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 그만 좀해라.
“팀장님, A부품 구매요청 올렸는데 언제쯤 될까요?”
“지난번에 발주 넣은 B자재, 입고일 좀 앞당겨 주세요!”
아침부터 미친 듯이 쏟아지는 구매요청, 거기에 더불어 발주 나간 품목이 언제 들어오냐며 재촉하는 현업부서원들. 정신을 차려보면 모니터 한쪽엔 수십 개의 메신저 알림이, 다른 한쪽엔 어지러운 엑셀 시트가 가득합니다. 구매팀장의 자리는 마치 쉴 새 없이 몰아치는 파도 한가운데 떠 있는 돛단배 같습니다. 어떻게든 이 파도를 헤쳐나가고, 원가를 사수하고, 납기를 맞추는 것. 그것이 저와 우리 팀의 유일한 지상 과제입니다.
바로 그 순간, 모든 알림을 무력화시키는 메일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띵동! 발신인: 대표이사. 제목: [전사공지] ESG 경영 원년 선포.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10분 뒤 납기를 걱정하는 제 손끝과, 10년 뒤 미래를 그리는 대표님의 비전. 이 거대한 간극 앞에서 'ESG'라는 세 글자는 그저 공허한 구호처럼 느껴졌습니다. 대기업 출신 대표님과 저, 구매팀장의 '동상이몽'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물론 대표님의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대기업에서 ESG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는 기업의 생존과 직결되는 필수 조건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ESG 경영을 통해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고, 새로운 투자 기회를 얻고, 더 나아가 훌륭한 인재를 유치할 수도 있겠지요.
대표님께서는 우리 회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고 계실 겁니다. 그 원대한 포부와 비전은 팀장의 한 사람으로서 존경스럽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How)'입니다. 대표님의 이상적인 그림과, 제가 책임지고 있는 구매팀의 현실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간극이 존재합니다.
저는 구매팀장입니다. 회사의 비용을 책임지는 최전선에서 팀을 이끌고, 수많은 협력업체와 관계를 맺으며 공급망 전체의 안정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제게 ESG는 현실적으로 아래와 같은 문제들을 의미합니다.
1. '착한 소비'는 '초과 예산'의 다른 말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은 '단가'입니다. 친환경 인증 원자재, 재활용 소재, 공정무역 부품... '친환경', '윤리적'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 가격은 거짓말처럼 뛰어오릅니다. 당장 10원, 100원에 따라 회사의 수익률이 널뛰고, 분기별 구매 예산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희 팀에게 이는 엄청난 압박입니다. ESG를 챙기려다 '원가 관리 실패'라는 주홍글씨를 새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2. "저희 같은 작은 업체가 무슨..." 협력업체의 한숨과 저희 팀의 곤란함 저희와 함께하는 협력업체들 역시 대부분 사정이 비슷한 중소기업입니다. 그들에게 'ESG 관련 증빙'이나 '탄소배출량 데이터'를 요구하는 것은 저희 팀원들에게 또 다른 고충을 안겨주는 일입니다. "저희가 그런 걸 관리할 시스템도, 인력도 없습니다"라는 답변 앞에서, 저희 팀원들은 실적 압박과 관계 유지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대기업처럼 공급망 전체를 관리하고 ESG 기준을 요구할 '갑'의 위치에 우리가 있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3. 모든 것은 '우리 팀'의 업무 과중으로 ESG는 결국 '증명'의 과정입니다. 수많은 데이터와 보고서로 우리가 얼마나 ESG 기준을 잘 지키고 있는지 입증해야 합니다. 전담 부서도, 전문 인력도 없는 상황에서 이 모든 부담은 결국 고스란히 저희 구매팀의 몫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본업만으로도 벅찬 팀원들에게 이제는 ESG 보고서 작성이라는 새로운 짐까지 지우게 될까 봐 팀장으로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중소기업의 ESG는 대기업의 그것을 흉내 내는 것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그건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실패하는 길이다.
대기업에서 온 리더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강한 의지'와 '체계적인 프로세스'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그 믿음은 풍부한 '자원'과 시장을 움직이는 '힘'이 전제될 때만 유효하다. 수백 개의 협력사를 단번에 움직이게 할 구매력도, ESG 전담팀을 꾸릴 인력도, 친환경 비용을 기꺼이 감수할 자금력도 없는 중소기업에게 대기업식 ESG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제발 그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같은 중소기업의 ESG는 밖이 아닌 안에서, 보고서가 아닌 실천에서 시작해야 한다. 화려한 인증보다 중요한 것은 매일 낭비되는 A4용지를 줄이는 것이고, 거창한 사회공헌 계획보다 시급한 것은 우리 직원들의 '워라밸'을 보장하는 것이다. 공급망 전체를 바꾸겠다는 선언 이전에, 우리 회사가 먼저 투명하고 소통하는 문화를 갖추는 것이 진짜 'G(지배구조)'의 시작이다.
대기업에서의 성공 경험은 훌륭한 자산이지만, 때로는 현실을 가리는 안개가 되기도 한다. 그 안개를 걷어내고, 발 딛고 선 이곳의 척박한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 그것이 우리 회사에 진짜 '지속 가능한' 성장을 가져올 ESG의 첫 단추일 것이다.