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매'는 그냥 물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스타트업 #구매 #SCM #IPO #내부통제 #성장통

by 구매가 체질


기술 기반의 여러 회사에서 '구매'와 'SCM'이라는 이름으로 일해왔습니다. 돌이켜보면 가장 치열하고 역동적인 기억은 스타트업에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했던 곳. 그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구매'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1. 구매, 그 익숙하지만 낯선 이름

그거 제가 사도 되는데요?"


연구원들의 단골 레퍼토리였습니다. "이거 그냥 제가 사면 안 돼요? 그게 더 빠른데."


초기 기술 스타트업에서 구매 담당자가 마주하는 가장 높은 벽은 가격 협상도, 납기 단축도 아닌, 바로 이 편견일지 모릅니다. 특히 연구실(Lab) 문화가 강한 조직일수록 이런 시선은 더 짙어집니다.


핵심 연구원들은 조직의 '교수님'처럼 여겨지고, 자연스레 구매 담당자는 '교수님의 비서' 정도로 인식되곤 했죠. "이 시약 주문해주세요", "저 장비 견적 받아주세요" 같은 단순 요청을 처리하는 사람. 심지어 국책과제 예산을 집행하는 행정 담당자로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에게 구매는 연구 활동의 일부이지, 전문성을 가진 별도의 직무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 연구원 한 분의 한 시간은 회사의 자산으로 얼마일까?'


그들이 직접 부품을 찾고, 여러 업체의 견적을 비교하고, 세금계산서 같은 행정 처리를 하느라 쏟는 그 귀한 시간을 온전히 연구개발에만 쏟을 수 있다면, 회사는 얼마나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


구매의 진짜 역할은 단순히 물건을 사는 행위(Buying)에 있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공급망의 리스크를 미리 관리하고, 연구원들이 핵심 업무에만 집중하도록 시간을 벌어주며, 회사가 폭풍우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단단한 배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나도 살 수 있는 물건'을 대신 사주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 회사의 시간과 기회를 사는 것. 그것이 스타트업 구매의 본질임을 설득하는 과정이었습니다.


2. 회사의 목표가 구매의 언어를 결정합니다


'구매'는 카멜레온 같은 직무입니다. 회사가 처한 상황과 목표에 따라 그 색깔과 역할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CDMO(위탁개발생산) 바이오 기업에서는 '신뢰'가 핵심이었습니다. 고객사와의 약속인 임상 프로젝트 일정을 맞추는 것이 회사의 운명을 결정했죠. 이때 구매/SCM의 언어는 '납기 준수율'과 '정확성'이었습니다. 단 한 건의 원자재 공급 차질이 프로젝트 전체를 흔들 수 있었기에, 모든 과정은 오차 없는 시스템으로 관리되어야 했습니다.


반면 상장(IPO)을 준비하던 진단 의료기기 회사에서는 다른 언어가 필요했습니다. 바로 '증명'과 '투명성'의 언어였죠. 그들은 제게 "K-IFRS(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에 맞춰 재고자산을 완벽하게 관리해주세요" 라는 명확한 과제를 주었습니다. 외부 투자자들에게 우리 회사의 시스템과 재무 상태가 얼마나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지 데이터로 보여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주먹구구식 엑셀 관리에서 벗어나 ERP 시스템 위에서 모든 자원의 흐름이 추적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재고 정확도를 99%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은 단순히 숫자를 맞추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회사의 신뢰도를 쌓아 올리고, 성공적인 상장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 중요한 과정이었던 셈입니다.


3. 성장을 꿈꾼다면 '통제' 가능한 시스템을


결국 스타트업이 스케일업을 하고 IPO라는 목표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언젠가 반드시 '내부통제'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특히 '재고자산'은 외부 감사인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깐깐하게 들여다보는 항목 중 하나입니다.


"장부상 재고와 실제 창고 재고가 일치합니까?"


이 간단해 보이는 질문에 자신 있게 "네"라고 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 그것이 상장을 준비하는 구매/SCM의 핵심입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얼마에, 왜 샀는지 모든 기록이 투명하게 추적될 때, 비로소 회사는 외부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서류 작업을 늘리는 것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재고를 줄여 회사의 현금 흐름을 개선하고, 데이터 기반의 의사결정을 통해 더 큰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반을 닦는 일입니다.


'구매'라는 직무를 통해 회사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는 아직 사람이 없어서...", "그냥 개발자가 알아서 잘 사고 있는데..."라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회사의 다음 단계를 고민하고 있다면, 우리 회사의 '구매'를 어떻게 바라보고 활용할지 한번 점검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생각지 못한 성장의 실마리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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