고 공지하세요. 이 작은 규칙 하나가 불필요한 지출을 막는 강력한 필터가 됩니다.


LV 3. 본격 성장기 (50명 이상, Series B/C): "역할을 나누는 단계"


배경: 부서가 나뉘고 전문 경영진이 합류한다. 구매 규모가 커져 비용 절감과 효율성이 중요해진다.


시한폭탄: 특정 담당자가 한 업체와 계속 거래하며 유착 관계가 생기거나, 더 저렴하고 좋은 공급업체를 찾을 노력을 게을리하여 회사의 비용 경쟁력이 약화된다.


획득 아이템: 업무 분장과 비교 견적


드디어 '균형과 견제'라는 원칙을 도입할 때입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않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요청(현업팀) → 실행(구매/경영지원팀) → 지급(재무팀)의 역할을 명확히 분리하세요. 물건을 쓰고 싶은 사람이 직접 돈을 주고 사 오는 구조를 깨야 합니다.


일정 금액 이상의 모든 구매 건에 대해 최소 2~3곳의 '비교 견적'을 의무화하세요. 이는 단순히 비용을 아끼는 것을 넘어, 구매 과정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는 핵심 장치입니다.


LV 4. 성숙기 (IPO 준비): "외부에 증명하는 단계"


풍경: 기업공개(IPO)를 준비하며 외부 감사를 받는다. 모든 것을 제3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증명해야 한다.


시한폭탄: "우리는 원래 이렇게 해왔어요"라는 내부 논리가 외부 감사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문서화되지 않은 절차, 근거 없는 업체 선정 과정이 모두 리스크로 지적된다.


획득 아이템: 공식 구매 규정과 감사 추적 시스템


이제는 모든 것을 '문서화'하고 '시스템화'해야 합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공식적인 구매 규정(Policy)을 문서로 만들고, 협력업체를 등록하고 평가하는 절차를 공식화하세요.


"왜 이 업체를 선택했는가?"라는 질문에 막힘없이 답할 수 있도록, 모든 의사결정 과정을 ERP나 구매 관리 시스템 안에 기록으로 남겨 '감사 추적(Audit Trail)'이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당신의 회사는 지금 몇 레벨의 장비를 갖추고 있나요?

성장의 속도에만 취해 캐릭터의 방어구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을 잊고 있지는 않았나요?


지금 조금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우리 회사의 레벨에 맞는 갑옷을 입혀주는 일. 그것이 바로 험난한 시장에서 회사를 지키고, 더 높은 레벨로 나아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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