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이직 후 느끼는 상실감
새벽 2시, 노트북 화면의 파란 불빛이 얼굴을 비춘다. 슬랙 메시지는 끊임없이 울리고, 오늘도 '긴급'이라는 단어가 붙은 업무가 세 개나 쌓여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텅 빈 사무실에 나 혼자만 남아있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15년 넘게 쌓아온 경력을 바탕으로 설렘과 확신을 가지고 시작했던 스타트업 이직이었는데, 언제부턴가 매일 아침 출근길이 무겁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오늘도 살아남아야지"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시니어로서 스타트업에 온다는 건 복잡한 감정이다. 한편으로는 내 경험과 노하우가 이 작은 조직에 큰 임팩트를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내가 너무 꼰대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더 복잡했다. 주니어들은 내게 모든 답을 기대했고, 대표는 내가 마법사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했다. '시니어니까 이 정도는 할 수 있죠?'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스타트업에 오면서 그렸던 그림이 있었다. 빠른 의사결정, 수평적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내 경험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환경.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빠른 의사결정은 종종 '시니어가 알아서 해주겠지'라는 식의 무책임으로 이어졌고, 수평적 문화라는 건 결국 시니어가 모든 것의 최종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내 경험? 위기 상황에서만 소방수처럼 불려다니는 것 같았다.
가장 아이러니한 건 내 마음이다. 예전 대기업에서 일할 때는 답답했다. 층층이 쌓인 결재라인, 눈치와 정치, 혁신을 가로막는 관료주의. "이런 곳에서 뭐하고 있나" 싶어서 뛰쳐나왔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그 모든 것들이 그립다. 정해진 프로세스, 명확한 역할 분담, 그리고 무엇보다 '내 선에서 끝나는' 책임의 경계. 참 간사한 게 인간이다. 있을 때는 싫어하고, 없으면 그리워한다.
예전에는 "위에서 결정해주기만 기다리지 말고 주도적으로 해봐"라고 후배들에게 말했었다. 지금은 "누가 좀 결정해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내가 이렇게 일관성 없는 사람이었나 싶어서 자괴감이 든다.
가장 괴로운 건 주변 사람들이다. 팀 미팅에서 모두가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나만 이상한 사람 같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 있어요!'라고 외치는 20대 동료들 사이에서, 나는 '세상은 그렇게 쉽게 안 바뀌는데...'라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냉소적이고, 꿈을 잃어버린 어른 같아서 더 우울해진다. 시니어로서 팀에 에너지를 주어야 하는데, 오히려 내가 팀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까지 든다.
그렇다고 당장 그만둘 수도 없다. 시니어가 스타트업을 몇 개월 만에 그만두면 어떻게 보일까. '적응력이 떨어지는 꼰대'라는 낙인이 찍힐까 봐 두렵다. 게다가 이 나이에 다시 이직 시장에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 경험이 정말 의미 없는 건 아니다. 확실히 예전보다 더 유연해졌고, 더 빠르게 판단하는 법을 배웠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 가혹할 뿐이다.
시니어로서 느끼는 또 다른 어려움은 외로움이다. 대기업에서는 비슷한 연차의 동료들이 있어서 서로의 고민을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나보다 경력이 많은 사람이 거의 없다.
후배들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고, 대표에게는 불만을 털어놓기 어렵다. 결국 혼자서 모든 걸 감내해야 한다. 가끔 예전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하소연하지만, 그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살고 있다.
결국 내가 잃어버린 건 무엇일까. 안정감? 여유로움? 아니면 일과 삶의 경계?
아마도 '내가 쌓아온 것들의 가치'에 대한 확신일 것이다. 15년 넘게 쌓아온 경험과 노하우가 여기서는 때로 짐처럼 느껴진다. "예전 회사에서는 이렇게 했는데..."라는 말을 하려다가 스스로 멈추게 된다. 꼰대로 보일까 봐서.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도 있다. 나는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인가, 도전을 즐기는 사람인가. 보수적인 사람인가, 혁신적인 사람인가. 스타트업에 와서 내 안의 이런 모순들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글을 쓰고 나니 조금 후련하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이런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인간의 간사함도, 내 안의 모순도 그냥 받아들여야 할 부분인지 모른다. 완벽하게 일관된 사람은 없으니까. 대기업이 답답할 때도 있고, 스타트업이 불안할 때도 있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시니어로서의 부담감도 결국은 나 자신이 만든 프레임일 수 있다. 모든 걸 다 알아야 하고, 모든 걸 다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져도 되지 않을까.
내일 아침에도 출근해야 하고, 또 예측 불가능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씩은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때로는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지 않나. 지금의 혼란과 상실감도, 결국은 더 진짜인 나를 만나기 위한 여정의 일부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혹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식으로, 그리고 각자의 모순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