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벽, ERP 연동 무료로 해결하기
지난 2편에서 우리는 포털을 만들기 위한 네 가지 핵심 준비물—명확한 문제, 프로세스 설계도, 노코드 툴, 그리고 첫 번째 동료—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가장 현실적이고 거대한 벽을 마주했다. 바로 우리 회사의 모든 데이터가 잠들어 있는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이었다.
공급업체 포털이 제 역할을 하려면 ERP의 최신 발주 정보를 받아와야만 했다. 하지만 중소기업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ERP는 외부 시스템에 데이터를 쉽게 내어주는 법이 없다. API 연동은 가능하지 않거나, 가능하다 해도 수백만 원의 추가 비용을 요구했다. 게다가 서브원 같은 대형 MRO 업체는 자체 포털이 있어 우리가 만든 포털을 쓸 리가 없었다.
ERP라는 중앙 데이터베이스와 연결되지 않는 포털은 '외딴섬'일 뿐이다. 이 프로젝트를 여기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전략 수정: 모든 문제를 풀려는 욕심을 버리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문제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봤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한 번에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완벽한 시스템을 만들려는 욕심이 프로젝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두 가지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첫째, '모든' 공급업체를 담겠다는 욕심을 버렸다.
우리 포털의 목표를 수정했다. '모든 공급업체'가 아닌, '관리가 가장 힘든 핵심 ERP 발주 업체'를 위한 솔루션으로 범위를 좁혔다. 서브원 같은 MRO 업체는 기존 방식대로 그대로 두기로 했다. 우리가 해결하려는 문제는 '전화와 이메일'이었고, 그 문제의 80%는 바로 이 핵심 업체들과의 소통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둘째, '실시간'이라는 완벽함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API 연동이 비싼 이유는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오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봤다. 내가 해결하려는 문제, '발주 건별 품목의 도착 예정일 파악'을 위해 반드시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움직여야 할까? 하루에 한두 번만 업데이트되어도 업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실시간'이라는 완벽함을 포기하니, 비싸고 어려운 API가 아니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해결책: '데이터 퀵서비스' 시스템 구축하기
나는 API 대신, ERP가 가진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엑셀(Excel)'을 이용해 데이터를 주고받는 '데이터 퀵서비스'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은 거의 무료로 구현이 가능했다.
[ERP → 포털] 데이터 내려주기: ERP의 '엑셀 저장' 기능 활용
우리 포털이 ERP에 직접 들어갈 수는 없지만, ERP 안의 데이터를 밖으로 꺼내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모든 ERP는 데이터를 엑셀로 저장하는 기능을 100% 지원하기 때문이다.
프로세스:
* 매일 오후 5시, ERP에서 그날 생성된 핵심 공급업체들의 신규 발주 목록을 검색한다.
* 검색 결과를 '엑셀로 저장' 버튼을 눌러 파일로 내려받는다.
* 이 파일을 구글 드라이브나 원드라이브의 특정 폴더에 업로드한다.
* 내가 선택한 노코드 툴이 이 폴더를 감시하다가, 새 파일이 올라오면 자동으로 내용을 읽어 포털의 데이터베이스에 반영한다.
ERP 담당자의 하루 5분짜리 '엑셀 저장' 작업만으로, 핵심 공급업체들은 매일 저녁 최신 발주 현황을 포털에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찾은 '무료 읽기(Read) API'였다.
[포털] 납품 현황 모니터링: 모든 정보는 포털에서
그렇다면 공급업체들이 포털에 입력한 '납품 예정일' 데이터는 어떻게 활용할까? 처음에는 이 데이터를 다시 ERP에 업로드하는 것을 생각했지만, 더 좋은 방법을 깨달았다. ERP는 '확정된 실물'의 결과만을 기록하는 곳이고, 포털은 '변동 가능한 과정'을 공유하는 곳으로 역할을 명확히 나누는 것이다.
새로운 프로세스:
* 공급업체는 포털에 접속해 발주 건별로 '납품 예정일'을 입력하고, 일정이 바뀌면 수정한다.
* 이제 "주문한 시약, 언제 들어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더 이상 공급업체에 전화하지 않는다. 그저 포털에 접속해서 최신 상태를 확인하고 바로 답변해준다.
* 나뿐만 아니라 생산팀, 품질팀 등 관련 부서 담당자들에게도 포털의 조회 권한을 주면, 그들은 더 이상 나를 거치지 않고도 직접 납품 현황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ERP에 데이터를 다시 올리는 5분의 수고마저 사라졌다. 대신 포털은 '납품 관련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이라는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수십 통의 전화와 이메일을 줄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시스템의 핵심 가치였다.
완벽한 시스템을 꿈꾸기보다,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해주는 '작동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젠 노코드툴로 하나씩 만들어가 보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