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가 재무회계와 세무회계에만 매달릴 때 놓치는 것들
스타트업, 혹은 벤처기업의 대표(CEO)나 재무 담당자에게 '회계'의 목적을 물으면 대부분 비슷한 답이 돌아옵니다.
"투자자(VC)에게 보여줄 재무제표를 잘 만드는 것." (재무회계) "세금신고 제때 하고, 세무조사 안 받게끔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 (세무회계)
두 가지 모두 회사의 생존과 직결된,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투자 유치를 못 받거나 세금 폭탄을 맞으면 회사는 그 즉시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외부 보고용' 회계에 능숙한 담당자를 채용하는 데 집중합니다. 정해진 기준(K-IFRS나 GAAP)에 맞춰 과거의 실적을 완벽하게 '기록'하고 '보고'하는 전문가를 찾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정작 그 숫자를 경영진이 '의사결정'에 쓰려고 하면, 아무도 답을 주지 못합니다.
"A 신제품의 진짜 원가는 얼마죠?" "B 고객사와 C 고객사 중, 누가 우리에게 더 이익을 남기는 고객인가요?" "다음 분기 예산을 어떻게 짜야 현금 흐름이 막히지 않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관리회계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벤처에는 이 나침반이 없습니다. 재무제표라는 '지난 항해 일지'만 있을 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째, 법적 강제성이 없어서이고, 둘째, 그 일을 해 본 담당자가 없어서입니다.
재무회계와 세무회계는 정해진 규칙(법)을 따르며, 정해진 시기(분기, 연말)에 보고해야 하는 '숙제'입니다. 하지만 관리회계는 법이나 규칙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더 나은 결정을 하기 위해' 필요할 뿐입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니 우선순위에서 밀려납니다.
더 큰 문제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결산'과 '세무신고' 경험자를 재무 담당자로 채용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데이터를 룰에 맞춰 완벽하게 정리하는 데는 특화되어 있지만, 그 데이터를 가공해 미래를 예측하고, 원가를 분석하고, 사업성을 검토하는 '관리회계' 업무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렇게 회사는 '경영 데이터'의 공백 상태로 달리게 됩니다.
관리회계가 없는 경영은, 계기판과 내비게이션 없이 '감'으로 운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재무회계는 "우리가 지난 3개월간 100km를 달렸다"는 **총 주행거리(과거 실적)**를 알려줍니다.
세무회계는 "과속 딱지를 내지 않으려면 속도를 지켜야 한다"는 **교통 법규(규제)**를 알려줍니다.
관리회계는 "지금 시속 80km로 달리고 있고, 연료는 30% 남았으며, 이 속도라면 목적지까지 2시간 걸린다"는 현재 상태와 미래 예측을 알려줍니다.
어느 것이 당장 운전대를 꺾는 데 필요할까요?
수많은 벤처가 '캐시 번(Cash Burn, 현금 소진)'을 겪다가 스러집니다. 그 과정에서 "이 기능을 개발하는 데 돈이 이렇게 많이 들 줄 몰랐어요" 혹은 "이 제품, 팔면 팔수록 손해였네요"라는 뒤늦은 후회를 합니다. 계기판이 고장 난 차를 전속력으로 몰았던 것입니다.
물론 10명짜리 벤처가 대기업처럼 복잡한 관리회계 시스템을 갖출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회사의 성장 단계에 맞춰 반드시 이 기능을 탑재해야 합니다.
1단계: 벤처 / 시드기 (Seed Stage)
구조: CEO + 외부 세무대리인
업무: 생존과 증빙. (세금신고, 지출 관리)
관리회계: 없습니다. CEO의 머릿속에 있는 '현금 소진 속도(Burn Rate)'와 '생존 가능 기간(Runway)' 계산이 전부입니다.
2단계: 시리즈 A~B 투자 유치기 (Growth Stage)
구조: 첫 인하우스 재무 담당자 (1명) 채용
업무: 내부 월 결산 시작, 투자 실사(DD) 대응.
관리회계 (시작): 이 담당자는 결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산'을 짜고 '예산 vs 실적'을 비교 분석하는 첫걸음을 떼야 합니다. 관리회계의 씨앗이 심어지는 시기입니다.
3단계: 상장 준비기 (Pre-IPO Stage)
구조: CFO 영입, 팀 분리 (재무회계팀 vs 관리회계팀)
업무: 외부감사 대응, 내부통제 시스템(ICFR) 구축.
관리회계 (고도화): 드디어 '관리회계(FP&A)' 전담 조직이 생깁니다. 이들은 사업부별/제품별 손익을 분석하고, 정교한 미래 사업 계획을 수립합니다.
4단계: 상장 이후 (Post-IPO Stage)
구조: 기능별 팀 완성 (회계, 세무, IR, FP&A)
업무: 공시, 주주 대응.
관리회계 (파트너): 관리회계팀은 단순 분석을 넘어, 각 사업부에 '비즈니스 파트너(BP)'로 참여합니다. 신규 투자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수익성 개선을 리드하는 전략가로 진화합니다.
스타트업 CEO에게 묻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의 재무 담당자는 '과거'만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미래'를 함께 그리고 있습니까? 그들은 단순한 기록자(부기)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의사결정을 돕는 조력자입니까?
재무제표라는 백미러도 중요하지만, 당장 앞유리에 펼쳐진 길을 보여주는 계기판과 내비게이션이 없다면 우리는 절벽으로 향할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장 우리 회사의 '경영 나침반'을 만들고, 그 데이터를 읽어 줄 사람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